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궤변의 시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습니다."

2005년 아이돌그룹 클릭비의 김상혁이 3중 추돌 뺑소니 사고를 낸 뒤 기자회견장에서 한 말이다. 그가 사고를 낸 뒤 11시간 만에 경찰서로 출석했기 때문에 음주운전으로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발언은 황당무계한 궤변의 전형으로 유명해졌다. 지금도 정황상 확실한 사안을 모순되는 말로 부인할 때 곧잘 비유된다.

그가 몇 년 전 전자담배회사의 모델이 되자, 주위에서 '니코틴은 태웠지만 흡연은 하지 않았다'는 우스개를 날렸다. 3년 전 종편 개그 프로에 출연해 "나라면 '욕은 했지만 쌍욕은 안했다'고 할 것 같다"며 자폭 개그를 했다. 그래도 김상혁은 양심이 있다. 10여 년 전의 궤변을 부끄러워하면서 여전히 곱씹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용서받고 남을 만한 연예인이다.

성폭행 혐의로 구속된 연극연출가 이윤택은 판사 앞에서 자신의 범행에 대해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이윤택은 연극 연습 중인 A씨의 가슴을 만지고 바지 안으로 손을 넣은 사실에 대해 "호흡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B씨의 가슴에 가한 성추행에 대해선 "고음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윤택의 뻔뻔한 궤변에 비하면 김상혁의 궤변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궤변(詭辯)은 얼른 보기에는 옳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말이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궤변가들이 설치고 다녔는데, '자신의 길고 산만한 다변(多辯)에 취해' 국가와 사회를 혼란시키고, 자신마저 망쳤다.

얼마 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청와대 주사파의 지방분권 개헌은 고려연방제로 가기 위한 술수"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쯤으로 쓰는가 했더니, 실제로 그렇게 믿고 떠드는 듯했다. 홍 대표는 20년 전부터 지방분권 운동을 벌여온 대구경북민을 주사파 동조세력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 궤변 중의 궤변이다. 지방분권을 연방제와 동일시하는 한국당의 인식 수준을 보면 보수세력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아무리 정치 공세라 하더라도 합리성과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홍 대표가 '향단이' '바퀴벌레' '암 덩어리' '연탄가스' '영감탱이'라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쓰는 모양이다. 옛날 소피스트들은 말장난하다가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기도 했지만, 한국의 궤변론자들은 불쾌함과 역겨움만 안겨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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