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마가 말린 남미여행] <4>파타고니아의 백미-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밤 9시 등산로 못 찾아 눈물…어둠 속 퓨마 울음소리 공포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의 시작. 오솔길 양쪽으로 펼쳐진 황금빛 물결이 아름다웠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의 시작. 오솔길 양쪽으로 펼쳐진 황금빛 물결이 아름다웠다.

14㎏ 배낭 메고 3박 4일 트레킹

옥빛 호수·빙하 보며 행복했지만

자주 길 잃고 헤매 몸은 파김치

남미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니 사람들에게 종종 어디가 가장 좋았느냐는 질문을 듣는다. 그때마다 고민하지 않고 말했던 장소가 '토레스 델 파이네'였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칠레 남단 파타고니아에 있는 국립공원이다. 제주도의 3.5배 정도 면적이고 호수, 대초원 지대, 빙하, 폭포, 거대한 바위산과 수많은 야생동물을 품고 있어 볼거리가 다양하다. 지구상 몇 안 되는 태초의 자연을 간직한 곳으로 세계 최고의 등산로 중 하나로 꼽힌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위해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이동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첫인상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을 것 같은 황량한 파스텔톤의 마을이었다. 이곳은 대자연에 들어가기 전 캠핑 장비와 음식들을 준비하고 캠핑이 끝난 후 맥주 한 모금 하며 몸에 쌓인 피로를 녹이는 곳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에 관한 자료가 인터넷에 많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 매일 설명회를 열어주는 카페 겸 텐트 장비 대여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매일 오후 3시 토레스 델 파이네에 대한 강연이 열리는데, 자세한 정보와 많은 팁을 얻을 수 있다. 따뜻한 커피와 과자도 무료로 제공되니 한 번쯤 들러보면 좋은 곳이다.

아직 공기가 차가운 이른 아침, 눈을 뜨고 전날 준비해둔 식량과 침낭, 텐트가 든 배낭을 둘러멘다. 3박 4일 동안 소비해야 할 식량의 무게를 두 어깨로 체감하는 기분이 묘했다. 만반의 준비를 한 탓에 여유있게 집에서 나와 큰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처럼 진지한 걸음을 하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와 배를 번갈아 타고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옥빛 호수가 대자연 속 도보여행의 시작을 화려하게 맞아주는 듯했다. 코스는 처음 이곳에 오는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W 코스로 정했다. 국립공원을 한 바퀴 도는 7박 8일의 일주 코스와 페오에 호수 건너편까지 가는 9박 10일 코스도 있다. 국립공원에서 숙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직접 텐트를 가지고 다니는 방법, 산장에 묵는 방법, 야영장 내에 설치된 텐트를 예약하고 묵는 방법 등 선택지가 제법 다양하다.

◆14㎏ 배낭을 메고 산길을 걷는다는 것

시작은 끝없이 평평한 오솔길이었다. 노란색 꽃과 억새들이 무릎 높이로 오솔길 양쪽으로 펼쳐진 언덕을 빽빽이 덮었다. 우리나라 산에선 보기 드문 탁 트인 황금빛 풍광에 넋을 놓고 바라보며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첫째 날은 11㎞를 걸어 그레이 빙하 옆 '레퓨지오 그레이' 야영장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14㎏ 배낭을 메고 걷는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고되었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경치들을 바라보면 피로가 씻은 듯이 가시는 것 같았다.

좁은 오솔길을 지나니 왼쪽으로 호수가 있는 길이 시작되었다. 그 길은 야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신기하게도 호수의 색이 점점 달라졌다. 새파란 옥빛이었던 호수는 그레이 빙하와 가까워지자 깊은 바다 같은 남색이 되었다가 하얀색 물감을 탄 것처럼 불투명하고 뽀얀 연하늘색이 되었다. 곧 장엄한 그레이 빙하와 마주했다. 진입로에선 상당히 더웠는데 빙하 앞에 오니 가지고 있는 옷들을 다 껴입어도 칼바람이 속살까지 파고 들었다. 그레이 빙하는 무채색의 얼굴을 하고 일말의 자비도 없는 거대한 대자연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빙하의 규모는 끝이 안 보인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거대했다. 우린 야영장으로 돌아가 앞으로의 긴 여정을 기대하며 첫째 날 밤을 준비했다.

둘째 날 우리는 18.6㎞를 걸었다. 가는 동안 길가에 피어 있는 야생화 무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쓰러져 있는 고목 주위로 핀 안개꽃에 햇빛이 비치니 잔무늬의 레이스 커튼 사이로 빛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사진으로만 봤던 영롱한 은방울꽃이 천지에 피어 있는 것도 너무 신기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과거 산불의 아픈 흔적도 곳곳에 보였다. 2012년 이스라엘 관광객들에 의해 국립공원의 20%가 불에 탔다. 그때 불에 탄 나무들은 새하얗게 질린 채 뽑히지도 않고 아직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인간의 부주의로 자연이 억울하게 무차별적으로 희생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윽고 '이탈리아노' 야영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시설이 열악하기로 유명한데 화장실은 볼일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더러워서 대부분 야생 화장실을 이용한다. 으슥한 풀숲이나 나무 뒤는 바닥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 물은 야영장 옆 엄청난 급류의 계곡에서만 구할 수 있었는데, 설거지하거나 쌀을 씻을 때는 위험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7시간 정도 걸어야 했던 드센 일정이었지만 아직 서로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 무사히 일정을 소화하고 있어서 감사했다.

◆산에서의 희로애락

셋째 날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났다. W 코스 중 가장 가운데 지점인 '미라도 브리타니코'에 가기 위해서다. 다시 야영장으로 돌아와야 하는 루트라서 짐을 야영장에 놓고 갔다. 처음으로 배낭을 내려놓고 걸으니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등산로 옆으로 '프론세스' 계곡이 엄청난 무게감으로 흘렀고 그 리듬에 맞게 더욱 역동적으로 발걸음을 뗐다. 정상에 도착해서 본 미라도 브리타니코의 경치는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대단하고 아름다웠다. W 코스를 3박 4일에 완주하기 위해선 미라도 브리타니코를 오르는 것이 무리가 되기도 한다. 굳이 이곳을 들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꼭 한번은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발 밑으로 빽빽한 초록 숲이 펼쳐져 있고 토레스 델 파이네의 제각기 다른 모습의 바위산이 내가 서 있는 영역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온종일 그곳에 있고 싶었지만, 오후 일정 때문에 서둘러 내려왔다. 오후엔 일행이 한 명 더 생겼다. 자꾸 길을 잃어버려서 우리와 방향이 같아 보이는 사람을 따라가다가 친해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그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린 한참 가던 길을 되돌아서 나와야 했다. 동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더욱 가팔라져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시간은 벌써 밤 9시가 훌쩍 넘었고 밤 11시면 해가 지는데 가장 가까운 야영장도 해가 지기 전에 가긴 힘들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챙기던 체력 좋은 예림이가 탈진했다. 그런데 새로 사귄 일행이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등산로가 아닌 곳으로 가로질러 간다면 깜깜해지기 전에 야영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따라갔다. 그곳은 가시덤불이 있는 땅이었다. 예림이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고 나는 이를 꽉 깨물고 무너질 것 같은 어깨를 참으며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퓨마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면서 더욱 공포감이 증폭되었다. 그의 마지막 판단은 다행히 잘 맞아떨어져 우리는 무사히 야영장에 텐트를 설치하고 잘 수 있었다.

원래는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토레스 델 파이네의 정점인 '미라도 베이스 라스 토레스'를 봐야 했지만, 전날 14시간의 산행으로 몰려온 피로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속상한 맘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W 코스에서 잘 가지 않는 미라도 브리타니코를 본 것에 만족했고 나중에 미라도 베이스 라스 토레스를 보러 다시 오자는 다짐과 함께 캠핑을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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