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서거로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시대'를 이끈 한국정치사의 거목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3김 시대'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 정치인이 활약한 시기를 의미한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한 야당 정치인이었고 김종필 전 총리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9년(2015년 서거),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4년(2009년 서거) 정계에서 은퇴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2004년 총선에서 10선 도전에 실패한 후 정치권을 떠났다.
김 전 총리는 충남 부여 출신으로 공주중-공주고-서울대를 졸업했다.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시절 명실 공히 정권의 2인자였고 전두환 정권 이후엔 충청권의 맹주로 활약했다.
대구경북과는 경북 선산(구미)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돕는 핵심참모로 인연을 맺었다. 지역민들은 그가 초대 중앙정부부장,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아 박정희 정권의 초석을 다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또 박정희 정권 탄생 이후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서 대통령을 돕는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각종 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주요 당직자(총재·부총재 등) 자격으로 지역민들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10.26)과 신군부 군사쿠데타(12.12)를 거치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김 전 총리는 정치활동 규제대상자에서 풀리고 민주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자신의 고향인 충청권에서 맹주로 떠올랐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선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서 대구 출신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와 맞서기도 했다.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던 김 전 총리는 1990년 3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민주자유당)합당을 통해 다시 범보수진영에서 대구경북과 한솥밥을 먹었다. 하지만 김 전 총리와의 동행은 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으로 종료됐다.
대구경북과 김 전 총리의 가장 극적인 인연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선거 때 만들어졌다. 총선에 앞서 당내 패권을 민주계에 내주고 민주자유당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김 전 총리는 자신이 창당한 자민련이 15대 총선에서 녹색돌풍(50석)을 일으키며 부활했다. 대구와 경북에서만 10명(대구 8명, 경북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하지만 김 전 총리는 대구경북에서의 주도권을 곧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내줘야했다. 1997년 신한국당이 박근혜 당시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영입하자 자민련 소속 대구경북 국회의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시차를 두고 신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겼기 때문이다.
김 전 총리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DJP연합(김대중+김종필)을 통해 승리하고 국무총리가 됐다. 하지만 의원내각제로의 헌법개정을 둘러싸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이견이 불거지면서 DJP연합은 깨졌고 김 전 총리와 자민련은 내각에서 철수했다. 이후 김 전 총리는 정치적 내리막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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