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遺事<유사>♪] 기생, 예술인에서 노류장화로…향촌동에 한때 요정 130여곳

조선이 망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자(1909년 4월)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예속되어 있던 교방 관기들이 실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호구지책을 위해 1910년 5월에 만든 단체가 '대구기생조합'이다. 1922년 6월에는 일본인 아이바라 산페이(粟飯原 三平)도 25명의 기생들을 모아 '대구권번(大邱券番)'을 향촌동에 만든다.

경부선이 개통되어 교통이 트이자 서울, 평양 다음 삼대 도시였던 대구는 물산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경제가 융성하게 된다. 소문 듣고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오고 삼남 각지 조선인들도 돈을 벌고자 모여들었다. 금광이 발견된 알라스카와 드넓은 서부 농장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몰려드는 개척 시의 미국인들의 행태와 흡사했다. 돈은 주색잡기와 남매간이다. 기생되어 생계를 이어나가겠다는 여인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니 기생학교가 모자란다. 1927년 1월 6일에는 관기 출신 염농산이 상서동 20번지에 '달성권번'을 설립한다. 권번에는 많은 대구경북 미녀들이 있었다.

옛날에는 남남북녀라고 했다. 통통한 여자를 미녀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서구화 되면서 훤칠하고 미끈하고 갸름한 대구경북 여성의 신체가 미녀로 각광을 받게 된다. 1958년 동인동 출신 오금순이 미스코리아 진이 된 이래 1987년에는 장윤정이 미스 코리아 진이 되고 다음 해 미스유니버스에 나가 2위를 한다. 2000년 손태영, 2001년 서현진이 미스 코리아에 입선을 하였다. 2007부터 2016년까지 미스 대구경북 입상자 중 한 명은 무조건 본선 진선미 중에 포함이 되는 기염을 토한다. 미인대회를 나가지 않고도 소문난 대구 미녀는 한채영, 추자현, 민효린, 송혜교, 엄지원등이 있다. 평양기생, 진주기생 그리고 강계 미녀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영혼이 있는 미녀의 고향은 대구다. 세 명의 여왕과 한명의 여성대통령과 여당대표가 어느 고장사람인가?

감영에서 관기들을 관리하고 할 때는 육예(예,악,사,어,서,수)를 가르쳤다. 예는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시경도 당시 유행하던 음악의 가사를 공자가 모은 책으로 교양인은 악이 필수였다. 사는 활쏘기로 사정에 나가 궁술을 가르쳤다. 말 타기도 가르쳤고 이를 어라고 한다. 수와 서는 계산과 독서다. 기생들을 엘리트 양반들과 같은 수준을 만들기 위한 교육과정이다. 일본의 시골 검객 미야모토무사시(宮本武藏)가 당대 최고수 검객인 사사키고지로오(佐佐木小次郞)를 나무칼로 베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노자 도덕경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알게 해준 교토 한 기생의 가르침 덕이라고 한다.

대구 기생들이 국체보상운동에 앞장서고 앵무는 집을 팔아 성금을 만들었던 것도 이런 교육의 결과이다. 기생 교육의 실천적 표현이 시, 가무, 붓글씨, 판소리 그리고 그림그리기였다. 관기들이 권번 소속이 되고도 그런 교육을 계속 받았다. 요즘 예능인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S.M, J.Y.P, Y.G, N.H.M등의 엔터테인먼트에서 연기와 춤 그리고 노래에 대한 지도를 받는 것과 같다. 중앙통 좌우에서 울려 퍼지던 악기와 창 그리고 유행가 소리는 권번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교육받는 기생들의 피나는 노력의 소리였다.

양풍(洋風)이 불자 대구의 기생들은 관능적이고 향락적인 곳의 노류장화(路柳墻花)로 전락이 되어간다. 권번이 한정식 집과 접목 되어 요정이란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했다. 대구 향촌동에만 130여 곳이 있었고 4,5백 명의 기생이 있었다. 접대부로 변질된 기생들은 멸시의 대상이 된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고위공직자들의 출입금지령이 내리고 요정은 없어졌다.('가미' 한 군데만 남았다.) 그 후 대구의 술집에는 더 이상의 철학을 품고 문화를 창조하는 해어화(解語花)는 살아지고 웃음 파는 에레나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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