◆감우성, '멜로 장인' 수식어 아깝지 않아
지금 '이 바닥' 최고의 '멜로남'으로 주목받고 있는 배우는 단연 감우성이다. 4년 만의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로 중년 남자의 중후한 매력을 부각시키며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미스티'의 지진희가 연기한 강태욱에 비해 캐릭터 자체도 공감할 만한 포인트가 많아 남녀 불문하고 폭넓은 시청자층으로부터 고루 지지를 얻고 있는 편이다.
일단 캐릭터부터 살펴보자. 감우성이 연기하고 있는 손무한이란 인물은 젊은 시절 '광고 천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업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실력자다. 중독에 가까울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그렇게 성공한 만큼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물이다. 그렇게 일만 하며 성공을 위해 달리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게 되고, 급기야 어린 여자아이의 죽음에 자신이 만든 광고가 일조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회의론자로 변해버린다. 결국엔 암에 걸려 수년간 투병하다 말기 판정을 받고 삶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죽음의 문턱에서 과거 자신의 일과 연루됐던 여자 김선아를 만나 마음의 용서를 구하려다 문득 사랑을 느끼게 된다. 다소 진부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지만 '미스티'의 지진희 캐릭터에 비해 오히려 설득력 강한 설정이다.
문제는 그 '진부하다'는 부정적인 면을 축소시키고 긍정적인 이미지의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인데, 역시 이 순간부터는 배우의 몫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때 필요한 건 당연히 연기력. 그리고 연기력을 돋보이게 만들어줄 수 있는 외모와 기존에 잘 다듬어둔 이미지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인데 멜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제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외모를 배제하고 성공을 말할 순 없다. 감우성은 데뷔 당시부터 편안하고 준수한 이미지로 대중에 어필했던 인물이다. '꽃미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지만 부드러운 인상과 지적인 분위기로 호감도를 높이는 스타일이다. 특정할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두지 않은 까닭에 연기 폭도 넓은 편이다. 그래서 영화 '왕의 남자' '알포인트' '무법자', 드라마 '근초고왕' 등의 작품에서 남성미가 돋보이는 캐릭터를 소화하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멜로를 병행하며 장르를 넘나들 수 있었다.
감우성을 떠올릴 때 주로 거론되는 건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드라마 '연애시대' 등 멜로 장르가 많다. 오히려 연기 자체를 말할 때는 분명 '왕의 남자'에서 보여준 광대 장생 캐릭터가 더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멜로 장르 안에서 존재감 역시 그에 못지않다. 까칠한 말투로 여주인공과 티격태격 대립하다 어느 순간 그윽한 눈빛으로 속내를 슬쩍 드러내는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은 감우성을 만나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강한 마력을 발휘한다. 연기 좀 한다는 배우들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 중 하나가 모든 컷을 자기 위주로 돌리려 강한 연기에 집중한다는 것인데 감우성은 상대의 연기를 충실히 받아주며 밸런스를 만들어낸다. 지금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도 그렇다. 주름진 얼굴에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화면을 압도하며 시청자를 캐릭터의 감정 안으로 끌어들인다. 상대역인 김선아의 연기에 티 안 나게 리액션하며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인다. 조화를 통해 작품 전체의 밸런스를 맞춰 나갈 줄 아는 배우다.
◆지진희 '미스티'로 '멜로에 적합한 배우' 입증
드라마 '미스티'에서 지진희가 연기한 강태욱 캐릭터는 사실 현실적으로 공감을 얻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한 여자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집착, 상대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사랑해"라고 말하는 남자. 극이 중반부를 넘어설 때까지 오로지 자신의 아내를 위해 헌신하며 '뭘 저렇게까지'라는 말도 들었다. 성공에 대한 과도한 열망으로 독기를 내뿜는 데다 심지어 외도까지 한 아내를 그저 감싸 안기만 한다. 소위 '흔한 남편'의 일상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구애를 거듭하며 아내의 마음을 독차지하려 노력할 뿐이었다.
물론 이 맹목적인 사랑이 상당수 여자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사실이다. 결혼 이후 아내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남자가 태반인 현실 속에서, 적어도 '미스티'의 지진희는 세상 둘도 없는 '잇 아이템'이 될 만하다. 그래서 후반부에 이르러 살인사건의 진범이 지진희란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반전이 있을 것'이란 말이 끊임없이 돌았다. 여자 시청자들은 '완벽한 사랑꾼'인 지진희가 사랑보다 더 강한 집착으로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쨌든 후반에 이르러 남자의 사랑이 뭔가 애매하게 탈색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이 캐릭터는 여자 시청자들로부터 '멋있다'는 말을 끌어냈으니 그걸로 족하다. 그 많은 남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혀를 끌끌 차더라도, 남자 주인공 캐릭터의 매력은 멜로드라마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고 이 매력은 결국 동성이 아닌 이성에 어필하는 것이다.
대본상에서 이 정도로 캐릭터를 잘 다듬어둔 상태라면 이제 공은 배우에게 넘어간다. 연출자가 의도에 의해서나 또는 부족한 능력 때문에 극을 망가트리지 않는 이상 캐릭터의 완성도는 배우 본인에게 달려 있다고 봐야 한다.
결과적으로 강태욱이란 캐릭터는 지진희를 만나 설득력 있게 잘 살아났다. 애절하고 진지한 눈빛과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를 베이스로 깔고, 탄탄한 몸에 수트를 걸친 채 샤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멋스러운 중년 남자의 매력을 끌어냈다. 남자 시청자와의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진 못했을지언정 캐릭터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현실적인 캐릭터일수록 인물의 감정이 전달될 수 있도록 밀어붙이는 끈기가 중요한데 이때가 바로 배우의 비중이 커지는 순간이며 지진희가 그 어려운 걸 잘 해냈다. 사실 지진희의 필모그래피에서 멜로의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중에서 시청자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될 정도의 인상적인 캐릭터라면 2009년작 '결혼 못하는 남자'와 그보다 전에 방영됐던 2003년작 '대장금'이 떠오른다.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는 심한 결벽증을 가지고 살아가다 한 여자를 만나면서 바뀌어가는 인물의 모습을 코믹하게 그렸다. '대장금'에서는 긴 세월 동안 사모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버팀목 역할을 하는 우직한 남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 뒤로도 멜로 연기를 꾸준히 하면서도 아쉽게 눈에 확 들어올 정도의 캐릭터를 만나진 못했는데 '미스티'를 통해 '이 분야에서 힘 좀 쓰는 배우'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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