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정상회담 장소의 정치학

1945년 얄타회담을 앞두고 회담 장소로 루스벨트와 처칠은 키프로스, 시칠리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건강이 나빠져 그렇게 멀리까지 갈 수 없다며 흑해 연안의 얄타를 고집했다. 건강 때문에 먼 거리를 이동하기 어려운 것은 루스벨트나 처칠도 마찬가지였지만, 스탈린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스탈린에게 아쉬운 처지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소련이 독일을 계속 몰아붙이는 것은 물론 대일전(對日戰)에 소련의 참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미국에서 지중해 몰타까지 7천812㎞를 배로, 거기서 스몰렌스크의 사키까지 2천200㎞를 비행기로, 거기서 다시 얄타까지 자동차로 5시간을 이동하는 강행군을 해야 했다. 이는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던 루스벨트의 병세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얄타회담 2개월 뒤 사망했다.

1938년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회담을 위해 베르히테스가덴, 고데스베르크, 뮌헨 등 독일 땅으로 세 번이나 날아간 것이나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마오쩌둥과 회담을 위해 베이징으로 간 배경도 유사하다. 무조건 전쟁은 안 된다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던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마음을 얻어야 할 처지였고, 닉슨 역시 소련 봉쇄와 동남아 전체의 공산화를 막으면서 베트남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려면 마오쩌둥의 호의(好意)가 필요했다.

당사자 모두 상대방에 아쉬울 게 없는 경우 정상회담은 제3국에서 열리는 것이 보통이다. 1986년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간의 정상회담이 그렇다. 회담 장소로 미국은 워싱턴을, 소련은 모스크바를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스테잉리뮈르 헤르만손 아이슬란드 총리가 이를 중재해 레이캬비크로 낙착(落着)시켰다.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를 자로 재면 중간 지점이 레이캬비크인데 여기서 정상회담을 하면 양국 모두 체면을 세울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평양을 고집하는 북한에 미국이 비공개 접촉에서 "수백 명의 답사팀이 평양 구석구석을 체크해야 하고, 성조기를 단 미국 승용차가 평양 시내를 관통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는 소식이다. '평양은 가지 않겠다.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아쉬운 것은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지렛대 삼아 '정상국가'로 데뷔하겠다는 김정은의 속셈이 벽에 부딪히고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