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25일 성주 성밖숲에는 전국에서 온 3천 명 넘는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이 고장 출신 전설의 가수 '백년설 가요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로써는 시대에 앞서가는 기획을 성주 주민들이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요제는 그해 시작하고 다음 해부터는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진주에서도 해마다 열리던 '남인수 가요제'도 어느 날부터 개최하지 못하게 되었다. 두 가요제 모두 시민단체와 일부 주민들이 두 가수가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기 때문에 기념가요제는 할 수 없다고 치열하게 방해한 탓이었다.
백년설은 성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문학에 소질이 있어 시와 각본을 쓰다가 콜롬비아 레코드사에 입사해 작사가 생활을 시작했다. 문학공부를 더 해보겠다고 일본 고베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가 작사한 '유랑극단'을 취입하게 되는데 1939년에 레코드가 발매되자 뜻밖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되어 백년설이란 이름으로 가수의 길로 가게 된다. 고베 태평 레코드사에 전속이 되어 '두견화 사랑' '고향의 지평선' '일자일루' '마도로스 수기' '북방여로'가 잇달아 발표되며 모두 히트를 치게 된다.
백년설은 성주에서 태어났지만 1940년 초반부터 50년 중반까지 대구에 기반을 두고 활약을 하였다. 봉산동에 살았는데 다재다능한 그는 성명학도 공부하고 고아원도 경영하였다. 돈이 벌리지 않자 현 동아백화점 부근에서 목재상을 하기도 하였다. 1940년에 발표한 '나그네 설움'은 10만 장 이상의 매상을 넘는 큰 작품이었으나 가사에 문제가 있고 만주 보천보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백년설과 작곡가 조경환은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가수 활동은 허용이 되어 '어머님 사랑' '제3유랑극단' '한 잔에 한 잔 사랑' '눈물의 수박' 등을 계속 발표하게 된다. 1941년에는 오케사로 이적해 '고향설' '아주까리 수첩'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꿈꾸는 항구선' '비련의 마도로스' '고향길 부모길' '봉화대의 밤'을 부르게 된다.
이 무렵 태평양 전쟁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일제의 한민족 탄압도 더욱 극악해지고 있었다. 30년대 말에 시작된 창씨개명은 40년대 더욱 열을 올리고 전시 동원체제를 선포하고 궁성요배, 징용, 징병, 학병, 정신대, 보국대, 공출 등이 행해진다. 전시 동원체제가 되자 한반도 내에서 반일, 항일을 한다는 것은 힘없는 개인으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만주나 하와이로 도망가지 않는 한 민족 모두가 친일, 부역해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1942년 총독부 명령으로 남인수와 장세정은 친일 노래 '그대와 나'를 부르고 1943년에는 남인수, 이난영이 부른 '2천 5백만의 감격'이 발표되고 그 레코드 뒷면에는 백년설, 남인수, 박향림이 부른 노래 '혈서지원'이 실려 있다. 1절은 백년설이 부르고 2절은 박향림, 3절은 합창, 4절은 남인수가 불렀다. 이 몇 곡의 노래들은 아직도 일제 부역이라는 원죄가 된다.
남인수는 집이 가난해 학교도 못 다니고 일본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노래에는 뛰어난 소질을 보여 1935년 17세 때 서울로 가 시에론 레코드사에서 '애수의 소야곡'과 '눈물의 해협'을 불러 가수로 데뷔하고 경성방송국에 출현한다. 레코드사 전속으로 취업하여 '애수의 소야곡'을 재취입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다. 노동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없어진 나라에서 호구지책으로 친일 노래 한두 곡 부른 것이 지금까지도 소수 이념에 몰두한 단체에 의해 단죄되는 세상 인심,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세상, 친일을 넘어 거액의 격려금을 받고 작위까지 받은 매국노의 후손들은 국회의원도 하고 갑부도 되었다. 백년설, 남인수는 저승에서 자주 한 동이의 술을 앞에 두고 듀엣으로 '나그네 설움'을 부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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