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내가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무력통치를 '문화통치'로 표방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국내 항일 민족운동에 대한 감시, 탄압이 더욱 치열해졌다. 독립지사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고 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3·1운동 정신을 이어가기로 함으로써 상하이 임시정부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1919년 4월 13일이다.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었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국호가 정해졌고 '민주공화제'를 천명하였다.

비록 군주제하의 주권은 빼앗겼지만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주권을 행사하고 통치한다고 선언하였다. 본국에 국민, 영토가 있으니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중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소련 등 여러 국가가 우리 임시정부를 인정하였다.

1919년 9월 11일 상하이, 한성,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하였다. 국내 비밀행정 조직인 '연통제', 정보 수집과 연락을 위한 '교통국'을 두었고,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독립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더 이상 상하이를 무대로 하는 항일운동은 어려워졌다. 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압박이 목전에 다다름에 따라 김구, 윤봉길은 거사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상하이점령전승축하 겸 천황생일기념식에서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죽이고 여러 군인을 사상하게 한 사건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지금의 루쉰공원에서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야만 했다.

김구는 '장진구'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바꾸고 광저우인 행세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일본군은 큰 현상금을 걸고 김구 체포에 혈안이 되어 김구는 몸을 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추푸청(상하이 법과대학 설립, 총장)의 도움으로 자싱 저택에 피해 있다가 남호(南湖)로 피해 국무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 하이엔의 남북호 언덕에 자리한 재청별장(추푸청의 사돈집)에 숨어 지내기도 하였다. 때로는 하이닝 강가에서 조국을 생각하며 상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지금 그 자리는 '김구관조처'로 남아있다.

항저우도 안전지대가 되지 못하여 임정요인들은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다 충칭에 자리 잡는다.

1940년 9월부터 충칭으로 옮겨온 임시정부는 상당히 활기를 찾는다. 국민당 장제스의 적극적인 도움도 한몫했다. 현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중경시 투중구 련화지 38호'는 해방 후 환국 때까지 임정요인들이 활동하던 무대다.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광복군 총사령부도 이웃해 있었다.

1919년 4월 13일을 강조하는 것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제의 대한민국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그러했기에 제헌헌법 전문에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하였다. 현행 헌법전문에도 '우리들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계승하고'라 밝혔다.

'임시정부의 법통 승계' 선언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의사, 지사들의 고난의 흔적이 녹아있기에 가능하다. 이런 임시정부의 역사성이 인정되어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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