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사랑의 예술사/이미혜 지음/경북대 출판부 펴냄

사랑의 예술사/이미혜 지음/경북대 출판부 펴냄

사랑의 예술사 책 표지
사랑의 예술사 책 표지

특정 시대의 사랑이 문학과 미술, 영화에서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예술작품은 그 작품을 낳은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기 마련이고 작품 속에는 필연적으로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맥락이 존재한다.

종종 사회상과 동떨어진 '작가주의 작품'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작가 역시 '시대가 낳은 인물'이므로, 그가 창작한 작품은 '해당 시대의 기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책은 서양의 문학과 미술, 영화 등을 통해 '각 시대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들여다 본다.

◇ 19세기 "누드는 괜찮지만 알몸은 안 돼"

19세기 도덕은 여성을 성적 욕구가 배제된 순백의 존재로 만들었다. 문학과 미술에서도 성에 대한 묘사는 금기시됐다. 그렇다고 당시 중산층이 누드화를 멀리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누드화를 애호했다. 다만 그들이 선호하는 형식이 있었다. 누드의 대상은 먼 과거의 사람 혹은 멀리 떨어진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베누스나 로마의 여자 노예, 오달리스크는 용납됐지만 당대 여성을 누드로 묘사하는 것은 금기였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년)의 '풀밭 위의 점심'은 인상주의의 시발점이 된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물가에 소풍 나온 두 쌍의 남녀가 있다. 앞에는 옷을 다 벗은 여자와 두 남자가 앉아 있고, 화면 뒤쪽에는 슈미즈 차림의 여자가 몸을 숙이고 냇가에 앉아 있다. 그림 앞쪽 왼쪽에는 음식을 담아온 바구니와 물병,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여자의 옷과 모자가 널브러져 있다. 마네는 이 그림을 1863년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사람들(심사위원들)은 이 그림을 추하고 야비하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에두아르 마네는 1863년 살롱전에
에두아르 마네는 1863년 살롱전에 '풀밭 위의 점심'을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이 그림을 추하고 야비하다고 생각했다. 책에서 발췌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여자의 옷과 모자.'

화면 앞쪽에 널브러져 있는 옷과 모자는 두 여자가 함께 온 남자들이 쳐다보는 앞에서 옷을 벗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용인할 수 있는 '누드'가 아니라, 천박한 '알몸'을 의미한다.

게다가 앞쪽에 벌거벗은 채 앉은 여인은 지극히 현실적인 여체에 또랑또랑한 눈으로 관객을 똑바로 쳐다본다. 조르조네의 '잠자는 베누스'에 익숙해 있던 당시 사람들은 도전적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이 여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507~1510년에 그려진 조르조네의 '잠자는 베누스'는 여신이 나른한 자세로 전원 풍경 속에 잠들어 있는 그림이다. 이 여신은 벌거벗고 있지만 성적이지 않으며, 벌거벗은 몸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본인이 의식하지 않으므로 관객 역시 덜 의식할 수 있었다.

◇ 낭만시대, 생생한 여체는 뻔뻔하다 여겨

마네와 같은 해(1863년) 살롱전에 누드화 '베누스의 탄생'을 출품한 알렉상드르 카바넬(1823~1889년)은 찬사를 받고 출세길을 달렸다. 살롱전을 관람한 나폴레옹 3세는 이 그림을 4만 프랑에 구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바넬은 에콜 데 보자르(고등 예술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교수로 부임했다.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한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누드화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한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누드화 '베누스의 탄생'. 젖가슴을 훤히 드러낸 누드화였지만 눈을 반쯤 가리고 있어 당대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책에서 발췌.

카바넬의 성공은 에로티시즘을 신화로 연결함과 동시에 신중함을 적절히 배치한 덕분이다. 신고전주의 기법에 따라 신체 윤곽선은 분명하게, 피부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매끈하게 표현했다. 그렇게 육감적으로 몸매를 묘사하면서도 무릎을 살짝 굽혀 중요부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무엇보다 젖가슴을 활짝 드러내고 있지만, 오른손을 이마에 올리고 있어 눈이 반쯤 가려져 있다. 도전적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보는 마네의 누드 여인과 다른 모습이다. 당시 사람들은 성(性)을 연상하게 하는 생생한 여인보다는 다소 몽롱한 누드를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낭만적 사랑을 원했던 당시의 세태였다.

◇ 사랑과 결혼, 가정이 최고의 가치

이 책은 마네와 카바넬이 활동했던 19세기를 '▷근대-1 낭만적 사랑'의 시대로 명명한다. 이 시기에는 제조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노동자를 고용해 사업체를 경영하는 중산층이 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귀족도 농민도 아닌,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도시 부르주아로 직업을 소중히 여겼으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예술수요에서도 귀족을 밀어내고 시대의 취향을 결정하는 위치에 섰다.

경제적·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중산층은 소설의 주 독자층을 형성했고, 당시 소설은 신분 차이와 온갖 장애를 넘어 결혼에 성공하는 사랑, 즉 낭만적 사랑을 옹호했다. 그들에게 결혼은 신분과 가문에 따른 계약(정략결혼)이 아니라 당사자간 자유로운 선택과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했다.

당시 철학도 마찬가지였다.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 이데올로그들은 개인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정의와 이성에 바탕을 두고 남녀관계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들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복추구가 인간의 목표로 떠올랐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사랑이 전제돼야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낭만적 사랑은 결혼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행위였다. 사랑은 결혼에 이르는 단계로서만 허용되었고, 결혼의 틀을 벗어난 다른 모든 유형의 사랑은 불륜으로 배척되었다.

◇ 가족중심… '결혼 전과 후'로 인생 구분

산업화와 함께 성장한 중산층은 여성을 순결한 '집안의 천사'로 만드는 대신 독립성을 박탈했다. 그녀들은 조화로운 가정에서 태어난 처녀들이며,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와 병자를 보살피며, 집안의 살림을 규모 있게 꾸리는 데 전념할 뿐이다. 그 결과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가정의 정서적‧도덕적 중심이 되었고, 아내의 자리는 굳건해졌다.

남성들 역시 이전에 비해 훨씬 가정적으로 변했다. 가정폭력을 하층계급의 악덕으로 여겼고, 일부일처제를 엄격히 고수했다. 이 시기 남자들은 바깥 활동보다는 가정이라는 성소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사생활을 소중히 생각했다. 애정의 대상은 부부와 자녀 중심의 핵가족으로 축소됐고, 가정은 날이 갈수록 배타적인 영역이 되었다.

19세기 가정은 '완벽한 장소, 완벽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이 완벽함을 이루기 위한 연애와 결혼은 당시 사회의 중심주제였다. 당시 문학과 미술은 이런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윌리엄 파월 프리스의 1855년 작 '연인들' 은 그런 시대상을 상징한다.

가정과 결혼이 이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사람의 일생은 '결혼 전' 과 '결혼 후'라는 두 영역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은 사랑과 결혼에 모든 것을 걸었다.

◇ 상업시설 발달하면서 가족중심 여가 변화

1870년을 지나면서 산업사회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수공업 중심에서 거대기업과 거대회사가 출현하고, 사회계층도 더 세분화됐다. 일상과 여가의 모습도 변화를 맞이했다.

매춘부를 소재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 1894년 그린
매춘부를 소재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 1894년 그린 '물랭가'

오페라, 발레, 연극보다 값싸고 대중적인 오락 즉, 카바레, 뮤직홀이 생겨났고 마술, 춤, 곡예와 같은 쇼가 인기를 끌었다. 백화점, 레스토랑, 다과점, 유원지 등 상업시설이 늘어나면서 가족·친지와 함께 집에서 이루어지던 사교와 여가는 익명의 사람들과 부딪히는 바깥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상업문화가 융성하면서 결혼제도도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근대사회는 결혼과 순결, 가정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으나,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매춘이 번성했다. 사회변화에 따라 이 시기 회화에서는 매춘 여성과 관련한 그림들이 많이 등장한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1894년 작, '물랭가'-

이 책은 총 8부로 구성돼 있다. 예술의 역사를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근대 ▷현대 등 여섯 시기로 구분하고, 근대와 현대는 각각 ▷낭만적 사랑(근대1) ▷일탈적 사랑(근대2) ▷해방된 사랑(현대1) ▷불안한 사랑(현대2)으로 나누고 있다.

각 부마다 주제가 있는데 ▷고대는 약탈적 사랑 ▷중세는 궁정식 사랑 ▷르네상스는 충동적 사랑 ▷바로크는 퇴폐적 사랑 ▷근대1은 낭만적 사랑 ▷근대2는 일탈적 사랑 ▷현대1은 해방된 사랑 ▷현대2는 불안한 사랑, 등이다. 각 시기마다 연애, 결혼, 가족제도, 매춘, 동성애, 여성의 지위 등 소주제 5~7개씩 배치했다. 앞에 소개한 내용은 제5부 '낭만적 사랑(근대1)' 부분이다.

476쪽, 2만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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