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遺事<유사>♪] 대구 최초 성악 독창회 연 권태호를 아시나요

한때 산에 다니는 사람이 박상열을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들었다. 1977년 9월 10일 박상열과 앙푸르바는 에베레스트산을 오르고 있었다. 100m만 더 오르면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 최고봉을 밟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초모룽마'(에베레스트의 현지 이름, 세계의 여신)는 그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갑자기 심한 눈 폭풍이 불어닥쳐 악전고투하다 산소마저 바닥나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산소 비박을 하게 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다음 날 눈물의 하산을 한다. 9월 15일 고상돈이 셰르파 펨바 노루부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다. 국민들은 고상돈은 기억하지만 박상열은 모른다. 최초라는 말은 마력의 단어다. 성공한 사람은 천국을 느끼고 실패한 자는 지옥을 맛 보게 하는 잔인한 말이다.

대구에서 최초로 서양 노래 독창회를 한 영광의 성악가는 누구일까? 1928년 7월 14일 대구제일소학교(중앙초등학교-현재 2·28중앙공원) 강당에서 독일 가곡을 부른 권태호가 그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안동이지만 대구에 살며 많은 음악 활동을 하였다. 그가 영광의 주인공이다.

1907년 대구읍성이 철거되고 새로 조성된 현대 거리에 각종 서양문화가 물밀듯 들이닥친다. 그 쓰나미에 다방이 앞장을 섰다. 대구 사람이 최초로 문을 연 다방은 '미도리 다방'이다. 1936년에 아카데미극장 부근에서 영업을 시작했는데 주인이 화가였던 탓에 그림 하는 사람들이 그 다방을 주로 출입하였다. 그 후 모나미, 청포도, 백조, 백록, 호수 등 아름다운 상호를 가진 다방들이 줄이어 문을 열었다.

'모나미 다방'은 문인들이 주로 출입하였다. 한솔 이효상도 주요 출입 인사였고 그의 책 출판기념회도 여기서 두 번이나 열렸다. 공초 오상순은 여기에 살다시피 했고 피란 온 문인들의 응접실이었다. 1935년 일본 사람이 운영하던 '아오이 다방'이 한국 사람 손으로 넘어오며 '백조 다방'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다방의 옥호는 생상스의 노래 '동물의 사육제'에 나오는 '백조'에서 따왔고 당시에 드물었던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런 분위기 탓에 향토 음악인들은 여기를 아지트 삼아 모였고 권태호라는 음악의 거장은 1947년부터 1972년까지 여기를 사무실 삼아 살며 터줏대감 노릇을 하였다.

권태호는 1924년 동경으로 유학가서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일본고등음악학원 성악과를 졸업한다. 1928년 졸업반 때 동경 히비아에 있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4번이나 독창회를 연다. 그 후 '와세다 홈' '시고쿠 회관' 등에서 음악활동을 계속하다가 귀국하여 서울 YMCA에서 독창회를 하고 대구로 온다.

그는 생전 500회 이상의 독창회를 연 성악가이지만 '나리나리 개나리'라는 유명한 가사를 가진 동요 '봄나들이'와 '대구능금의 노래'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총 100여 곡을 작곡하였다. 대구 사람들은 최초의 성악 발표자가 권태호인 줄 모른다. 대구 최초의 서양음악회가 열린 곳이 대구중앙초등학교(공평동) 강당인 것도 모른다. 게다가 그때 연주됐던 그랜드 피아노가 현재도 대구중앙초등학교(만촌동)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구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공원이 된 그 자리에는 옛날에 여기가 학교였다는 사실과 졸업생 명단, 손시향 남일해 이승엽 이만수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 그리고 최초의 음악회가 있었던 곳이라는 팻말 하나 없다.

큰 사고가 났을 때 미국은 영웅이 누구인가를 찾고 한국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찾는다고 한다. 서울, 평양 그리고 대구였던 거대한 도시가 현대화를 하며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과 그 주인공을 기억하고 기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 내 고향은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애들 돕는다고 기를 쓰고, 헌법상 불법집단으로 명시되어 있는 북한을 돕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정구죽천(丁口竹天)이 아닐 수 없다.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를 하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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