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날린다. 봄볕 깊숙이 스민 한낮을 지나, 봄밤은 또 그렇게 여러 날을 무르익었다. 조밀해진 봄날들이 모여 절정을 이루고, 절정을 견딘 나무들은 스스로를 흔들어 무거워진 몸을 턴다.
어둠 속에서도 봄은 짙었다. 꽃이어서 봄인 것보다 향기여서 봄이었다. 묽은 어둠이 깔릴 때면 종종 먼 곳을 내다보곤 했다. 멀어서 또렷하지 않은 풍경들 사이로 봄은 소리 없이 잠식했다. 서서히 풍경들이 지워지면 미세한 우울이 찾아오곤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남은 풍경 그 어디 즈음에선가 근원을 알 수 없는 향기가 날아오곤 했다.
어느 계절이었던가. 번잡한 거리를 피해 은둔의 길을 찾아 걷곤 했다. 목적할 곳도 없이 흩날리는 꽃잎을 따라 이방인처럼 무작정 걸었다. 고층 아파트 뒤편엔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곳엔 항상 그늘이 져 있었다. 나는 온종일 미열에 시달리다 집들 사이로 난 좁다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막다른 골목 끄트머리에 오래된 집이 한 채 있었다.
왕왕대던 벌 소리, 따뜻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그 집 마당엔 이내 한가득 꽃이 피었다. 굳게 잠긴 대문과 오랜 시간 비워진 듯 높은 담장엔 희끗희끗하게 말라버린 이끼의 흔적이 짙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대문은 열릴 줄 모르고, 오래된 문패 앞에서 나는 쓰러져가는 가옥의 기억들을 더듬는다. 낡은 문패를 읽거나 담장 너머로 잘 휘어진 나무를 볼 때면 으레 집의 연(年)수나 집주인의 나이를 짐작하곤 한다. '회색빛 벽돌로 정성껏 쌓아올린 걸 보면 분명 일흔을 훌쩍 넘은 선한 노부부가 살았을 거야. 오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2층 옥탑방 창문에선 노부부의 딸이 선한 눈빛으로 수없이 시를 읊었을 거야. 그 딸은 어느새 나만큼 나이를 먹었을 것이고 여전히 선한 눈빛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시를 쓸 거야.'
봄밤의 기억이 다 가시기 전에 나무들은 스스로 봄을 벗는다. 매화가 피고 지고, 목련이 피고 지고, 명자나무 꽃이 피고 지는 곳. 좁다란 화단엔 수없이 꽃들이 피고 지는데, 어이하여 잠긴 문은 오늘도 열릴 줄 모르는 것일까. 작년에 열린 석류가 돌덩이처럼 새까맣게 말라 온 봄을 서성이고 있다.
꽃은 온 밤을 향기로 들쑤시고 나는 오래도록 봄 몸살에 잠을 뒤척인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라. 썰렁한 방에 덩그러니 누워 스스로를 감금했던 내 지난날의 시간들이 가엾어라. 만개한 꽃에 동하여 온몸 흔들어 꽃을 터는 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라. 봄은 떠난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라 했건만 떠난 인연 돌아올 줄 모르네. 인기척 없이도 어지럽게 들러붙은 담쟁이에 잎이 돋고, 어디서 흩날리는지 벚꽃 잎 날아와 문을 두드리네. 떠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어도 남겨진 것에는 이유가 없는 것일까. 소원해진 인연을 아직도 기다리기라도 하듯, 버려지지 않기 위해 더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저 꽃들 가엾어라.'
뚝뚝 떨어진 명자나무 꽃 위로 비가 내린다. 시린 얼굴 위로 꽃잎 떨어진다. 꼭 잠긴 채 아직도 열릴 줄 모르는 내 어두운 심연 속으로 봄이 진다.
봄은 머물지 않아서 봄이다.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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