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관광객 1000만 꿈꾸는 청송] <7>청송항일의병과 3·1 만세운동 100주년

구한말 의병 18%가 경북 출신, 청송이 93명 '전국 시군 최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 내 충의사에는 구한말 일제 침략에 맞서 순직한 전국 의병유공 2천537명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사진 박수빈 메디컬투어 편집국장 meditour365@naver.com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 내 충의사에는 구한말 일제 침략에 맞서 순직한 전국 의병유공 2천537명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사진 박수빈 메디컬투어 편집국장 meditour365@naver.com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 전시실에는 구한말 의병의 활약상과 당시 사용된 무기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 박수빈 메디컬투어 편집국장 meditour365@naver.com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 전시실에는 구한말 의병의 활약상과 당시 사용된 무기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 박수빈 메디컬투어 편집국장 meditour365@naver.com

대한민국 구국의 성지는 청송이다.

구한말 어느 지역보다 나라를 위해 뜨겁게 싸우고 후회 없이 전사한 이들이 바로 청송지역의 선조다. 작은 산골마을이었던 청송에서 글을 읽던 선비도, 밭을 매던 농부도, 바느질하던 아낙도 구국을 위해서는 한결같고 한마음 같았다. 1896년 병신년에 일어난 청송의병은 너무나도 많은 인명이 사상되면서 그 후대까지 선조의 역사를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1995년 병신창의의 진중일기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그들의 크고 숭고한 업적이 하나 둘 빛을 보게 됐다.

1919년 일제에 항거해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때 청송지역 주민들 역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장터로 나왔다. 청송의 최남단인 현서면부터 최북단인 진보면까지 태극기 물결을 지으며 평화시위가 펼쳐졌다.

◆항일의병과 병신창의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 세력 강화를 획책(劃策)한 정변이 일어났다. 일명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일본은 이후 친일계 인사를 통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취지의 을미개혁을 진행했다.

황후가 시해되고 조정이 흔들리는 시점에서 추진된 을미개혁은 국민에게 반감을 넘어 극도의 반일감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유교를 근본으로 살았던 당시 국민에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투를 자르게 하는 단발령(斷髮令) 등이 강제로 시행되면서 전국 유림을 중심으로 반일'반개화 의병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1896년 병신년 청송 심씨 문중의 소류 심성지(1831~1904)를 대장으로 청송군 객사에 지휘부를 둔 청송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소류는 유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환갑이 넘은 나이인데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건해 그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병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해 5월 14일 감은리 전투가 발발했다. 청송의병은 김하락(1846~1896)이 이끄는 이천의병과 김상종(1847~1909)의 의성의병 등과 함께 청송 안덕면 감은리에서 북진하던 일본군을 협공으로 무찔렀다. 당시 청송의병은 양반 출신의 지휘부 75명과 포수, 농민, 보부상 등 180여 명이었지만, 어느 한 명도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완고한 구국 의지로 뭉쳐진 청송의병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결국 일본군 10명을 사살하며 그들을 줄행랑치게 했다. 역사학자들은 감은리 전투의 승리를 특별하게 평가했다. 이 전투에서 만일 패했다면 일본군이 한반도 중심부까지 세를 뻗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

서점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 관장은 "국가의 위기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고자 '의병의 날'이 2010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고 말했다.

◆항일의병기념공원과 '적원일기', '경설유편'

경상북도와 청송군이 매년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에서 항일의병기념식을 연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 내 충의사에는 구한말 일제 침략에 맞서 순직한 전국 의병 위패가 봉안돼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와 최익현'허위'이강년을 비롯해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 등 의병유공 2천537명 위패가 있다. 전국 의병의 18%에 해당하는 468명이 경북 출신이며, 이 중 93명이 청송 출신이다. 이는 전국 시'군 중 가장 많은 의병 수로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다.

2016년 이곳에 더 큰 의미가 담긴 기념탑이 건립됐다. 바로 '무명의병용사 충혼탑'이다. 무명의병용사 충혼탑은 전국의 이름 없는 15만 의병 용사의 공을 높이 세우고 넋을 기리려고 청송에 세워졌다.

청송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이 건립되기까지 가장 큰 공은 '적원일기'다. 감은리 전투에서 청송의병이 활약한 것이 지금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1995년 청송 심씨 문중에서 전해져 온 적원일기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그 역사가 고증됐다. 적원일기는 전쟁 중 일어난 일들을 기술한 것으로 적원은 색으로 붉은색을 뜻하는 병(丙)과 원숭이를 뜻하는 신(申), 즉 병신년에 쓴 일기다. 적원일기는 당시 의병들의 출신 성분과 활동 방식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어서 대부분 전쟁에 대한 이야기만 서술한 기존 진중일기와는 달랐다.

일기는 청송의병에 참여한 양반들의 이름과 그들이 병사를 훈련시키거나 운영하는 데 낸 운영자금 등이 기록돼 있었다. 일기를 보면 상시 근무병인 대장소 근무자 65명은 일일 1량을 받았고 각 지역에 파견된 병사 48명은 매월 이틀간 근무하면서 2량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청송의진이 꾸려질 때 초기에 3천 량이 넘는 비용을 양반 출신이 모두 댔다고 일기는 기록했다.

당시 3천 량은 한옥 몇 채를 사고도 남을 정도로 상당히 큰 금액이다. 적원일기를 통해 신분의 높고 낮음 없이 청송 주민들 모두 하나가 돼 구국에 동참했고 사회 지도층이 스스로 자비를 털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송은 의병의 무력 항쟁만큼 유학을 통한 정신적 단합과 성숙, 애국정신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청송의병을 이끈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 서효원(徐孝源)의 아들인 서석화(1860~1924)는 정재 류치명(1777∼1861)으로 대표되는 정재 학맥의 학문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결속함과 동시에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선도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경설유편'(經說類編)을 편찬했다. 최근 경설유편 국역 편이 한국국학진흥원을 통해 재편되면서 그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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