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 반 타의 반으로 봄맞이 대청소를 하고 나서 자리에 앉아 정리해둔 물품을 보고 있자니 긴 한숨이 나왔다. 필요하지도 않은데 사둔 물건, 필요하긴 하지만 이미 사다 놨다는 걸 모르고 또 산 것, 필요 없는데도 뭔가에 혹해서(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로) 산 물건, 필요하긴 하나 지나치게 많이 사서 집을 비좁게 만드는 물건으로 내 존재 자체가 폭식과 소화불량, 비만, 정체를 체현하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특히 면도기는 시장점유율 1위인 면도기(면도기 자체만 3개, 면도날 4개)부터 전기면도기(3종), 일회용임에도 여러 번 써도 되게 성능이 뛰어난 면도기 3종 등 당장 쓸 수 있는 것만도 10개가 넘었다. 매일 면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수삼 년은 써야 그 면도기들이 소용을 다하게 될 것이었다. 전기면도기는 충전을 하고 면도날을 갈면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아 유산으로 물려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유산을 받고 안 받고는 받는 사람 마음이겠으나.
당장 불필요한데도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과의 차별성 때문에 구입한 면도기를 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특정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접속을 했던 때에 무분별한 구매 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지난 세기 1990년대 초반 TV 홈쇼핑이 처음 시작되었을 무렵 쓸데없는 문구류를 단지 값이 싸다는 이유로 사들였다가 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비에 관한 한 사람은 입력(광고, 입소문, 마케팅 전략)에 따라 출력(소비, 구매, 쓰레기 배출)을 반복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유능한 마케터들은 분석과 통찰, 논리적 결정이라는 인간 고유의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이 소비에 간섭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비사회 속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생산자의 마케팅 기법에 노출이 되고 무의식 중에라도 욕구를 자극받으며 욕망을 실현하게 된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TV의 '맛집 프로그램'을 보다가 차 열쇠를 챙겨들고 나서는 사람처럼.
어떤 SNS, 포털 사이트, 무료 인터넷 서비스는 도파민의 분비를 자극하는 장치를 시스템 속에 숨겨놓고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중독적인 소비행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다른 매체에 비해 더 많은 광고수익을 올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것이 불법적이면 처벌을 받고 제어가 되겠지만 법망을 피해가는 것은 아주 쉽다. 피해를 입은 다수의 사람들이 보상, 배상을 받는 게 훨씬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소비가 '소비자의 현명하고 자발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는 논리를 누군가 교묘하게, 광범위하고 오래도록 전파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상 소비자가 그렇게 독립적인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일방적인 정보를 주입하고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과장과 현혹을 통해 면도기를 몇 개나 더 사도록 한다. 심지어 면도기가 얼마나 많은지 잊게 만들기까지 한다.
이러한 불합리와 정리되지 않은 인간관계 또한 얼마나 많은가. 하나씩 사면 터무니없이 비싸서 억울한 김에 사버린 수십 개들이 화장지, 때깔 좋고 맛있고 값은 싸지만 박스 단위로만 팔아서 조금밖에 먹지 못하고 태반을 버린 과일처럼.
이런 것들을 버리는 데도 상당한 에너지를 요하는 결단과 과정이 필요하고 내가 버린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그런 것들로 어디선가 거대한 쓰레기의 섬이 만들어지고 있고 환경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불편하다.
아무리 많아도 과잉이 되지 않는 것은 새벽녘의 가냘픈 봄비 소리, 그 봄비에 젖은 봄꽃의 소리 없는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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