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음악유사]심야의 결투

축음기(蓄音機)는 여러 나라에서 서로 자기네가 먼저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는 1857년 '리온 스코트'가 발명했다고 큰 소리치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크로스'하고 '에두 아르 레옹 스콧'이 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만들어진 것들은 지극히 원시적인 것들이어서 축음기라 말할 수가 없다. 진정한 축음기는 미국인 에디슨에 의해 만들어졌다. 1877년 7월 31일 완성이 되고 11월에 발명특허를 받게 된다.

발명 당시 이름은 '말하는 기계'였다. 소리를 녹음하는 장치는 얇은 주석 판을 이용한 원통형의 도구(틴 포일)였다. 에디슨은 이 주석 판에 자신이 부른 "메리에게 어린 양 한마리가 있었다."는 노래를 최초로 녹음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866년 충청도 해미 앞 바다 배위에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현감과 관원을 초청하여 처음으로 축음기 소리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것은 축음기라기보다 단순하고 초보적인 소리재생의 기계였을 것이다. 오늘 날과 같이 음성 재생을 하고 녹음을 최초를 선보인 것은 1897년 미국 공사 알런이 고종 앞에서였다. 이것이 공식기록이다. 이 무렵에는 음성 재생장치는 틴 포일에서 음반으로 발전해서 SP음반이 처음 나온다.

 

축음기는 처음에는 유성기(留聲機)라고 불리다가 차츰 일본식으로 축음기라고 불렀다. 기계가 일본을 통해 들어 온 탓에 한동안 많은 사람들은 '유손키', '치쿠온키'하며 일본말로 불렀다.

축음기가 대구에 들어왔을 때 너무 고가여서 한동안은 다방이나 부잣집에서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인동에 서로 내 잘났다고 뻐기는 두 부잣집이 있었는데 한 집이 동네서 처음으로 치쿠온키를 사서 밤마다 큰 소리로 틀어대었다.

선수를 빼앗긴 맞은 편 집도 며칠 뒤 축음기를 샀다. 이 집에서도 밤마다 틀어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양쪽 부자들의 체면 대결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 한집이 '울고 넘는 박달재(박재홍)'로 장이야 하고 나오면 상대에서 '나그네 설움(백년설)'으로 멍이야 하고 받아친다. '눈물 젖은 두만강(김정구)'과 '찔레꽃(백난아)', '전선야곡(신세영)'과 '신라의 달밤(현인)', '비 내리는 고모령(현인)'과 '목포의 눈물(이난영)', '황성옛터(이애리수)'와 '짝 사랑(고복수)'등의 노래의 심야대결이 12시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기 까지 계속된다.

당시의 SP판은 분당 78회전 하고 한 면이 3∼4분까지만 음악이 나온다. 대결의 중간 중간에 휴식이 있는데 이때는 '산도박스(사운드 박스)'에 새로 바늘을 갈아 끼우고 또 축음기가 돌아갈 수 있도록 '젠마이(태엽)'를 감아야 되므로 본의 아니게 두 집 모두 중간 중간에 휴식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요즘 이런 소란이 있으면 갑질 한다고 난리가 나고 안면방해한다고 경찰관이 들이 닥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네사람들은 이런 소동도 귀한 음악 감상 기회라 생각하고 가요무대인양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SP 판은 LP 판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진다. 그 플라스틱판은 연이어 1979년경에는 워크맨으로, 카세트테이프로, 1980년대는 CD, MP3, USB 메모리로 감상도구가 바뀌었다. SP시절 전국을 호령하던 대구의 위세는 "찬물에 고추 줄 듯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대구 출신 삼성 부회장이 감옥에 갔다 오더니 이제는 대구경북 출신 대통령도 둘이나 감옥에 들어가 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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