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초대 내무부장관 윤치영, 독립운동가 지청천, 아동문학가 윤석중, 건축가 김수근, 코미디언 구봉서, 바둑기사 조남철, 가수 김정호와 윤시내와 양현석, 농구선수 박신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무 연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초등학교 동창생들이다. 바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교동초등학교. 이 학교는 고종황제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서 남쪽으로 몇 발자국을 옮긴 곳에 위치하고 있다.
1894년 고종이 내어 준 부지와 하사금으로 관립교동소학교라는 이름을 걸고 개교한 이 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다. 1922년 5월 5일 '금일의 세자뎐하'라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의 왕세자(영친왕)는 오전에 이방자여사와 함께 교동초등학교를 시찰하였다. 고작 10분 방문에 그쳤지만, 당시 교동초등학교의 위상을 말해주는 기사이기도 하다. 왕세자 부처는 이 학교를 방문한 뒤 창덕궁에서 점심을 드시고 오후에는 비원에서 사이토 총독 등이 참석한 원유회(園遊會)를 가졌다.
얼마 전 길을 걷다가 이 학교 담벼락에 붙은 '학교의 소사(小史)'가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찬찬히 읽어보았다. 교명이 여러 번 바뀐 것이 눈에 들어왔다. 관립교동소학교(1894), 관립한성사범학교부속소학교(1895), 관립교동보통학교(1906), 교동공립보통학교(1910), 경성교동공립심상소학교(1938), 경성교동공립국민학교(1941), 서울교동공립국민학교(1947), 서울교동국민학교(1950), 서울교동초등학교(1996). 구한말 한성에서 일제하에는 경성으로, 해방 후에는 서울로 변한 것이다. 뒤에 붙는 명칭도 소학교에서 보통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 순으로 변했다. 이 이름의 변화만으로도 국가의 주인이 누구였던가 하는 점과 초등교육정책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이 학교는 1921년 새로 지은 2층 기와 건물이 1927년 불에 타 소실되자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세 동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짓는다. 6.25전쟁 때는 휴교를 했고, 1951년과 1952년에는 전쟁으로 인해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 1963년에는 59학급을 편성했고, 재학생이 5,250명이었다. 1977년 79회 졸업생 사진을 보면 어느 한 반이 91명이었다.
이때를 정점으로 해서 학생 수는 급감하기 시작한다. 1984년에는 36학급에 재학생 1,790명이었고, 2017년 제 119회 졸업식에는 전체 21명이 졸업 사진을 찍었다. 학교 정문에는 '서울형 작은 학교 모델학교 운영'이라는 플랜카드가 붙어 있기도 했다.
이제 전교생이라 봐야 100여 명 남짓. 한때는 이 학교도 5천여 명의 학생들이 갖가지 즐거운 소음을 내며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처럼 북적거렸을 것인데, 학교를 한참 기웃거려 보아도 어떤 움직임이나 왁자지껄한 소리도 없었다. 서울 도심 학교가 절간 같이 고요하기만 한 것이다.
서울 도심학교의 공동화 현상에는 대한민국 공통의 취학아동 감소 현상과 서울의 특수성인 강남과 신도시 개발 및 도심재개발이라는 여러 요소들이 맞물려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되지만, 콩나물시루 학교에 익숙한 세대인지라 정서적으로는 잠시 비감해졌다. 이제 서울의 한복판뿐만 아니라 농어촌과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의 초등학교가 텅텅 빈 산중 절간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좀 어지럽다. 하응백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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