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잔디밭과 흰 백사장이 있는 아름다운 운동장, 곱게 다듬은 노가지와 향나무로 이루어진 울타리. 흰 페인트칠을 한 목재 건물의 푸른색 지붕 위로 펄럭이는 만국기, 그 사이로 울려 퍼지는 오르간 음률. 이 낭만적 풍경은 김남천의 소설 '사랑의 수족관'(1940)에서 여주인공 이경희가 조선에 세우려고 구상하는 빈민 탁아소의 모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경희의 낭만적 구상이 이루어지던 1940년은 일제가 중일 전쟁에 이어 태평양 전쟁 참전을 준비하면서 조선 모든 아이들이 전쟁 물자조달을 위한 솔방울 줍기에 동원되고 있던 때였다.
'사랑의 수족관'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토목기사 김광호와 조선 굴지의 재벌 대흥콘체른의 외동딸 이경희, 이들 두 남녀의 연애를 다루고 있다. 이 두 남녀는 서로 호감을 느끼면서도 쉽게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사회개혁의 이상을 품었지만 식민지의 폭력적 현실 속에서 서른의 나이로 죽은 형에 대한 기억을 안고 있는 김광호와 친일자본가를 아버지로 둔 이경희 간에는 극복하기 힘든 거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두 남녀 사이의 거리를 메워주는 것이 이경희가 구상한 '탁아소 운영'이라는 자선사업이다.
이경희의 탁아소 운영 구상을 '순정에 가까운 인도주의'라면서 냉소적으로 비판하던 김광호가 점차 그 실현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경희가 이 구상을 체계적으로 실현해가면서 둘은 마침내 심리적인 거리를 줄이고 사랑을 이룬다. 그러나 해피엔딩의 결말에 이르는 순간 작가 김남천은 왜 연애소설에서 자선사업을 사랑 실현의 해법으로 채택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소설이 발표된 1940년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향해 나아가던 정치적 시대였으니 의문에 대한 답 역시 정치적 맥락 속에서 찾아도 좋을 것이다.
자선사업 모티프는 '사랑의 수족관'을 포함한 일제말기 대중 연애소설의 단골 메뉴였다. 연애소설에 빠진 수많은 대중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공을 위해 헌신, 봉사, 희생하는 남녀 주인공의 숭고한 행위를 자신들의 마음에 새겨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애소설 주인공의 희생적 행위에 동화된 대중의 마음이 국가를 위한 헌신, 희생의식이 절실하게 요구되던 전시 체제 아래에서 어떻게 활용되었을까는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대중소설의 정치적 모티프로서 '자선사업'이 등장한 지 80여 년이 지났다. 오카다 세쓰코라는 칠순이 넘은 일본인이 대구에서 학대받은 한국 아이들을 돌보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그 의도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노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한 끝에 얻은 순수한 결론일 뿐이라고 답하고 있다. 아울러 사재를 털어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해 '함께 나눈다면 가난해도 아름답게 살 수 있다'고 답하고 있다. 가난해도 아름다운 삶, 인간의 선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말이다. '자선'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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