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비의 공간 '書院'] <3>-도산서원, 세계유산 되나

공·맹가 후손 2500년만의 도산서당 나들이 향사 집례…동양 5聖 버금가

퇴계 선생이 생전에 학문을 연구하고 자연을 담았던
퇴계 선생이 생전에 학문을 연구하고 자연을 담았던 '도산서당'은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앞쪽에 위치한 건물이 도산서당이다. 안동시 제공

조선 성리학의 요람이었던 서원은 대부분 자연의 품에 터를 잡고 있다. 조선 건축의 대표적 특성이었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 터를 잡고, 자연과 조화로움 속에서 절제된 공간으로 수백 년 이어오고 있다. 이 서원들은 자유롭게 정치와 학문을 연구하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었다. 또, 지방 질서와 인재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하는 단순 교육기관을 넘어 지방 풍속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도산서원은 건축미에서도 우리 문화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절제 속에서도 공간적 배치를 통해 다양성을 담보했다.

◆대유학자·선비의 전형 퇴계 배향된 '도산서원'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등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도산서원을 찾는 관람객이 서원이 지닌 참가치와 퇴계 이황 선생이 남긴 향기를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등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도산서원을 찾는 관람객이 서원이 지닌 참가치와 퇴계 이황 선생이 남긴 향기를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도산서원 참 알기 도우미 활동'에 나섰다. 도산서원 제공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이자 선비의 전형인 퇴계 이황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이 건립했다.

지금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陶山書堂) 영역과 사후에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이뤄져 있다.

퇴계 이황은 "일찍이 서원이 세워지는 곳은 존경받을 만한 선현의 일정한 연고지여야 하고, 그와 동시에 사림들이 은거해 수양하며 독서 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서원의 입지 조건으로 제시한 인문 조건과 지리 조건을 모두 갖췄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강학(講學)하던 곳일 뿐만 아니라 산수(山水)가 빼어난 곳이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1557년 57세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해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 1560년에 낙성한 건물이다.

세 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인데, 서쪽 한 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한 칸은 그가 거처하던 '완락재'(玩樂齋)이며, 동쪽의 대청 한 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巖棲軒)이다. 이황이 조성한 도산서당의 유식 공간, 강학 공간은 도산서원 건축에 그대로 반영된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1574년(선조 7년) 봄에 도산서당 뒤로 땅을 개척, 짓기로 해 조성이 시작됐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576년 2월 사우를 준공해 이황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진도문'(進道門)이다.

강학 공간은 높게 조성된 기단 위에 서 있는 '전교당'(典敎堂)을 중심으로 그 앞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마주 보며 좌우 대칭을 한 배치를 해 강학 공간으로서의 규범을 보이고 있다. 강당인 전교당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건물이다.

◆치장하지 않은 소박함으로도 자연을 담아

퇴계 선생이 생전에 학문을 연구하고 자연을 담았던 도산서당은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퇴계가 직접 설계한 도산서당은 도산서원 안에 있지만 한눈에 봐도 서당 밖의 건물과 구조적 차이가 있다. 화려함도 정교함도 없이 질박하기까지해 서원 건물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 소박함에서 퇴계 선생의 세심한 건축 미학을 엿볼 수 있다.

도산서당엔 특이한 공간이 있다. 서당 내부 방 왼쪽에 만들어진 작은 다락방이 그것이다. 퇴계 선생이 자기만의 사색에 잠겼던 공간이다. 서당에 군불을 지피는 아궁이 쪽에도 골방이 하나 있다. 다리를 뻗어서 눕기 어려울 정도로 작다. 이곳은 스님들이 서당에 군불을 지피고, 기도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1546년 낙향 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서당 터를 찾던 퇴계 선생은 한서암 동북쪽에 계상서당을 짓고 본격적인 가르침을 시작했다.

하지만 왕래가 불편하고 유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건물이 비좁아져 도산 자락에 새로 서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도산서원의 기초가 된 도산서당이다.

이미 도산서당이 생기기 전부터 퇴계의 명성은 전국에 자자해 가르침을 받으려는 유생들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늘어가는 유생들의 숙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퇴계 선생은 직접 기숙사를 건축했고, 그 이름을 농운정사라 지었다.

'도산서당', '농운정사', 부속시설인 '하고직사'를 제외한 도산서원의 나머지 건물은 퇴계 선생 사후인 1574년, 지방 유림의 건의로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사당과 함께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지금의 형태가 됐다.

도산서원에는 여느 서원에서나 볼 수 있는 누각이 없다. 누각은 주로 휴식을 위해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별다른 기능이 없는 누각이 없다는 것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서당을 설계한 퇴계 선생의 건축 미학이 고스란히 담긴 것.

특히, 전교당 앞 양쪽으로 세워진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던 서고 역할을 했지만, 습해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기둥 위에 높이 세워 '누'(樓)로도 활용할 수 있어 멀리 낙동강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도산서원을 거닐다 보면 서원이라기보단 복잡한 주택가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입구부터 전교당 앞마당까지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 한숨 멈추고 뒤를 보면 서원 앞마당을 가득 메운 매화나무와 멀리 낙동강이 조화를 이룬 풍경이 펼쳐진다.

그제야 옛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산과 물이 있는 곳에 서원을 지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치장하지 않은 소박함으로 자연을 담아 충만함을 느끼려 했던 것이다.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앞에는 휴식처인 만대루가 있고 뒤에는 사당인 존덕사가 자리 잡고 있지만 공간적으로 서원의 중심에 위치한 강학 구역이 너무도 뚜렷이 구분돼 제사 때 사당을 찾는 문객들도, 만대루에서 논의를 청하는 선비들도 유생들의 입교당이 있는 강학 구역에는 쉽게 발을 들여놓지 못했을 것이다.

건물을 자연 위에 짓는 것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 만든다는 성리학의 건축 미학은 다른 서원에서도 엿볼 수 있다.

◆2천500년 진객, 공·맹의 '인'과 퇴계의 '경' 만나

지난 2012년 공자 79대 종손인 쿵췌이짱(孔垂長.왼쪽 두 번째)·우슈워잉(吳碩茵) 부부와 맹자의 76대 종손인 멍링지(孟令繼. 왼쪽 네 번째) 씨 등 동양오성 후손들이 도산서원을 찾아 향사례에 참석했다. 공자 종손은 지난해에도 안동을 찾았다. 안동시 제공
지난 2012년 공자 79대 종손인 쿵췌이짱(孔垂長.왼쪽 두 번째)·우슈워잉(吳碩茵) 부부와 맹자의 76대 종손인 멍링지(孟令繼. 왼쪽 네 번째) 씨 등 동양오성 후손들이 도산서원을 찾아 향사례에 참석했다. 공자 종손은 지난해에도 안동을 찾았다. 안동시 제공
지난 2012년 공자 79대 종손인 쿵췌이짱(孔垂長.오른쪽 두 번째)·우슈워잉(吳碩茵) 부부와 맹자의 76대 종손인 멍링지(孟令繼. 왼쪽 두 번째) 씨 등 동양오성 후손들이 도산서원을 찾아 향사례에 참석했다. 공자 종손은 지난해에도 안동을 찾았다. 도산서원 방문 당시 퇴계선생이 제작한 성학십도 탁본을 체험하는 모습. 안동시 제공
지난 2012년 공자 79대 종손인 쿵췌이짱(孔垂長.오른쪽 두 번째)·우슈워잉(吳碩茵) 부부와 맹자의 76대 종손인 멍링지(孟令繼. 왼쪽 두 번째) 씨 등 동양오성 후손들이 도산서원을 찾아 향사례에 참석했다. 공자 종손은 지난해에도 안동을 찾았다. 도산서원 방문 당시 퇴계선생이 제작한 성학십도 탁본을 체험하는 모습. 안동시 제공

지난해 12월 '동양 오성'(東洋 五聖)의 후손들이 5년 만에 안동을 다시 찾았다. 공자와 맹자의 종손들이 퇴계 종손을 비롯해 경북의 종손·종부를 만나 교류하고, 안동지역의 유교문화 현장을 둘러봤다.

이날 방문은 5년 전 첫 방문 때의 '공·맹가'와 '퇴계가'와의 교류를 넘어 한국이 지켜오고 있는 종가문화와 유교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공자의 79대 종손인 쿵추웨이창(孔垂長·42) 봉사관은 퇴계종택을 찾아 이근필 퇴계 종손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종가문화를 배우고 교류, 중국이 한국 종가문화를 새롭게 받아들여 발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했다.

이에 앞선 2012년에도 쿵추웨이창(孔垂長)·우슈어잉(吳碩茵) 부부와 맹자의 76대 종손인 멍링지(孟令繼) 씨, 증자 75대 종손 증경홍 씨를 비롯한 방문단 18명이 도산서원 춘계향사에 참석해 집례했다.

동양 오성의 직계 후손 가운데 공·맹 두 가문의 종손이 동시에 다른 나라를 방문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유림에서는 이들의 안동 방문을 두고 '2천500년 진객들의 안동 나들이' '공·맹의 인(仁)과 퇴계의 경(敬)이 만나다' 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당시, 쿵추웨이창 종손과 멍링지 종손은 도산서원을 찾아 의관을 정제하고 성학십도 목판을 체험한 후 곧바로 도산서원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춘계향사 집례에 참여했다.

이날 향사례에서 유성종 도산서원 원장이 초헌관, 멍링지 종손이 아헌관, 타이완 민정국 황뤼징류 국장이 종헌관으로 각각 나서 집례했다. 둥진위(董金裕) 국립정치대 교수가 분헌관으로 참석해 2천500년 전 조상들로부터 출발한 유학적 근원이 이어져 온 퇴계에 대한 경외심을 표했다.

쿵추웨이창 씨는 당시 도산서원 방문과 관련해 "퇴계 선생의 얼이 깃든 도산서원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 등을 둘러보니 고향에 온 듯 가슴이 설렜다. 조상들의 유학적 근원이 퇴계 선생을 비롯해 한국 안동땅 유림들에게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체험하고 많이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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