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병원의 탄생과 인간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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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건축이 보여주는 놀라운 성취는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경탄하게 한다. 기원전 2천500년 무렵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피라미드들은 건축학적 놀라움뿐 아니라 그만한 규모의 토목건축을 뒷받침한 효율적 행정체계와 생산력을 증언한다. 서기 125년 경 재건된 로마의 판테온은 무려 2천여 년의 풍파를 견뎌내며 아직도 현역의 위용을 뽐내며, 기원전 19세기 무렵 고대 바빌로니아에 설치된 하수도와 수세식 화장실은 생활에 필수적인 건물과 구조물들이 고대 사회에도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그런데 어지한간 것은 모두 갖춘 이집트와 로마 제국에서 찾을 수 없는 건물이 있으니, 그것은 병원이다. 이집트 의학의 창시자요 최초의 의사라 불리는 임모텝은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 의학 기록을 남겼지만, 이집트 어디에도 병원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명실상부 세계의 중심(Axis Mundi)으로 기능했던 로마에도 병원 건물은 없었다. 오늘날의 병원과 비슷한 발레뚜디나리아(Valetudinaria)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여기에는 오직 군인들과 노예들만 드나들 수 있었다. 환자들을 위한 돌봄의 기관이라기보다는 손상된 노동력을 보충하는 일종의 수리소였다는 뜻이다. 임모텝이 환자들을 돌본 것도 그가 최초의 피라미드 설계자요 건축가였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임모텝의 의료는 근본적으로 건설에 동원된 수많은 인적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요컨대, 고대 사회는 더 이상 생산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노동력을 보충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돌보는 것은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이들에게 자원을 낭비하는 일로 여겼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서양 최초의 병원이 체사레아의 주교 바실레이오스(성 바실리오)에 의해 등장한다. 바실레이오스 주교는 그리스도교 복음 정신으로 사회적 이상을 구체화시킨 일종의 사회복지 복합 건물을 세워 여행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주교는 여기서 친히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며 음식과 영혼의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스피치움(Hospicium)이라 불리는 이런 건물들이 곳곳으로 퍼져나가 훗날 병원의 모태가 된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17개의 치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고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로 격상되었다.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진"(마태 8,16~17) 예수의 모범을 따라 환자를 돌보는 일은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일이 되고, 마지막 날의 심판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 수고를 갚아주시리라는 희망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인간 생명의 가치를 그의 생산력과 분리하게 되는 이 지점이야말로 인간의 가치와 품위가 복음 정신으로 새 옷을 갈아입은 생생한 예일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에 매이지 않는다. 오늘날 의료와 관련된 여러 가지 논쟁에서, 그러니까 낙태 합법화라든가 안락사 논쟁 같은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이 명료한 진실을 자주 잊는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박용욱 신부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박용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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