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흥]여름밤 피서지, 우리 동네 못(池)

예전엔 미처 몰랐다, 이렇게 고마운 줄
열대야 닥치고 알았다, 보물단지 곁에 있는 줄

#1. (간밤에 꿈을 꿨다. 정원도 딸린 한옥집이 소담하게 멋진데 옆에 큰물이 있다. 그런데 이게 내 집이다. 내 집이라는 건 '오랜 꿈 경험'으로 안다. 꿈이 너무 좋아 '로또'를 떠올렸지만 잠시, '오랜 꽝 경험'을 잊지 않고 해몽사이트 뒤적인다. 긴가민가하다. '매력적인 걸 마주하게 되는데 그게 위험할지도 모른다'나 뭐라나. 왜 이런 꿈을 꾼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젯밤에 여길 다녀와선 그런거다. 그래, 그냥 꿈이다.)

대구시민들의 대표 관광명소인 수성못에서는 매일 밤 화려한 음악분수 쇼가 펼쳐져,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대구시민들의 대표 관광명소인 수성못에서는 매일 밤 화려한 음악분수 쇼가 펼쳐져,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노키즈존 아닙니다. 뛰어다녀도 됩니다. 애완견 좋습니다. 난폭한 성미라면 입마개 씌워주세요. 배달 음식 어느 정도 허용합니다. 단, 쓰레기는 되가져 가세요. 담배는 안 됩니다. 자, 어서들 오세요.'

라는 '고객안내문'이 없을 뿐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드는 아주 큰 연회장, '우리 동네 못(池)'이다. 고마운 줄은 진작 알았지만 한여름 밤 일급 피서지인줄은 열대야 맞고서야 알았다. 모기, 깔따구 등 날벌레에 내성이 어느 정도 있다면 자리 깔고 퍼져 눕고 싶다.

대구에도 둘레 1km가 넘는 못, 아니 '저수지'라 부르는 게 보다 적확한 곳이 꽤나 있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이 막바지였다. 학교, 아파트, 각종 부대시설 용도로 바뀌었다. 수성못, 성당못, 도원지 등은 어렵사리 살아남은 효자들인 셈이다.

※못이냐, 호수냐? 사전적으로는 인위적으로 팠는데 깊이가 깊으면 호수(湖), 햇빛이 바닥까지 닿을 정도면 못(池)이라 구분한다. 수력발전용으로 물을 모아둔 안동호, 농업용수 용도였던 수성못으로 구분하면 편하다. 저수지가 태생적 기능을 잃고 쉼터로 거듭난 만큼 대구의 큰 웅덩이들은 그래서 죄다 '못'이라 불린다.

◆농업용수의 변신

#2. (학교 다닐 때 들은 얘긴데 말야. 커플들이 헤어지면 꼭 여기다 반지를 던져 버렸대. 그래서 못이 말라버릴 즈음에 바닥을 슥 훑으면 반지가 꽤 나올 거래. 근데 저 물이 마르기나 하나. 일부러 빼지 않는 이상 확인할 길이 없잖아. 그나저나 금은방 가서 팔면 되지 그걸 왜 던져버린 걸까. 막상 반지 팔아서 밤새 술마셔놓고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순 없어서 못에다 던졌다고 하는 거 아닐까.)

수성못에서 저녁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수성못에서 저녁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고인 물은 썩는다'는 속담 탓에 못을 떠올리면 악취부터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못은 고여있는 것처럼 보일 뿐 인근 지천에서 물을 받고 또 다른 지천으로 흐르도록 설계돼 있다. 수성못만 하더라도 가창에서 내려온 물이 수성못에 고여있다 범어천으로 빠져나간다. 범어천이 워낙 자주 말라 있어 순환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농업용수이던 못은 논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휴식터로 변신한다. 주변에 벤치가 놓이고, 운동기구가 놓이고, 커피자판기가 생기더니 데크길로 바뀌고, 카페가 들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열대야로 더 부각됐을 뿐 못의 인기는 사계절 지속된다. 우선 수성못은 지산범물을 휘감은 용지봉 등 앞산 자락이 대덕산으로 이어지기 전 한 숨 쉬어가는 지점에 있다. 청량감의 비결이다. 주변을 둘러싼 데크길과 흙길은 둘레 2km로 거리 측정도 용이해 조깅마니아들의 인기코스다. 실제 수성못은 올해로 14회째인 트라이애슬론대회의 경기 코스다. 그러나 한여름밤 조깅족들에겐 순순히 달리는 길을 내주지 않는다. 애견인들을 피해 달려야하는 난코스다.

대구 성당못에 불 밝힌 부용정 정자와 화려한 두류타워가 어울려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대구 성당못에 불 밝힌 부용정 정자와 화려한 두류타워가 어울려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시니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온 성당못은 달서구 성당동, 본리동의 터줏대감이다. 인근 주민 전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나 싶을 정도로 시민들이 끊임없이 걷고 달린다. 수성못에 비해 상가가 적어 자동차 배기가스, 소음은 덜하다.

해발고도 139미터의 금봉산, 팥죽땀 흘리며 올랐는데 고작 139미터라니, 봉우리를 정점으로 두류공원을 끼고 있는데다 대구문화예술회관, 두류도서관, 운동장, 수영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스포츠시설과 세트로 묶여 둘레길로 삼아도 좋다.

월배지역의 팽창과 함께 주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도원지, 월광수변공원은 후발주자임에도 필살기를 갖고 있다. 산에 접한 도원지는 청룡산과 삼필봉 사이 골짜기에서 불어나오는 산바람이 묘하다. 도원지 서쪽에서 420봉까지는 30분 남짓으로 왕복 1시간가량 산행도 가능하다. 요즘은 어디서나 한다는 음악분수를 2000년대 초반 대구에서 맨 처음 시작했다.

도원지(월광수변공원)에서 쉬고 있는 시민들이 음악분수쇼를 감상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도원지(월광수변공원)에서 쉬고 있는 시민들이 음악분수쇼를 감상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발전용수의 변신

안동호는 한국수력원자력이 전력생산용으로 가둬둔 물이지만 2010년을 전후로 일대 변혁을 맞게 된다. 안동댐과 보조댐 사이에 안동의 대표 명물이 된 월영교가 놓이면서다. (달빛이 비치는 다리라는 월영교를 월령교라 부르고 적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일본 애니메이션 월령공주와 연결해서 월령교라 부르는 건지, 달의 영혼이 깃든 다리라는 뜻으로 확대 풀이한 건지 모르겠으나 명확한 오기다. 월영교의 영(映)은 '비출 영'이다.)

안동댐과 보조댐 사이에 놓인 월영교의 야경. 안동시청 제공
안동댐과 보조댐 사이에 놓인 월영교의 야경. 안동시청 제공

길이 400미터가 채 안되는 월영교가 2003년 놓이고, 2013년 끝자락에 호반나들이길이 호숫가에 붙어 열리자 어느 순간 관광객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제 월영교는 안동역에 서울말 쓰는 사람들은 물론 외국어 쓰는 이들이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됐다. 안동시민들은 '알쓸신잡(케이블채널 tvN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의 힘'이라고들 한다.

월영교에는 밤이 깊어도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지만, 법흥교까지 편도 2km에 이르는 호반나들이길은 빼어난 공기질과 음이온량을 자랑함에도, 상당량의 CCTV와 LED조명등으로 방범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밤 9시면 이용객이 거의 없다. 인구 16만명의 도시민들이 살고 있는 시내중심가와 다소 떨어져있고, 낙동강변이 열대야 피서지 우선순위에 있는 게 이유로 추측된다.

◆경북 주요도시에도 큰 못은 효자

구미 금오지는 사람으로 치면 모든 걸 갖춘 사람, 간단히 말해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다. 금오산을 끼고 있고, 산 안에 폭포가 있고 그 옆에 놀이공원도 있다. 수성못보다 뭔가 한 발씩 앞선 느낌이다. 수성못 근처에 앞산이 있지만 도로 몇 개 건너야 하고, 앞산에는 폭포가 없어 두산오거리에 인공폭포가 있어서랄까. 물론 금오산 대혜폭포는 지금과 같은 갈수기에는 볼 수 없다.

구미 금오지의 야경. 구미시청 제공
구미 금오지의 야경. 구미시청 제공

경산에는 남매지가 있다. 경산시청 바로 맞은편이기도 하지만 영남대 기숙사와 붙어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워낙 커서 그렇다. 산책로 한 바퀴가 2.5㎞다. 대구 도심 못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아 속도를 높여 달리는 조깅족들이 많다. 연꽃 식물원, 수생 식물원 등 정원처럼 물 위를 꾸며뒀다. 실로, 장관이다.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못 중앙까지 데크를 설치했다. 고맙기도 해라, 파격적인 시도지만 야간에는 조명이 눈부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맹점이다.

경산 반곡지와 김천 연화지는 사진 좀 찍는다는 이들이라면 물반, 고기반 명당을 찾는 강태공의 심정으로 앞다퉈 찾는 곳이다.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도 일품이라 뜻밖의 모델이 돼 주기도 한다. 아, 경주 보문호는 굳이 말할 게 없다. 엄지척.

반곡지는 인기 드라마
반곡지는 인기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촬영지로 사진작가들의 출사지로 명성을 얻고 잇다.반곡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신도시들의 필수옵션, 호수

수도권의 신도시들은 도시계획의 기본으로 호수를 설계에 넣어뒀다. 호수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광장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집결은 하되 단결대오를 형성해 뭔가를 주장하는 곳으로 활용되는 건 아니다. 주로 힐링 공간이다.

일산호수공원의 야경. 고양시청 제공
일산호수공원의 야경. 고양시청 제공

대표적인 호수가 일산호수공원이다. 걷고, 달리고, 아이와 함께 걷고, 달리고, 애완견을 데리고 걷고, 달린다.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이 주변에 많이 산다. 글이 잘 써진다고들 하는데 과학적, 통계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가 없어서 명확하진 않으나 기분 탓으로 돌리기에도 뭔가 이유가 있어 보여 빚을 내서라도 호숫가 주변으로 집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다. 좋은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는 법이라지.

호수를 끼면 집값 프리미엄도 있다고 한다. 이른바 '호수조망권' 프리미엄이 붙는다. 부동산업계에 물었더니 매우 과학적이며 통계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라고 한다.

'숲세권 아니죠, 물세권이죠', '잘 가꾼 호수 하나 지하철역 맞먹는다' 등의 마케팅 구호가 먹힐 정도라니. 단, 벌레가 많다는 건 호수 주변 아파트 주민들만의 비밀이라고 했다. 아파트 주민들끼리 집값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쉬쉬하고 있다는 걸 그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 모두가 안다는 뜻이었다.

최근 조성된 경북신도시도 호민지라는 큰 못이 있었지만 입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 인공연못을 만들었다. '세심지'라는 이름의 연못이다. 물론 호민지도 수변공원으로 바꿨다. 산책로, 전망대 등을 설치해 주민들이 자연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해가 떠있을 때까지 만이다. 해가 지고 나면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신도시가 팽창하면 대구의 수성못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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