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4>가장 격렬했던 영해만세운동

일경·헌병 감당 안 돼 대구 군대까지 출동
3천명 육박, 총격에 8명 순국 16명 부상
영덕군 1919년 만세 관련 489명 체포 도내 최다

영덕군 영해면 현재의 영해만세시장으로 향하는 로터리에 세워진 3·18만세의거 기념탑. 당시 이곳은 논밭이었지만, 현재는 영해면의 최대 번화가가 됐다. 김대호 기자
영덕군 영해면 현재의 영해만세시장으로 향하는 로터리에 세워진 3·18만세의거 기념탑. 당시 이곳은 논밭이었지만, 현재는 영해면의 최대 번화가가 됐다. 김대호 기자

영덕군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은 '영덕 만세운동'이 아닌 당시 영덕군 영해면에서 벌어진 '영해3·18독립만세운동'으로 통한다.

영해 만세운동은 서울보다 17일 정도 늦었지만, 3천명에 가까운 시위참여 규모도 만만치 않은 데다 특히 영해지역에서는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격렬한 시위 양상이 벌어졌다. 총검으로 무장했던 주재소 일경으로는 감당이 안 돼 울진 평해와 포항의 헌병대까지 출동했고, 결국 대구의 일본 군대까지 시위해산에 동원됐다. 맨손으로 일제의 총검에 저항한 시위 군중 8명이 숨지고 16명이 부상당했다.

◆만세 관련 체포자 도내 최다

일본경찰이 기록한 영해만세운동 관련 자료. 군중 1천 명이 모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경찰이 기록한 영해만세운동 관련 자료. 군중 1천 명이 모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1919년은 경북 북부·동해안을 무대로 항일의병투쟁을 벌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이 1908년 겨울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계곡에서 허무하게 스러진 지 11년 된 해였다. 어쩌면 영해만세의거는 다시 타오른 항일구국의 횃불이었다.

영해애향동지회에서 발간한 '영해3·18독립만세의거사'에 따르면 1919년 말 당시 일제 조선헌병대사령부 보고서를 분석해 보니 그해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사람이 당시 강원도에 속해 있던 울진을 포함해 총 2천133명이었다. 이들 중 영덕 지역이 총 489명으로 도내(대구 포함)에서 단연 최다였다. 영덕의 체포자 중에는 여성도 4명이나 있었다. 영덕의 뒤를 이어 안동이 392, 대구 297, 의성 190명 순이었다.

영덕군 광복회 임만진(83) 전 회장은 "영덕군 전체에서 3·18만세운동과 관련해 숨지거나 재판을 받거나, 일경에 의해 구금된 사람 등 크고 작은 고초를 겪어 영덕의 '독립의거탑'에 이름을 올린 유공자들이 모두 240명이며 만세의거로 훈장과 포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는 163명이다"며 "아직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처럼 영덕의 만세의거 관련 체포자나 기소자, 그리고 국가유공자가 많은 것은 영해만세의거로 대표되는 영덕의 만세운동이 그만큼 격렬했었다는 반증이다.

물론 영해 이외에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 영덕면 남정면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지만, 단연 영덕 지역 만세운동의 핵심은 영해만세운동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3월 18일 경북 동해안 북부권의 최대 시장인 영해 장날 정오 사람들은 태극기를 품에 안고 가슴 뛰는 거사를 위해 모여들었다. 뜻을 함께한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 이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눴다. 오후 1시쯤 영해주재소(현재 영해파출소 자리) 앞에서 만세의 첫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한동안 이어지던 평화로운 시위에 영해주재소 일본인 순사부장 스즈키가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하고 이어 대형 태극기를 뺏으려 달려들었다. 흥분한 만세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들이닥쳐 집기를 부수고 순사들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았다. 또한 주재소의 무기를 모두 탈취해 파기해 버렸다.

소식을 접한 영덕경찰서에서 일경이 달려와 다시 군중의 해산을 시도하지만, 시위 군중은 이들을 제압하고 무기를 뺏고 감금했다. 시위 군중은 공립보통학교, 심상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를 응징했다.

3월 18일 오후 정규하를 비롯한 영해만세시위 지도부와 군중은 병곡면까지 진출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시위대는 3월 18일 영해만세시위를 진압하러 왔던 영덕경찰서장과 일경을 축산면까지 추격해 붙잡아 구타하고 구금하기도 했다.

특히 3월 19일 영해만세의거에 참가하지 못했던 창수면 주민들도 격렬한 만세의거를 일으켰다. 경찰 주재소를 습격해 문서와 서류 그리고 심지어 마당에 있던 나무까지도 도끼로 찍어 없애버렸다.

3월 18일과 19일 만세시위군중은 사실상 영해면과 인근 병곡·창수·축산 등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일제는 결국 대구로부터 군대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유혈진압작전을 벌였다.

영해만세운동 당시 시위 군중들에게 파괴당했던 일제 경찰 영해주재소 자리. 현재는 영해파출소가 그 자리를 쓰고 있다. 김대호 기자
영해만세운동 당시 시위 군중들에게 파괴당했던 일제 경찰 영해주재소 자리. 현재는 영해파출소가 그 자리를 쓰고 있다. 김대호 기자

◆기독교·유림 "영해장날 거사 한뜻"

영해만세운동의 단초는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김세영이 경성에서 거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발길을 돌려 영덕으로 돌아오면서부터이다. 김세영은 마침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평양신학교도 휴교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3월 12일 영덕으로 돌아온 그는 구세군 관계자 권태원을 만나 이러한 뜻을 논의하고 영해와 영덕면 병곡면 창수면 지품면 등에 사람을 보내 세를 규합한다. 이어 영덕 북부권의 대표적인 문중인 '권, 남, 박, 백, 이' 등 이른바 5대 성씨 유림들과도 접촉해 기독교·유림 등이 서로 일제의 침탈에 맞서 힘을 합쳐 떨쳐 일어선 경성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뜻을 모은다.

하지만 당시 유림 측에서도 이미 전국적인 만세의거를 위해 움직인 듯하다. 고종의 국장이 선포되자 유림은 대표를 서울로 보내 봉도단(奉悼團·임금의 상여를 메기 위한 조직)에 참여시키고 그 지역에서 청정한 장소를 정해 상투를 풀고 북쪽을 향해 곡(哭)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영해 지역 유림들 역시 봉도단을 통해 경성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이와 관련된 움직임을 계획하려 했다. 영해 만세의거에 앞서 당시 영해에서 신망이 두터운 유림인사들인 남효직과 남여명이 김세영과 거사를 논의 중이던 권태원과 정규하와 접촉했다.

당초 영덕군의 군청 소재지인 영덕면이 거사 장사로 논의되기도 했지만, 영해면 송천교회 조사(助事·목사를 도와 전도와 교회일을 모는 사람) 정규하가 영해장을 제안해 그대로 실행됐다.

영해가 거사 장소가 된 배경에는 19세기 말까지 영해가 인근 8개 면(현재 영덕군 대부분)을 장악한 중심고을이었고, 1914년 형식적으로는 영덕군 밑으로 영해군이 위상이 격하되기는 했지만, 당시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남쪽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였다.

거리상으로도 영해에서 영덕까지는 16㎞, 병곡과 창수에서는 20~30㎞이다. 유림들의 참여가 절실했던 상황이나 경북 동해안 최대인 영해장날인 점을 고려하면 영해를 거사지로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고 많은 조선 민중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반일정서와 상실감 겹쳐 폭발

영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 4개 면의 만세의거가 다른 지역보다 더 격렬했던 이유는 영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영덕지역 향토사학자 이완섭(57) 전 군의원의 설명이다.

첫째는 뿌리깊은 배일(排日)감정이다. 이 지역이 삼국시대부터 왜구들에 의해 노략질을 당했으며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더욱 도가 세졌고 백성들이 대거 살해당하기도 했다. 구한말의 신돌석 장군의 의병진을 탄압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과의 악연은 이어졌다.

다음으로 영해지역의 저항정신이다. 영해는 낙동정맥에 의해 서쪽과는 고립된 지역으로 귀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다시 말해 똑똑하지만, 체제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많은 곳이다. 1840년 석전제 제관 참여를 둘러싸고 기존의 유림 즉 구향(舊鄕)과 서얼차별 폐지로 인한 신분상승을 주도하였던 서얼 출신들인 신향(新鄕)이 상소 대결까지 벌였던 영해향전(鄕戰)과 최초의 동학혁명인 1871년 영해 신미년 동학전쟁 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여기에 일제의 농민들에 대한 수탈정책도 민심을 자극했다. 면 단위 행정개편을 통해 농민들에게 뽕나무 묘목이나 비료를 강제로 사게 하고 논밭 그리고 집 등을 도로부지로 무단 편입시키는 기부를 강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경성과 대구 등에선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면 영해만세운동에선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많았다는 점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이 전 의원은 "가장 결정적이었던 요인은 영해사람들의 상실감을 들 수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손에 넣고 난 4년 뒤인 1914년 영해를 영덕군에 포함시켰다. 영덕군 영덕면에는 경찰과 검찰 등 일제의 압제 기관을 배치했다. 구한말까지 영해는 중심지로 자부해 왔지만, 단번에 위치가 역전돼 버린 것이다. 영해를 중심으로 한 북부 4개 면의 자존심을 일제는 철저히 뭉개버린 것이다"고 했다.

<표>1919년 영덕지역 만세운동 전개 상황

3월 18일 영해면 2천여 명, 병곡면 400여 명

3월 19일 영해면 연속 시위, 창수면 400여 명

3월 21일 지품면 60여 명

4월 4일 장사면 17명

※참고자료
영덕독립운동사
영해3·18독립만세의거사
영덕군지, 영해면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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