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 파워 인터뷰] 정재환 팔공산자수박물관 관장

"뛰어난 손기술로 만든 자수, 이젠 예술 작품으로 인정을"

정재환 팔공산자수박물관장이 한국여성의 혼과 정성, 땀방울이 담긴 자수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실로 마음을 그리고, 삶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삶의 지혜를 담은 것이 한국의 자수라는 설명이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정재환 팔공산자수박물관장이 한국여성의 혼과 정성, 땀방울이 담긴 자수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실로 마음을 그리고, 삶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삶의 지혜를 담은 것이 한국의 자수라는 설명이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바느질은 부덕, 용모, 말씨, 길쌈과 더불어 옛 여인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바늘 끝에 여인의 희노애락을 담아 마음을 다스렸기에 바느질은 여인의 심성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요. 민간자수는 궁중자수처럼 세련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어 옛 여인의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재환(69) 팔공산자수박물관장은 "조선시대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1970년대 만 하더라도 우리의 누이, 엄마, 할머니들이 자수(刺繡)를 통해 동생과 자녀들을 공부시키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꿈꿨다"면서 "한국여인의 땀과 정성, 노력이 서린 자수 작품이 홀대 받고 외면당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 관장은 1만 점이 넘는 자수 작품을 보유한 우리나라 최고의 자수 수집가이다. 또 고서ㆍ고병풍의 복원ㆍ수리 전문가이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해 새로운 역사자료를 발굴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자수와 표구에 얽힌 삶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팔공산자수박물관을 찾았다.

▶ "병풍 하나가 논 10마지기 값!"

정 관장은 1950년 경남 사천시 곤양면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고, 넉넉지 못한 형편 탓에 농고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 관장에게 마을 인근에 다솔사가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비록 다솔사가 속한 행정구역은 진주였지만 고향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당시 다솔사에는 효당 최범술 선생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효당 선생을 찾아 서예가, 화가 등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왕래를 했었는데요. 효당 선생 방에는 병풍이 한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병풍 하나 값이 50만원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논 한마지기(200평)에 5만원 하던 때였습니다.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논 10마지기 농사짓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효당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제헌의원과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고, 한국차인회를 설립했다.")

정 관장은 "배불리 밥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던 시대였던 만큼, 효당 선생이 내어준 차 맛은 솔직히 별로였다"면서 "하지만 병풍 표구비가 3, 4만원한다는 말에는 솔깃했다"고 했다.

"그래 표구가 돈이 되는구나!"

정 관장은 1973년 부산 서구 대신동 구덕운동장 옆에 '진주표구사'를 창업했다. 표구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구에서 기술자 1명을 고용했고, 가게는 월세로 구했다. 어릴 때부터 다솔사를 드나들며 화가ㆍ서예가 등과 꾸준히 교류해온 덕분에 일거리를 얻을 수 있었고 가끔씩 그림 매매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1970년대 후반 석유파동으로 자영업자 폐업이 속출했고, 이 때 부산 생활을 접고 대구로 왔다. 3년 간 섬유회사를 다니다가, 결혼을 하면서 1981년 대구 북구 복현동에서 '진주표구사'를 다시 오픈했다. 5년 후 상인동으로 옮겨 2008년까지 28년 간 한 자리에서 '진주표구사'를 운영했다.

▶ 자수에 매료되다

"1988년 이후 10년간은 엄청난 아파트 붐이 일었습니다. 아파트 한 채에 새로 입주하면 평균 4, 5개의 액자 수요가 생겼는데요. 화가들은 시간이 없어 주문 물량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덩달아 표구상도 호황이었죠. 표구와 그림 매매로 생활 기반을 잡은 시기였습니다."

정 관장은 1980년대부터 옛날 그림, 민화 등과 함께 궁중자수를 비롯한 희귀한 자수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실 자수에 대한 관심은 표구가게를 처음 문 연 1970년대부터 있었다.

"1970년대 부산에서 가끔씩 자수표구를 하면서, 자수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 노력이 들어가는 지를 실감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여성들이 수예점에서 일하며 동생들 공부시키고 부모님께 용돈을 보내드렸습니다. 수예점 여직원 월급이 8만원 정도였는데요. 당시 공무원 월급이 1만2천~1만5천원 밖에 안 돼 공무원하고는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을 정도입니다."

일본사람들이 부산으로 대거 몰려와 자수 작품을 구입했다. 자수 병풍 가격은 보통 100만원이었다. 아주 잘 지은 2층 고급저택이 750만원, 서민집은 200만~300만원이던 시절이었던 만큼 우리의 자수 작품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고의 결혼혼수품은 자수병풍이었습니다. 처녀들은 낮에는 공단에서 일하고, 밤에는 시집갈 때 가지고 갈 자수병풍에 수놓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죠. 저는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세계 최고가 된 배경에는 여성들의 뛰어난 손재주와 한 땀 한 땀 정성과 혼을 쏟는 자수정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을 독일에 광부로 보낸 아내도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았습니다. 자수는 곧 대한민국 여성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제가 자수에 빠진 배경입니다."

팔공산자수박물관 모습. 규제 탓에 아직
팔공산자수박물관 모습. 규제 탓에 아직 '정식' 박물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 자수도 예술이다!

"웬만한 집안이면 몇 개씩 보유하고 있던 자수 작품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것은 1990년대 초반입니다. 아파트 붐으로 인해 이사를 자주하면 할수록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자수병풍 등은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물건이 됐습니다. 주로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많은데다, 관리가 어렵고(비를 맞거나 습기가 차면 못씀) 재활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쓰레기 종량제 실시는 자수 작품의 대량폐기를 가속화시켰습니다."

오래되고 훼손된 자수병풍을 재활용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표구상 뿐이었다. 고서와 고병풍을 복원ㆍ수리하는데 쓰일 '옛날종이'를 오래된 자수병풍에서 얻을 수 있었다.

"이전부터 자수 작품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 덕분에 대구는 물론, 서울ㆍ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버리려고 마음먹은 것인 만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죠. 자수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입니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전국적 명성을 얻은 자수 작품 전문 수집가가 되었고, 현재 1만 점 이상의 작품이 쌓여 있습니다. 개인이 감당할 수준을 이미 넘어선 셈이죠. 지방정부나 공공기관의 관심이 아쉽습니다."

정 관장은 "자수는 본(밑그림)을 대고 수를 놓는 방식이어서 같은 도안의 비슷한 작품이 많아 독창성 창의성이 떨어지는 탓에 예술작품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다만, 조선시대 자수 작품은 귀하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이제는 예술을 보는 시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자수 작품이 뛰어난 손기술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혼을 담고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것임을 고려할 때 충분히 예술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임진왜란 관련 자료 발굴?

100년 이상 오래된 고서화나 표구를 수리ㆍ복원할 때는 그 당시의 종이를 사용해야 제대로 된 작품이 된다. 이 때문에 정 관장은 표구를 시작한 45년 전부터 '오래된 병풍' 등을 모아왔다. 이렇게 확보한 일부 종이는 이제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 되었다. 15년 이상 계명대 동산도서관의 고서 수리를 담당하고 있는 것도 이런 안목 덕분이다.

"20년 전쯤 백병풍(그림, 글씨가 없는 병풍: 옛날 사대부 가문에서 제사에 사용)을 옛날 종이가 필요해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4년 전 (종이를 쓰기 위해) 물에 넣어 분해해 보니, 글씨가 가득한 종이가 나왔습니다. 무려 56장 112쪽 분량이었는데요. 얼핏 보니 이순신, 원균, 권율, 이원익, 정충신, 송상현…부산, 진주, 순천, 광주… 등의 글자가 보였습니다. 책은 책인데 순서를 모르겠고, 전문가에게 문의해도 해석이 안 됐습니다."

2016년 경상대 강신웅 석좌교수를 만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처음에는 몇 개월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1차 해석에 1년 반이 걸렸다. 책 전문 중 3쪽 반이 없어진 것도 확인했다.

"책에는 선조와 광해군에 관련된 내용 등 궁에서 일어난 일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저자 이름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궁의 일을 상세히 기록한 탓에 일부러 저자 이름을 쓰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지방에서 궁으로 올라온 장계 등의 내용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1차는 글씨만 해석한 만큼 강 교수와 임진왜란 전문가들이 향후 좀 더 깊은 연구를 거쳐 책으로 출판할 예정입니다."

▶ 명량대첩, 이순신의 배는 7척?

정 관장이 발굴한 책의 이순신 장군과 명량대첩에 관한 내용은 특히 관심을 끈다. 그동안 알려진 것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에게 남은 배는 12척이 아니라 7척이라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싸움에서 패했다는 보고가 도성으로 들어가자 이순신을 옥중에서 나오게 해 다시 통제사로 임명했다. 공(公)은 단지 약간의 군관을 거느리고 전라도로 가 패잔병을 수습해 7척의 배와 1천여 명의 군사를 얻어 진도 벽파정 나루 입구에 진을 쳤다.

기세를 탄 적들이 장차 서해를 치려고 모든 전력을 이끌고 돛을 올리니 망망대해에 물결은 보이지 않았다. 공은 말소리나 얼굴빛이 동요되지 않았다. 당시에 피난 가려는 사대부의 배 수십 척이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다.

공이 그들을 불러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저러하니 당신들도 화를 면키 어려울 것이오. 차라리 내 부탁을 들어주고 내가 크게 싸우는 것을 구경하시오'라고 하니 모두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침내 그들에게 깃발과 북을 주고 말하기를 '당신들이 항구 쪽에서 장사진을 치고, 배에는 각자 깃발을 꽂고 북을 울리면서 싸움을 돕는 것처럼 해주시오. 그러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고 했다…."

▶ 문화가 숨 쉬는 팔공산을 만들자

정 관장이 팔공산자수박물관을 개관한 것은 7년 전이다. 상인동 시절까지는 표구를 하지 않고 자수 작품을 보관만 해왔다. 팔공산으로 오면서 병풍 등 500틀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팔공산자수박물관은 '정식' 박물관이 아니다.

"팔공산은 한 해 1천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대구를 대표하는 명승지입니다. 팔공산에서 박물관을 열면 외국인과 대구시민 등의 관심을 끌고, 각종 정책적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하지만 시설지구 내에는 미술관ㆍ박물관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민화와 책을 40년 이상 수집한 분이 팔공산에 박물관을 지으려다 되돌아가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전해들은 외국인과 외지인들은 "사실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대체 대구시와 시의회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반응한다. "그린벨트나 국립공원에도 가능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팔공산 시설지구에서는 안 된다니? 이게 과연 합리적인 규제인가? 규제개혁은 입으로만 하나?"면서 고개를 흔든다.

정 관장은 "평생을 자수 작품 수집에 투자하다 보니, 개인의 한계를 벗어난 규모의 작품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국여성의 혼과 정성, 노력이 담긴 자수 작품들을 개인 소유물이 아닌 공공의 자산으로 활용해야 할 의무감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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