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3년 조선 병조판서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했다.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다 보니 군대와 식량이 모두 준비되어 있지 않아, 큰 적이 침범해 왔을 때 어떤 지혜로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진언했다. 마침 북쪽에서 여진족과 크고 작은 전투가 있던 터라 율곡의 주장은 제법 진지하게 검토되었지만 미봉에 그쳤다.
얼마 뒤 일본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이 통일되면서 머지않아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통신사를 보내 이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두 사신의 의견이 달라 조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서둘러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으나 학봉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높지 않다며 이에 반대하였다. 조정은 갑론을박만 한 채 시간만 지체했다. 결국 조선은 1년 뒤 조총을 비롯한 신무기로 무장한 20만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준비 안 된 탁상공론의 이상 정치는 백성들에게 더 큰 수탈을 초래했다.
한반도 비핵화 해법을 두고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각을 보이는 두 사람이 있다. 탈북 외교관 태영호 전 공사와 문정인 대통령외교안보특별보좌관이 그렇다. 마치 율곡과 학봉을 보는 듯하다. 두 사람이 대변하듯 나라 전체도 보수 우파와 야권, 진보 좌파와 집권 여당으로 나뉘어 서로를 공박한다.
태 전 공사는 강연회 등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에서 '진정한 핵 폐기'를 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북은) '비핵국가'라는 종이로 핵보유국인 북한을 포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나아가 "북의 '체제 안전 보장'은 김씨 가문의 세습통치를 영원히 존속시키는 것"이라며 완전한 북핵 폐기는 '환상', '허상'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문 특보는 "일반적으로 (한미)동맹은 부자연스럽다. 내게 있어 최선은 동맹을 없애는 것" "현재의 한미동맹이 장기적으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로 전환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중국도, 미국도 편들 필요가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쏟아낸다. 문 특보는 또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 주둔을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밝히기도 했다.
임진왜란 직전의 공론처럼 집권 여당은 "태영호가 북한에 적대적 행위를 내질렀다" "그가 김정은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느냐"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힐난했다. 문 특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보수 야당은 문 특보의 해임을 촉구하고 차라리 북으로 가라고 말한다.
태 전 공사는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어려울 경우 혹시도 모를 어정쩡한 타협을 하는 것에 우려와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가족친지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유를 찾아 남으로 왔다. 정부 여당은 그의 행보를 비난만 하지 말고 오히려 유비무환의 계(計)로 삼아야 한다. 문 특보도 외교 분야엔 일가견이 있고 국제 정세 판단에 능한 분이다. 문 특보의 말대로 한반도에 핵이 없어지고, 미중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세상을 누가 바라지 않겠는가.
임진왜란 당시처럼 '전쟁이 난다, 안 난다'의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한반도 비핵화 해법을 두고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담보되느냐, 아니면 더 긴 세월을 대치 상태로 보내느냐가 갈린다. 6월 북미 정상회담이 끝나면 누가 또 어느 쪽이 현실을 직시했는지, 아니면 순진한 환상으로 접근했는지 드러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극한 대결과 전쟁이란 비극 대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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