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 파워 인터뷰] 우기정 대구컨트리클럽 회장

우기정 대구CC 회장은
우기정 대구CC 회장은 "자연은 하늘이 인간에게 준 것이고 골프장 역시 자연의 일부인 만큼, 나무ㆍ새 등 다양한 생명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골프장을 이용하면 할수록 더 좋다"고 말했다. 매년 열리는 가곡의 밤 행사는 이런 철학이 바탕이 되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우기정(73) 대구컨트리클럽(이하 대구CC) 회장은 남다른 특별함이 좀 많다. 지난해 6월 72타를 기록하며 우리나라 66번째 공인 에이지슈터(골프 스코어와 나이가 똑같음)가 된 것은 어쩌면 평범한 사건에 속할지 모른다. 50년을 훨씬 넘는 구력에다 골프장에서 평생을 보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아직 골프장이 낯설던 1990년대 어린 학생들에게 소풍 장소로 골프장을 개방하고, 2004년 이후 매년 가을 인근 마을 주민과 시민들을 골프장 필드로 초청해 '가곡의 밤' 행사를 여는 것 또한 나눔의 정신을 가진 경영자적 감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 회장은 시인이기도 하고, 철학박사(한국학)이기도 하다. 성공한 인사에게 흔히 주어지는 명예박사가 아니라, 석ㆍ박사 과정에 꼬박 10년을 투자했다. 우리나라 국민훈장 중 최고인 무궁화장(2007년)과 최고의 체육훈장인 청룡장(2013년)을 함께 수훈한 유일한 민간인이기도 하다.

무엇이 우 회장을 이처럼 '특별하게' 혹은 '유별나게' 만들었을까? 인터뷰를 위해 찾은 대구CC는 한여름의 싱싱함으로 명품 골프장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외갓집이 2곳?

우 회장은 1946년 대구 원대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우제봉 회장은 실제로는 큰아버지이다. 생부는 우제봉 회장의 동생인 우제린.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마치고 대구고등법원의 서기로 근무한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원대단파방송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르면서 가정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생부가 독립운동 혐의로 투옥되자, 일제의 감시는 집안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었고 큰 아버지 우제봉 회장은 일본 경찰에 쫓겨 만주로 달아났다.

"혹독한 고문과 비참한 옥살이는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시절이었죠. 생모는 감히 면회를 갈 엄두조차 못 내고 벌벌 떨고 있었고, 어머니(실제 큰어머니)가 2년 반 동안 시동생 옥바라지를 도맡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6.25 전쟁 중 좌우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생부는 행방불명되었다. 이런저런 말이 들리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집안에 몽양 여운형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중도성향인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영남지역도서출판노조위원장을 맡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려 했으나, 대구경찰서에 큰 불이나 (항일운동) 기록이 다 사라져버려 끝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해방 전ㆍ후를 소재로 한 소설에 '우제린'이란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후 우 회장은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렇게 우 회장에게는 2곳의 외갓집이 생겼다.

아픈 가족사를 겪은 귀한 아들인 만큼, 아버지의 기대는 컸다. 사업을 위해 1954년 서울로 옮긴 덕분에 명문인 수송초등학교를 다녔다. 전교 2등의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런데 동기생 60명이 합격한 경기중학교 입학시험에 탈락하는 이변이 생겼다.

"내 마음의 상처로 남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이틀 동안 이불을 덮어쓰고 울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흘 째 하신 말씀은 엉뚱했는데요. '기정아, 영화 보러 극장에 가자!'였습니다."

▶운명이 된 골프

동성중ㆍ고에 진학해서도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아버지는 법대나 상대로 진학하라고 은근히 꼬드기셨다. 중학교 진학 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터라 이번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를 작정이었다.

"중2 때 국어교사가 시인 황금찬 선생이었습니다. 숙제 해 온 것을 보더니, '너 글 잘 쓴다. 시인하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문제는 고1때 터졌습니다. 서울시 고교백일장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입니다. '내가 진짜 시에 대한 재주가 있는가 봐!'"

연세대 국문과 교수였던 이모부를 찾아갔다. 물론 아버지를 대신 설득해 달라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시인이 되기 위해 국문과로 진학하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진정한 시인이 되려면 철학과에 가서 사람의 기본 소양을 갖춘 뒤 시를 써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 회장은 결국 연세대 철학과로 진학을 했고, 아버지는 포기상태가 되었다.

아버지 우제봉 회장은 1965년 친구분들과 함께 뉴코리아CC를 만들었다. 덕분에 우 회장은 대학 때부터 골프를 접했다. 1968년 한국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뉴코리아CC를 인연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자주 골프 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고향에 내려가서 (골프장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고, 이것이 대구CC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골프장이 완성될 즈음인 1972년 우 회장은 군에서 제대했다. 골프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대학 때부터 골프를 접한 우 회장이 골프장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당연히 아버지를 도와 현장책임자로서 대구CC의 완공에 힘을 보탰다.

"이제 골프장 회원을 모집해야 하는데, 문제는 당시 경상북도(대구시 포함) 내에 자가용이 500대 뿐이었다는 점입니다. 골프장은 다 지었지만, 수요가 없으니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었죠. 일본으로 가 제일교포를 대상으로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경영난으로 부도 위기를 맞게 됐습니다."

우 회장은 아버지를 설득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당좌수표의 발행인 이름을 '우기정'으로 변경하도록 한 것이다. 경영일선에 나선 우 회장은 경북을 넘어 전국으로 마케팅 범위를 넓혔다. 부산, 마산, 서울 등에서 회원을 모집했다. 일찍 골프를 시작한 덕분에 우리나라 골프계에 지인이 많았다. 다행히 골프회원권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높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2년 반 동안 하루 20시간을 일하면서, 1979년 10월 22일 개장기념일에 '부채제로선언'을 할 수 있었다.

(1980~1990년대 중반은 호황기였다. 골프장 증설(18홀→27홀)을 위해 설립한 건설사는 공사를 무사히 마쳤다. 상가ㆍ건물을 지으며 노하우를 익힌 뒤, 아파트 분야로 막 진출하려던 시점이었다. 정부는 우량회사에서 채권을 발행하도록 독려했고, 정부의 방침에 따랐다. 이런 와중에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3%하던 금리는 30%까지 폭등했다. 아무리 우량기업이라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부도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건설사의 부채를 대구CC에서 떠안았고, 10년간 초긴축이라는 시련의 시기를 또 보내야 했다.)

▶'들고양이들 보아라'

"명문 골프장의 비결은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대구CC는 지을 때부터 소나무 등을 무작정 뽑지 않고 재배치하며 공사를 하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덕분에 봄(생강, 산수유, 매화, 벚꽃, 목단, 목련) 여름(수국, 백일홍) 가을(맥문동, 코스모스, 연꽃) 겨울(눈, 피라 칸사스 열매) 철마다 색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우 회장은 대구CC를 명문 골프장의 반열에 올린 것은 '깨끗함과 조화, 철저한 관리'라고 말했다. 티박스에 올라섰을 때 느끼는 깜짝 놀랄만한 조경과 정리된 환경은 대구CC의 최대 자랑인 셈이다.

"그린 스피드가 마치 경기용처럼 빨라 골프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인데요. 공을 좀 치는 동호인들에게는 이처럼 매력적인 것은 없습니다. 또 클럽하우스 음식의 경우 집사람이 직접 챙기면서 최고의 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문 대구CC에 이변(?)이 생겼다. 새의 깃털이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들고양이들에게 잡아먹힌 새의 흔적이었다. 아무리 미물이지만 무작정 죽이거나 쫓을 수 없어서 경고문을 붙이기로 했다. 들고양이들이 다니는 깊숙한 우범지역(?)에 붙은 경고문을 공 찾으러 들어간 내방객이 스마트폰으로 찍어 세상에 알렸다. 내용은 이렇다.

'들고양이들 보아라. 경내의 조류를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있는 너희들은 지금 즉시 살상을 중지하고 이곳을 떠나라. 일주일의 시간을 줄 터이니, 만약 스스로 떠나지 않는다면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의 모든 책임은 너희가 져야 한다.'

경고문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유야 어쨌든 그 이후 새 깃털은 더 이상 날리지 않았다. 최재목 영남대 교수(석ㆍ박사과정 지도교수)는 "들고양이들에게 경고문을 전달한다는 발상은 시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며 시를 써볼 것을 재촉했다. 이렇게 자의반타의반 고교시절 꿈이었던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지난해 황금찬 선생님이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는데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전화를 드렸더니, '우기정'이란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올라가서 찾아뵙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를 계기로 그동안 써 두었던 시를 모아 시집 '세상은 따뜻하다(시와 문학)'를 출간했습니다." 우회장은 이미 2015년 시와 시학지에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무궁화장 + 청룡장의 비밀

우 회장은 골프장 경영자로 바쁜 일정을 보내는 와중에 '우리나라가 서 있는 자리? 우리의 에토스,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풍류'와 '화랑도'를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척인 우동기 당시 영남대 총장의 소개로 최재목 교수를 만났고, "젊은이들이 잘 하지 않는 분야"라며 흔쾌히 승낙을 받았다. 범부 김정설이 연구대상이었다.

(범부 선생은 김동리의 큰형으로 계림학숙(영남대 전신)의 초대 학장을 지냈고 해방 전ㆍ후 우리나라 최고의 천재로 불린 인물이다. 범부 선생은 해방 이후 제대로 된 신생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윤리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효'이며, 예로부터 '화랑도'와 '풍류' 정신이 '효'를 바탕으로 이어져 왔고 이것이 우리 국민의 DNA 속에 들어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우 회장은 10년에 걸쳐 학업을 지속하며 '조선시대의 효(석사논문)'와 '범부 김정설의 국민윤리론(박사논문)'을 완성했다. 영남대 인기 교양강좌 '스무살의 인문학'이 정부지원 중단으로 폐강될 위기에 처하자 1억원을 선뜻 기부한 것도 철학과 인문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눔과 봉사는 1977년 라이온스 활동을 시작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한국라이온스 연합회장을 역임하고, 국제라이온스 이사(집행위원)를 맡으면서 2007년 '국제라이온스 동양 및 동아시아대회'를 대구스타디움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4만명(1인당 등록비 120달러)이 참여했으니, 경제적 파급효과와 국위선양의 공로가 컸다.

최고 등급의 국민훈장인 무궁화장 수훈에는 또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한몫 했다. 국제라이온스 집행위원으로 일하면서 국제협회에서 60억원을 지원받고, 한국라이온스 회원들이 20억원을 모금해 평양에 76병상 규모 안과병원을 지어준 것이다. 2005년 6월 18일 준공식에는 대구에서 35명의 회원이 평양을 방문해 함께 기뻐했다.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게 된 것도 라이온스 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스페셜올림픽 선수들은 의사표현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라이온스 시력우선사업(sight first)의 도움을 받아 미리 시력조사를 거쳐 치료와 안경 등을 맞춘 뒤 경기를 진행하게 되는데요. 이런 인연으로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회장을 맡게 되고,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유치 및 준비위원장을 지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지원하는 오스트리아와의 경쟁에서 승리했을 때는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우 회장은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회장직은 일본 나가노 대회의 감동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시상식에서 한 선수가 자신이 받은 금메달을 동메달과 바꿔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동메달을 딴 선수가 시합 전에 꼭 금메달을 따서 어머니께 드리고 싶다고 했다는 게 이유였는데요. 금메달은 저 선수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너무 순수하고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6년 간 회장을 맡으며 많은 사비가 들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우 회장은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열심히 하고 미래를 향해 가는 것, 이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다음 시집을 내고, 생각한 것을 책으로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아버지의 호를 딴 송암배 골프대회가 한국여자골프를 세계 최고로 올라서게 하는 데 공헌한 것이 자랑스럽다면서, 한국남자골프 역시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설 수 있도록 꿈나무를 계속 키우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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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올림픽이란?

스포츠를 통해 자폐ㆍ다운증후군 등 지적발달장애인들이 사회 적응력을 기르고 신체적 능력을 향상시켜 인간으로서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누이동생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 여사가 1962년 처음 시작함.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주최 동ㆍ하계올림픽과 함께 '올림픽'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대회임.

우기정 회장이 민간인 최초로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훈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우기정 회장이 민간인 최초로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훈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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