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古稀)를 앞둔 아버지는 난리통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첫 아들을 품에 안아볼 새도 없이 낙동강 전선에 불려갔다. 나이가 비슷했던 할아버지의 큰조카도 함께 대문을 나섰다. 한참 만에 전쟁이 끝났지만 할아버지만 돌아왔다. 일찍 부모를 여읜 아버지는 줄줄이 달린 동생들과 자식을 키우느라 한평생 쟁기질을 했다. 공업도시 구미와 이웃한 덕에 농한기에는 구미 공단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평생 전쟁을 싫어하는 보수로 살았다. 선거 때면 어김없이 보수 후보를 찍었다. 통일벼로 끼니 걱정을 잊게 하고, 구미 공단을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의리였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선 문재인 대통령을 선택했다. '경우가 밝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6·13 선거에서도 '경우가 있는' 무소속 후보를 찍었다. 그렇다고 '통일벼'와 '구미 공단'을 잊은 건 아니다. 박정희에 대한 '부채'를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으로 어느 정도 갚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 눈에 보수는 '경우를 아는 바른 보수'다. 보수는 아들과 손자들이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는 정치인이다. 비록 좌파 우파에 대해 잘 모르지만 누가 대한민국을 살찌울지는 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절에는 동생과 아들을 무사히 출가시키는 게 보수였다면 이제는 손자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것이 보수이고 '선'(善)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상당수 보수 표심이 아버지 마음과 비슷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자유한국당은 선거에서 처절하게 졌다. 공천을 번복하고, 사천하고, 그럴듯한 여론조사를 적용해 지지율 1위 후보를 날리고, 남의 도시를 욕하고…. 아버지는 그냥 경우가 없는 당에는 손자들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봤다.
특히 대구경북(TK)은 보수 몰락의 원죄까지 있다. 막장 공천의 진수를 보여준 20대 총선에서 한국당 공천 감독은 대구 출신 이한구 전 의원이었다. 그 뒤에는 경북 출신 실세 스트라이커 최경환 의원이 있었다. 강제 퇴장당한 유승민 의원은 계속되는 경기에서 단독 드리블만 이어가고 있다. '친박'(친박근혜) 의원들은 축구공만 떼지어 따라다니며 '박근혜 마케팅'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지난 총선은 진박 월드컵이나 진배없었다.
한국당은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경우 없는 굿판'이 이어지고 있다. 집이 불타 이미 다 쓰러졌는데도 친박과 비박은 밥그릇 싸움에만 혈안이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는 희망이 없다. 무릎 한 번 굽힌다고 없던 경우가 생긴다면 백 번이라도 꿇을 일이다. 우리나라를 책임질, 통일 한반도를 준비할 능력도 청사진도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금배지 지키기에만 급급하다. 일부 중진과 초선이 거창하게 불출마 선언하는 게 무슨 대수인가. 반짝 쇼도 안 된다. 어차피 지지를 받지 못해 다음 총선을 기약하기 어려운 이들이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참신한 인물로 기초를 다지고 명망가를 영입해야 그나마 보수 재건의 희망이 있다.
6·13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마지막 막말을 하며 떠난 홍준표 전 대표에게 TK 버전 막말 한 자락 청한다. ▷국회의원 하면서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자리로 정치 생명을 연장하려는 사람 ▷기초단체장보다 인기도, 하는 일도 없으면서 공천 권력 가졌다고 마구 휘두르는 사람 ▷경쟁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사천을 일삼는 사람 ▷막말을 입에 올려 시도민에게 불명예를 안긴 사람 등은 반드시 21대 총선에서 심판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바라는 보수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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