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국민이 불안한 이유

1980년대 중반, 일본 반도체 산업은 황금기를 보냈다. 인텔이 D램을 발명한 1971년 이후 시장을 독식해온 미국을 밀어내고 일본이 세계 점유율 80%로 메모리 시장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쌍두마차인 도시바와 히타치가 일본 반도체를 이끌었다. 그런데 1999년 12월 엘피다만 빼고 일본 기업이 D램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를 두고 일본 업계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꽃이 졌다'고 표현한다.


벚꽃처럼 화려하게 꽃을 피우다 와르르 무너진 이유가 궁금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일본병(病)'이다. 일본 반도체 산업 실패 보고서이자 반성문인 '일본 반도체 패전'을 쓴 유노가미 다카시는 이리 진단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에는 심각한 병이 있다. 과잉 기술로 과잉 품질, 과잉 성능의 제품을 만드는 병이다. 반도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휴대전화· TV 등 디지털 가전 분야도 증세가 똑같다. 이 병을 치유하기 어려운 이유는 '비용 의식의 부재' 때문이다." 원가를 무시하고 최고만 지향하다 일본 반도체가 꼬꾸라진 것이다.


일본 반도체는 시장이 원하지도 않는 고기술과 고품질, 고성능의 고가 제품에 매달리다 시장을 정확히 꿰뚫어 본 한국 등 경쟁 메이커에 밀려 퇴출됐다. 달리 표현하면 제조문화의 과잉, 자기만족의 종말이다.


이후 20년 가까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절대 강자 삼성과 SK하이닉스, 마이크론사의 각축전 양상이다. 그런데도 일본 반도체 기업과 기술자들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기술력은 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영과 전략에서 밀리고 가격 경쟁력이 없는데도 기술 타령만 해대는 것이다. 저비용에 시장이 원하는 제품, 즉 제조의 기본을 무시하면 실패는 부르지 않아도 다가온다. 일본 반도체의 실패는 한마디로 병을 병으로 보지 않는 데 있다.


비슷한 사례가 요즘 위기감이 높아진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이다. 각종 지표의 하락과 민생 악화가 문재인표 정책의 쌍두마차인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소득을 늘려 민생과 경제에 피가 돌게 하겠다는 탈양극화 정책이 위기에 몰린 이유는 뭘까. 현실과 겉도는데도 최상의 해법이라며 우기고, 궤도 수정을 외면하는 고집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탐욕이 보수를 망치고, 아집이 진보를 그르친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경제 교조주의가 오히려 민생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일본병과 증상이 비슷하다.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의욕과 구호만으로는 바꾸기가 어렵다. 철학이 아무리 깊어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변화와 변신은 그림의 떡이다. 시장 주체들이 함께 공감하고 힘을 모을 때 비로소 환경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는 법이다.


소득이 거꾸로 줄어드는 소득주도성장, 개혁 없는 혁신성장은 극심한 일자리난을 부른 '일자리 정부'만큼이나 모순이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의 비명이 결코 자장가가 아님을 문재인 정부는 알아야 한다. 지금 한국경제라는 시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일자리 감소나 투자, 소비, 수출 감소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 해법의 출발은 경직된 도그마를 버리고 정책 유연성을 찾는 일이다. 일본 반도체가 무용한 기술에 볼모가 됐고, 문재인 정부는 철학에 발목을 잡혔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한국경제 반등은 없다.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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