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의병을 모집해 일본군과 전투에서 잇따라 패하고,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 왕산 허위는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허위는 의병해산 이후 백형 허훈이 있는 청송에서 수학하고 있던 중 대신 신기선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게 된다.
1899년 처음으로 관직생활을 한 허위는 1905년까지 고종황제 측근에서 일제의 침략에 적극 맞서는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乙巳條約) 직전에 정치생활을 청산하고 항일의병에 또다시 투신한다.

◆관직에 첫발을 딛다
1896년 의병이 해산된 후 허위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898년 복수소청(復讐疏廳)을 만들고, 황국협회에도 참여를 했다.
복수소청은 보수적인 인사들이 주축이 돼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와 반일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단체이다.
허위는 이상천, 황보연, 이문화, 이건중, 채광묵 등과 함께 복수소청과 황국협회를 주도했다.
신기선의 추천으로 허위가 관직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99년이다. 이 당시 그의 나이 45세.
신기선은 보부상 단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1898년 12월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강제 해산되자, 1899년 7월 황국협회 후신인 상무사(商務社)의 도사장으로 보부상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1899년 3월 9품인 원구단 사제서 참봉으로 관직을 처음 시작한 허위는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재판장, 의정부참찬을 역임하고, 1905년에는 비서원승(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에 오르는 등 초고속 승진을 했다.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허위는 선산 사람으로 불우한 생활을 하면서도 뜻이 고상하여 호언장담을 좋아하고 자신의 경륜을 높이 평가했다. 서울에 와서 10여 년 동안 지내던 중 권귀가(權貴家)를 찾아보지 않고 한 객관(客館)에서 머물고 있었다. 영남사람으로 서울에서 관리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허위를 책사(策士)로 추대했다. 고종의 총애가 날로 높아져 의정부참찬에까지 올랐다"고 했다.
관직에 오른 허위는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항일언론가이자 개신 유학자인 장지연과의 교류는 전통 유학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허위가 장지연을 통해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언제나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기에 벼슬살이에 안주할 수 없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등 일제가 대한제국 침략에 박차를 가하자 곧바로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일제의 침략 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이 의병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배일통문을 돌렸다.
일본의 국정 간섭에 대한 죄상을 열거한 격문을 살포했다.
그의 배일통문은 일제에 대한 증오와 국권회복의 열망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앉아서 (나라가)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 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고리를 부숴 칼을 만들고 … 우리는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를 좇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당시 정부 관료 중에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항의를 그는 온몸을 던져 한 것이었다.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허위는 항일 언론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정우회를 조직해 반일·반일진회(反一進會) 투쟁을 전개했다.
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항변했다.
일본은 전 국민의 궐기를 촉구하는 배일통문의 주모자가 허위임을 밝혀내고 헌병대에 구금했다.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의정부참찬에서 사임시킨 뒤 석방했다.
그렇지만 광무황제는 두 달 뒤 다시 비서원승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관료이자 반일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허위의 전력을 두려워한 일본은 최익현ㆍ김학진 등과 함께 그를 다시 구금했다.
다른 사람을 석방한 뒤에도 허위만은 4개월 동안이나 헌병사령부에 더 붙잡아뒀다.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일제의 말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맞받아쳤다.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와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를 끝내 굽히지 않자 일제는 하는 수 없이 허위를 헌병의 감호 아래 강제로 귀향시켰다.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
1904년 러일전쟁 후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키웠다.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지지를 업고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챙겼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해 미국으로부터 사전 묵인을 받았다.
이어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양해를 받았다.
또 1905년 미국은 일본과 러시아를 설득해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맺도록 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에는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 체결 후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보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왕이 쓴 문서를 가지고 왔다.
이 문서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고 일본국 보호국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종은 거부했지만, 일본은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 을사5적을 앞세워 강제로 체결했다.
무장한 일본군을 궁궐과 시내 곳곳에 배치해 경계를 세우고 궁궐 안에는 무장한 헌병과 경찰들이 드나들면서 고종을 압박했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어전 회의를 열고 을사5적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것이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사5조약·을사늑약)이다.
을사조약 체결 후 민영환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항일 논설을 게재했다.
을사조약에 앞장선 을사5적을 처단하자는 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전국 의병 단결과 항전 호소
경상·충청·전라 3도의 경계인 삼도봉 아래 김천 지례면 두대동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하던 허위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의 비보를 들었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각종 근대적 개혁조치를 추진하던 그는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소식을 듣고 1907년 경기도 북부지역을 근거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다른 의병부대와 함께 그의 부대는 일제 군경을 공격하고, 친일매국분자를 소탕했다.
허위는 의병대장 이인영과 함께 전국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총집결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집결한 군사들을 중심으로 1907년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편성했다.
48개 부대 1만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의병부대였다.
1908년 4월, 허위는 전국의 의병부대에 거국적인 항전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송했다.
5월에는 서울로 사람을 보내 고종의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등 30개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전달했다.
그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경고장도 함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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