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고장인의 삶을 바꾼 그 순간] 한동식 외동석재 대표

최고장인 칭호 받으며 생의 전환점 맞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각자의 소질이 있어

"사나이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잖아요. 제 인생이 바뀐 것도 그때죠. 실력을 인정받았을 때. 엄연한 공인이 된 거니까요."

또래가 한창 공부할 때 석공 수련생으로 입문했던 1969년의 16세 한동식은 40년이 훌쩍 지난 2015년 석공 외길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경상북도에서 그에게 '최고장인'이라는 칭호를 준 것이었다.

"옛날에 만든 탑 같은 걸 보면 '내가 왜 저렇게 했을까, 지금이면 좀 더 좋은 걸 만들었을 텐데'라며 후회하는 부분도 생기죠."

최고장인이 된 이후 실제로도 모양에서 차이가 나느냐고 묻자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했다. 부담감도 생겼지만 최고장인으로서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기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더 크다고 했다.

한동시 외동석재 대표가 석불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한동시 외동석재 대표가 석불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작품을 만지고, 대하는 그의 마음이 바뀐 것이었다. 정성이 곱절은 더 들어가고 자세가 달라졌다고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납관부일기(아오키 신몬 著)'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죽은 이를 염하던 주인공 장의사가 정성을 다해 사체를 다루자 유족들이 감읍하며 그들이 지나온 생을 돌아보더라는 내용이다.

"같은 질의 제품을 팔더라도 인정을 받으며 파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죠. 기왕이면 최고장인의 제품을 사고 싶다는 고객의 인식도 바뀌었고요."

1972년 2월 2만9천원의 자본금으로 외동석재를 경주에 연 한동식 씨는 1969년 처음으로 돌 깨는 망치와 정을 잡았다. 당시에는 흔했던 무보수 수련생이었다. 힘은 들었지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경주에는 오릉, 신문왕릉 등 석재 보수 수요가 많았다. 중학생 나이던 그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건 동생들의 공부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한 점은 그에게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기술로 승부하는 석공에게 큰 미련은 못 됐다.

"학벌 위주로 매달려선 곤란해요. 쓸모 있는 배움으로 세상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각자의 소질이 있어요.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합니다. 세상이 나를 집중해 보기 시작하고 인정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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