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이 온통 까매서 그 기억만 나요. 그렇게 새카만 마룻바닥은 처음 봤었거든요."
1980년 무렵이라 했다. 산동농협 임원 사택으로 쓰였던 그 집은 온통 까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던 면사무소 직원 이요한(48)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양면사무소 뒤쪽으로 통하는 옛 문경금융조합 사택 건물을 가리켰다.
일제강점기 때 금융의 중심지쯤 돼야 하나씩 있을 법한 금융조합이 문경도, 예천도 아닌 문경의 변방인 산양면에 있었다니. 문경지역에는 문경읍내를 비롯해 산양, 농암, 점촌에 금융조합이 있었다. 다른 곳들은 조합원이 1천700명 안팎이었는데 산양은 3천 명이 넘었다.
주민들은 이곳이 '잘나가던' 동네였다고 했다. 당시 문경군청 소재지 후보지였을 만큼 문경, 예천 상권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었다. 상업중심지 논거로 거론되는 우시장과 5일장이 섰으며 광복 직후까지 매년 씨름대회가 열릴 정도였다는 게 근거였다. 심지어 군청 후보지역이어서 계획도시로 조성됐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래서 인근을 듣고, 찾고, 돌아다니다 보니 '잘나갔다'는 말은 애향심
'뿜뿜' 넘치는 이들의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영 허황된 말은 아니었다. 전문용어로 바둑판식 배열, 계획도시다운 흔적이었다. 흔한 면소재지 마을들을 지날 때마다 보이는 일자형 도로, 그러니까 지네 몸통 양옆으로 다리가 촘촘하게 붙은 것처럼 큰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집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시가지 구성과 달랐다. 곳곳에 네거리가 나타나는 면소재지 마을이었다.
문경문화원 위원이자 1993년부터 6년간 이곳 면장으로 있었던 김학문(83) 씨는 "큰 수해가 나서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구획이 정리된 곳으로 바뀐 것으로 안다"고 했다.
'옛 문경금융조합 사택'도 지역적 자부심과 연결될 만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이곳의 이름이 '옛 문경금융조합 사택'인 것은 건물로서 마지막 역할이 사택 용도였기 때문이다.
1945년 건립 당시 용도는 사택 겸 사무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몸의 기억으로 기록해둔 마을 주민 일부는 이곳을 고리대금업 사무실이라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들의 기억은 옅었지만 주민들을 몸서리치게 하는 곳이었다는 무조건 반사적 거부감이 진했다. 1980년부터 9년간 산양면사무소에서 근무했던 권오철(69) 씨의 증언은 꽤 구체적이었다.
"명승지 구술 채록을 맡았어요. 그래서 우리 지역 구석구석 이야기들을 듣고 다녔죠. 그런데 주민들 이야기가 여기는 돈 빌려주던 곳이었다는 거라. 일본 다다미식으로 돼 있는데 안에 들어가면 땅문서를 담보로 돈이나 곡식을 받아온다는 거지. 해방되면서 면사무소 직원들이 사택용으로 사용했다는 거예요."
얼핏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에 등장하는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과 닮은꼴이었다. 전북 김제 죽산 일대의 땅을 싹쓸이하던 그 사무실은 문경 산양 불암뜰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는 일본인의 이 사무실과 비슷했다. '마사이치'(正一)라는 이름이 해방 이후 이 지역 땅문서에서 눈에 띄게 자주 나타난 것도 우연은 아닌 듯했다. 하긴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역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필연적일 것만 같은 우연이다.
'옛 문경금융조합 사택'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리모델링을 여러 차례 거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애초 일본식으로 건립됐던 건물은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한국식으로 바뀌어 사용됐고, 외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 일본식으로 다시 모습을 바꿨다.
근대문화유산 지정 전까지만 해도 옛 일본식 가옥 내부의 특징으로, 족자를 놓아두고 붓글씨를 걸어뒀던
'도코노마'(床の間)는 관사로 사용되면서 덧문이 달려 붙박이장 용도로 쓰였다. 5월 말쯤에는 '옛 문경금융조합 사택'이 카페로 바뀐다고 한다. '도코노마'에서 붙박이장으로 또다시 '도코노마'로 돌아온 그 공간은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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