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미가 낳은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 <1>독립운동 명문가 이룬 왕산 허위

실사구시 사상 지녀…순국 직전까지 忠·孝 가슴에 새겼다

사진=일제침략에 항거해 의병운동을 일으킨 왕산 허위 선생.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편성, 서울탈환작전을 펼쳤다.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기념공원 내 생가 터에 있는 허위 선생 동상.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사진=일제침략에 항거해 의병운동을 일으킨 왕산 허위 선생.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편성, 서울탈환작전을 펼쳤다.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기념공원 내 생가 터에 있는 허위 선생 동상.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왕산 허위의 손녀가 그린 초상화.
왕산 허위의 손녀가 그린 초상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구미는 구국의 중심에 있었다. 일본의 침략 만행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수난을 당할 때 충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처절한 저항의 몸부림이 있었던 곳이 구미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포문을 연 의병전쟁에서 최고봉을 장식한 인물이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 선생이다. 허위 선생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인 항전을 이끌어냈다. 풍운 속에 몸을 던져 구국의 행동 대열에 앞장섰던 허위 선생의 의병정신과 순국정신은 박상진·안중근 의사 등으로 계승돼 독립운동사에 영롱하고 찬연하게 빛을 발하며 불꽃 같은 삶으로 이어졌다.

매일신문은 구미가 낳은 위대한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항일운동사를 스토리텔링화해, 선현들의 발자취와 정신문화를 오늘에 맞게 새롭게 재조명한다.

◆독립운동 명문가 김해 허씨

안중근 의사는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高官)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자가 많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다"라며 조국독립을 위해 몸 바친 허위의 삶을 추모했다.

천금보다 더 값진 안중근 의사의 이 말은 허위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조선 이천만 동포가 모두 하나같이 허위의 충효정신과 용맹의 기상을 본받아 언젠가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마지막 당부의 말이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우리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당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뜻있는 인사들은 반외세운동의 대열에 앞장섰다.

특히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한 민족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열강 중에서도 일제는 갈수록 우리나라를 빼앗으려는 마각을 드러냈고, 이에 대응한 의병운동은 더욱 세차게 일어났다.

허위는 독립운동사의 효시로 의병전쟁에서 최고봉에 우뚝 섰던 위인이다. 허위의 아버지는 허조로 자는 시윤이고, 호는 청추헌이다. 어머니는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의 11세손 휘수(증이조참판)의 딸이다. 허위는 위로 훈, 신, 겸 세 형이 있었고 4형제 중 막내였다. 허위와 그 형제들은 한결같이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다가 순국해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

1854년 4월 2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현재 구미시 임은동). 집 뒤편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거센 바람이 대나무 숲을 흔들면서 대나무 잎들은 울부짖듯이 소리를 냈다. 그날 허위는 우렁찬 울음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며 태어났다.

허위가 태어나기 사흘 전인 3월 그믐날 밤 어머니의 꿈에 허위의 증조부인 허돈이 나타나 말하기를 "네가 산달이 넘었지만, 얼마 후에 반드시 훌륭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반드시 조심하라"고 했다.

허위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는 이 아이다"라고 기뻐했다.

허위는 5세에 글을 익히기 시작해 7세 때 이미 아래와 같은 글을 지었다. 허위는 "달은 대장이 되고 별들은 많은 군사가 되어 뒤를 따르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 꽃을 꺾으니 봄은 손안에 가득하고, 물을 길어오니 달은 집안으로 들어오네(折花春在手 汲水月入門)"라고 읊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대장의 뜻을 키웠고, 천하를 포용하는 도량을 지녔던 것이다.

당세의 기남자(奇男子·재주와 슬기가 남달리 뛰어난 남자)로 알려졌던 허위는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고, 충효 사상과 위정척사 사상에 입각한 애국애족 정신을 키우며 자랐다.

영남의 유서 깊은 전통의 고을인 선산 지역은 고려 말 절의의 대표로 칭송되는 길재(吉再)가 태어난 이후 영남 사림파의 절의 정신과 도학 정신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조선조에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 부자와 정붕(鄭鵬)·박영(朴英) 등이 그 뒤를 이어 절의와 도학의 기풍은 지속됐다.

낙동강을 따라 해산물을 서울로 무역하던 일을 하던 김해 허씨들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엽이었다. 입향(入鄕)한 이후 100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 문중에서 많은 과거 급제자들이 나오고, 문명을 날리면서 영남 유림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허위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상

허위는 7세 때부터 숙부 허희에게 본격적으로 공부를 배웠다. 허희가 작고한 이후에는 형 허훈에게 수학했다. 이처럼 가학을 통해 학문에 눈을 뜬 것이다.

16세 때인 1870년 선산의 동락서원(東洛書院)에 있는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의 학술모임에 참석했다. 100여 명의 학자가 참여한 이 모임에서 허위는 서전(書傳)의 우공(禹貢)을 강송했다. 이 당시 경전의 뜻을 명쾌하게 해석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허위는 평소 심즉리설(心卽理說·心이 곧 일체의 이법)을 주장한 이진상(李震相)을 존경했다. 이진상은 조선 말기의 거유로 영남학계 내에서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기상도 탁월한 호걸의 선비였다.

허위는 실사구시(實事求是·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의 사상을 지녔다.

허위는 "하늘과 땅과 사람,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며 "인간이 하늘과 땅, 자연의 이치를 본받으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데 나보다 앞에 살았던 과거 사람은 내가 스승으로 삼고 나보다 뒤에 태어날 사람은 나를 스승으로 삼을 테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매우 소중하고 위대하다"고 했다.

이러한 실사구시 사상은 고종에게 "오직 농업·상업·공업을 확장해 군비(軍備)와 군물(軍物)을 마련하는데 예산을 넉넉하게 편성해 실사구시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나아가 허위의 생애 후반기는 더욱 실용주의적인 실학풍을 띠었다.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함)의 실학에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허위가 비록 실학적인 학풍을 띠고 있다고 해도 그는 전통적인 유학자의 집에서 태어나 유학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허위는 중국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물에 빠져 죽어 고기의 배에 장사 지낸 충혼(忠魂)을 높이 기리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기약을 했던 것이다. 순국 직전까지도 가슴속 깊이 충(忠)과 효(孝) 두 글자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허위는 순국 직전에 "아버지의 장사를 아직 지내지 못했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도 못하고 효도 다하지 못했는데 죽은 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라고 했다. 또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조국의 주권 회복과 동양평화를 부르짖었다.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은 "만세 강상(綱常)을 홀로 세웠으니 육주(六洲)에서 모두 허 선생을 칭송하네"라고 허위의 죽음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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