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하빈의 시와 함께] 멀고 먼 해우소―해인사 백련암에서

윤범모(1951~ )

가야산 깊은 밤

덩치 큰 짐승의 할 소리에 잠을 깨다

방문을 여니 찬바람 떼로 몰려오고

맞은편 능선 위의 별 수좌 초롱초롱하다

담장 곁의 깡마른 대나무 선승들

머리 조아리며 증도가(證道歌)를 암송한다

아, 깨어 있구나!

모두들 철야 용맹정진하고 있구나

멍청한 잠꾸러기 하나

겨우 오줌보나 채우고 있었는데

한 소식 얻은 만물들

기쁨에 겨워 춤추고 있구나

캄캄한 밤

염치불구하고 박차는 문

멀고 먼 해우소 가는 길에

드디어 터지는 오도송(悟道頌)

아, 오줌 마렵다!

―시집 『멀고 먼 해우소』 (시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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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속 한밤중에 짐승의 할, 별 수좌, 대나무 선승들 모두 밤새워 좌선하며 번뇌에서 벗어나는 그 시각에, "멍청한 잠꾸러기 하나/ 겨우 오줌보나 채우고" 있구나. 만유가 깨어 있는 그 시각에 나만 나태한 잠 속에 빠져든 채 욕망이나 채우고 있었다니! 오줌보를 참다못해 바지허리춤 잡고 '멀고 먼 해우소' 가는 길에 시방 터져 나오는 오도송(悟道頌)이여!

"아, 오줌 마렵다!"고 거침없이 내뱉는, 이 원초적 욕망의 언어 속에 담긴 깨달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욕망 해소라는 비움의 철학을 담아낸 걸까? 오줌 바다를 이루는 창조 신화를 반영한 걸까? '해우소'(解憂所)란 근심을 푸는 곳으로, 번뇌, 갈등, 집착, 욕망 등을 내려놓는 방하착(放下着)의 장소다. 또한, 비움이나 낮춤 등의 진리를 깨닫는 나홀로 도량(道場)이다. 그리고 '멀고 먼'이란 말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 그만큼 멀고 아득하다는 뜻 아닌가? 허뿔싸!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서근[麻三斤]이라 했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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