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남과 북이 만나면

1995년으로 기억한다. 어쩌다 한 재중동포의 장례비용을 모금하게 되었다. 지하철역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흔두 살의 젊은 아내요 어머니에게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연변에 병든 남편과 두 아들을 둔 어머니는 첫 아들을 명문 북경대에 합격시키는 경사를 맞았다. 멀리 북경에 유학을 보내기엔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그는 빚을 내서 산업연수생으로 등록하고 한국에 왔다. 열심히만 일하면 빚도 갚고 아들 교육비도 마련하리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산업연수생 신분으로는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을 면할 길이 없어서 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불법체류 신분으로 빠져나갔는데, 이 어머니도 대열에 합류해서 한식집에 일을 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식당일도 생각과는 달랐다. 밥상에서 술을 따르라거나 손목을 잡아끄는 취객들에게 수모를 당해가며 일했건만, 사장은 월급날이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월급을 깎거나 미뤘고, 심지어 불법체류 단속이 나왔다며 도망가기를 종용했다. 놀란 마음에 2층에서 뛰어내리는 와중에 동료는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고, 이 어머니도 몸을 다쳤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다시 출근을 했지만 약속했던 월급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데다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 연변에서 보내온 싸구려 약으로 버텨가며 악착같이 일을 했지만, 다친 허리보다 더 크게 다친 마음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던가 보다. 다친 지 여섯달 만에 이 어머니는 철길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보탠 돈으로 남편을 모셔 와서 장례를 치르던 날, 영정을 들고선 남편은 눈물만 뚝뚝 흘리더란다.

연변에 남한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던 초창기 풍경이 그랬다. 없던 유흥업소들이 생겨서 처자들을 술자리 시중에 불러내기 시작했고,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을 우려먹으려는 행렬이 이어졌다.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연변에 왔던 조상들까지 사기극의 미끼로 던졌으니, 이른바 독립유공자 유해 봉환 사기라는 낯부끄러운 짓을 벌인 자도 있었다. 당신네 조부가 남한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서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연금도 받을 수 있으니, 수수료를 내면 그 수속을 대행해주겠다며 여러 동네를 통째로 털어간 사건이었다. 여차 하면 한민족의 우수성을 찬양하면서도,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민낯을 너무 많이 보였다.

판문점 선언 이후로, 장밋빛 전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철도로 파리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들리고, 엄청난 분단 비용을 덜어낼 수 있으리라는 낙관도 있다. 토목건설의 호황을 점치는가 하면, 북한의 싼 노동력과 상당한 수준의 지하자원에 대한 기대도 있다. 그러나 무려 칠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전혀 다른 체제 안에서 살아온 남과 북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게 될지, 어떻게 화해와 용서를 이뤄낼지 지혜를 모으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독일 통일 이후, 오씨(Ossi)와 베씨(Wessi)로 반목하던 사람들을 화해하고 일치시키는데 그리스도교 교회가 큰 역할을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한 계기였던 1989년의 범유럽 피크닉 사건 때, 밀려드는 동독 난민들에게 긴급 자금과 생필품을 나눠 줄 수 있었던 데에는 오스트리아 시민들의 그리스도교적 형제애가 한몫 단단히 했다. 우리는 북에서 온 겨레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용서와 화해와 형제애를 실천할 마음을 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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