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이영훈 지음/백년동안 펴냄
세종 임금(1418~1450 재위)은 노비(奴婢)를 완전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하고, 주인의 재물로 만들었다.(15~17세기 조선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노비) 세종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군사를 접대할 기생을 배치했고, '기생의 딸은 곧 기생이다'는 법을 만들었다. 세종은 양반의 신분적·경제적 기반을 만들었고, 양반 지배의 철학적 기초를 다졌다. 세종은 당대에 이미 양반들로부터 '성군' 칭송을 들었다. 그는 정말 성군일까? 이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역사 바로 보기' 시리즈 제1권이다. 앞으로 '나라는 누가 팔았는가' '우리 민족, 그 불길함' '위안소의 여인들' '환상의 통일론' 등을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노비와 양인 사이에 난 자식은 노비"
17세기 중엽 조선왕조 인구는 대략 1천200만 명이었다. 그중 30~40%, 그러니까 360만~480만 명이 노비 신분이었다. 1663년 만든 한성부 호적(오늘날 서울 아현동, 가좌동, 합정동 일대)에 등록된 인구는 총 2천374명인데, 그 가운데 1천729명, 곧 73%가 노비였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성립하면서 공동체 사회는 신분제 사회로 탈바꿈했다. 조선왕조를 연 정치세력은 처음에는 노비 인구의 확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1401년 태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전면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노(奴)와 비(婢)의 결혼만을 허용함으로써 노비는 단순 재생되는 수준이었다. 1418년 8월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세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방임했으며,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을 노비로 규정했다. 이후 노비는 급격히 증가했다. 1420년 9월 예조판서 허조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노비를)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동의했다. 1422년 노비고소금지법이 제정되면서 노비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타인의 불법행위에 맞설 권리가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공동체가 없었던 것이다.(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일에 제동이 걸린 것은 18세기 조선 영조 때이다. 영조 임금은 노비를 함부로 죽일 경우 60대의 장을 치고, 1년간 유배를 보내는 법을 제정했다.)
◇특정 여인에게 성 접대를 세습시키다
1431년 1월 세종은 각 고을의 창기가 낳은 자식은 천인으로 삼자는 형조의 건의를 수락했다.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기생의 아들을 관노로 삼는 신분 세습의 율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어 1431년 11월 세종은 관비가 양인 남자와 낳은 자식도 부계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기생의 예에 준하여 모두 천인으로 돌리자는 건의에 찬성했다. 지은이는 "조선시대에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기생 신분의 여인들이 있었다. 기생 신분은 딸에게 세습되었다. 특정 여인에게 성 접대의 역을 강요하고 세습시킨 다른 나라의 예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기생제를 사실상 창출한 군왕이 세종이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세종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군사를 접대할 기생을 배치하고, 전국 각 군현에 수십 명씩의 기생을 배치했다.
◇지극정성 사대(事大)의 예를 다했던 세종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천제(天祭)는 천자의 고유한 예로 제후는 이를 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신하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조선 태조와 태종은 그에 구애받지 않고 천제를 거행했다. 1419년 세종 1년에 가뭄이 심했다. 변계량이 원구단에서 천제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세종은 "참람한 예는 행함이 불가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변계량이 수천 년 동안 행해온 예를 폐함은 부당하며, 더구나 조선은 강토가 수천 리로 중국 내의 백리 제후와 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세종은 "어찌 강토가 수천 리라 하여 천자의 예를 분수없이 행하리오"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변계량이 심한 가뭄을 맞아 제후가 하늘에 제사를 드림이 무슨 잘못인가라고 했고, 세종은 어쩔 수 없이 천제를 거행했다. 그러나 '천제는 제후가 행할 수 없는 참람한 예'라는 세종의 소신은 오랜 기다림 끝에 실행을 보았다. 1439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친히 원구단에 나가 천제를 거행하라는 상소가 있었지만 세종은 거절했다. 1443년 천제는 최종 폐지되었고, 조선왕조는 제후국 체제로 정비되었다.
세종이 명나라 황제에게 바쳤던 처녀 53명이 1435년 돌아왔다. 여인들이 세종 임금에게 인사할 때, 세종은 신하를 대하듯 남향을 하지 않고 동남향으로 앉겠다고 고집했다.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황제를 모셨던 여인들을 온전히 신하로 하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환상의 나라, 환상을 먹고사는 국민들
지은이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을 '환상의 나라'라고 말한다. 아주 좋다, 멋지다의 환상이 아니라 허상, 착각, 환상에 불과(illusory)하다는 의미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데, 따져보면 근거가 없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믿고 있다. 환상이다. 환상은 인간을 큰 신뢰와 협동으로 이끌 수 없다. 환상이 빚은 역사와 현실의 간격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을 야기한다. 환상은 그 자체로 반과학이다. 환상은 직시되어야 하며, 적절한 대안과 더불어 극복되어야 한다." 지은이는 "지난 70년 건국사를 돌아볼 때 대학을 비롯한 지식사회는 실체를 밝히는 일에 매달려야 했음에도 오히려 환상을 조장하는 역할에 골몰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나라는 갖가지 환상의 굴레에 사로잡혀 안으로는 한 나라의 국민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이념의 대립이 심하고 밖으로는 우방과 공연한 마찰을 일삼고 있다"고 지적한다. 243쪽, 1만2천원.
▷지은이 이영훈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85).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을 공부했다(1977~1982).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7년 정년퇴직했다. 경제사학회, 한국고문서학회,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이승만학당의 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공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대한민국역사'(기파랑, 2013), '한국경제사'Ⅰ·Ⅱ(일조각, 201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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