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천하제일 내로남불대회

지난해 구글에서 한국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본 키워드는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뒤바뀐 도쿄 소년 타키, 시골 소녀 미츠하에게 찾아온 기적과 사랑을 그린 영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독특한 영상미에 힘입어 국내 개봉 역대 일본 애니 중 가장 많은 367만 명이 관람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사는 타키와 미츠하는 현실에서 절대 만날 수 없는 인연이다. 타키의 시간에서 보면 미츠하는 3년 전 혜성이 마을에 떨어지는 바람에 수많은 주민과 함께 숨진 상태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기막힌 영화 속 설정을 통해 먼 훗날 우연히 서로를 알아보지만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타키 군처럼 누군가에게 '너의 이름은'이라고 묻고 싶어진다. 다만 그 대상이 꿈에서조차 그리워하며, 잊어선 안 된다고 되뇌던 이가 아니라서 안타깝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게,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위선자(僞善者)들이라 화가 날 지경이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는 흘러간 옛 추억 속의 이름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두 전직 대통령과 지연으로 얽힌 대구경북(TK) 출신들도 제법 됐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공교롭게도(?) 헌정 사상 형사 법정에 서게 된 전직 대통령 네 명 모두 TK 출신인 탓에 'TK=적폐'란 인식이 세간에 더욱 깊이 뿌리내린 점이다.

마침 MB 정부에서 청와대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몸담았던 한 인사가 몇 년 만에 전화가 왔길래 근황을 물었더니 "새옹지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썩 유쾌하지 않은 일로 '순장조'가 되지 못한 채 정권 말기에 물러났지만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이번 수사에 피의자로 불려가 실형을 살지도 모를 일이라는 얘기였다. 대충 그가 맡았던 '임무'가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 씁쓸했다.

집권여당 표현대로 '적폐세력'이야 그렇다 치자. 촛불혁명 덕분에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 역시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데에는 뒤지지 않는다. 여권의 유력 차기 대권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 6'13 지방선거에 '안희정의 친구'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 서울시장을 꿈꿨던 정봉주 전 의원….

성추문이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특히 시민단체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19대 국회에서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입법을 적극 주도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영향력을 빌미로 한 공짜 외유에다 수상한 후원금 수수'사용, 인턴의 초고속 승진 등 조배숙 민주평화당 대표의 입을 빌리면 "수법의 다양함과 뻔뻔함이 전 정권의 적폐와 오십보백보"다. 그를 지켜내려는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처절한 노력은 어쩌면 레임덕의 서막은 아닐까?

이름 석 자만 다를 뿐 이들의 행태는 대동소이하다. '갑질'과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끝판왕들이다. 변명도 한결같다. 이 전 대통령은 구속되면서 "오늘날 국민 눈높이에 비춰보면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고 했고, 김 금감원장은 "국민 눈높이에서 볼 때 지적받을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했다. 이쯤 되면 도대체 그 국민 눈높이에 맞는 지도자가 있기는 한 건지 자못 궁금하다.

대한민국 지도층의 추악한 민낯은 남의 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권력에 취하면 뇌가 변하고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도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다는 개념으로 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도 떠오른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관행'명령에 순응한다면 누구나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울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조심스레 물어본다.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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