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3도 창의군 대장 왕산 허위-구미시 왕산 허위선생 기리기 사업(10)

구미시 임은동에 자리한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구미시는 허위 선생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9월 28일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구미시 임은동에 자리한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구미시는 허위 선생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9월 28일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의병대장 왕산 허위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허위는 친필로 글을 남겼다.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는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

자신은 비록 세상을 떠나지만 조국의 처지가 이러하매, 너희 형제들은 내 뜻을 따라 조국독립투쟁에 매진하라는 당부였다.

그의 당부대로 허위의 형제와 자손들은 한결같이 독립투사의 길을 걸었다.

구미시는 허위 선생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임은동에 선생의 기념관을 건립하고, 생가터는 기념공원으로 조성했다. 또 임은동 도로를 '왕산로'로 정하고 지난해부터는 허위 선생을 기리는 글짓기 대회를 열고 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구미 산동면 물빛공원 내에 왕산광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13도 창의군 대장 왕산 허위 스토리텔링 마지막회에서는 구미시의 허위 선생 기리기 사업들을 소개하고 성리학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해외로 뿔뿔이 흩어진 자손들
허위의 조카인 허형식을 비롯해 많은 후손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를 내다보고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는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했다.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자녀 4남 2녀를 데리고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사촌들도 뒤를 따랐다. 이 때문에 자손들이 해외에 뿔뿔이 흩어져 어려운 생활을 했다.

허위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의 기념관이 들어선 구미시 임은동의 임은(林隱)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금오산이 낙동강을 향해 뻗어내린 마지막 자락이다. 인근 상모동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도 있다.

구미국가산업1단지 남쪽에 위치한 임은동은 이제 옛 모습이 간데없다. 낙동강과 끊임없이 오가는 대형 트럭 사이로 임은이라는 멋스러운 이름은 헤아릴 길이 없다. 즐비했을 고가들은 남은 것이 하나 없다.

의병장 허위의 자취도 찾을 수 없다.

구미시는 허위 선생을 기리고자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구미 임은동에는 허위 선생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9월 28일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이 개관됐다. 허위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나라 사랑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됐다.

기념관은 허위 선생이 유년시절 또래들과 어울려 호연지기를 기르고 병정놀이를 하던 임은 마을 앞산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9천851㎡ 부지에 건축 연면적 1천950㎡,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다. 기념관에는 전시실과 시청각실, 성인열람 70석, 아동열람 54석 총 124석의 도서관 등 첨단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관람료 및 이용료는 무료이다. 연간 관람객이 5천600여 명에 이른다.

기념관을 마주 보는 곳에는 왕산 허위기념공원이 2007년 11월 조성됐다. 이곳은 허위 선생이 태어난 생가터이지만 현재는 1천990㎡의 부지에 허위의 일대기를 새긴 왕산의 벽, 높이 3m의 동상, 인물상, 부조관, 추모관, 조형물과 잔디광장 등 휴게시설이 들어서 있다.

허위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또 여기서 구국(救國)의 높은 뜻을 세웠다.

지난해부터는 허위의 호국정신과 숭고한 나라 사랑을 후세들에게 널리 전승시키기 위해 전국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으로 들어서는 도로 입구에는 왕산초등학교가 건립돼 있다. 왕산초등학교는 2007년 3월 개교해 전교생이 850명에 이른다.

이태운 왕산초교 교장은 "구한말 국권회복에 투신한 의병장인 허위 선생의 고향인 이곳에 개교해 허위의 애국정신이 깃든 학교"라며 "허위 선생의 호국정신을 이어받아 전국인성 우수학교로 바른 인성을 지닌 자랑스러운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허위 선생 집안 3대 13명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한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구미국가산업4단지 확장단지 내 물빛공원으로 확정된 공원에는 가로 8m, 세로 4m, 높이 1.9m의 조형물이 들어선다. 허위와 허훈, 허겸의 동상이 앞에 서고 그 뒤로 허형, 허필, 허종, 허학, 허영, 허준, 허국, 허발, 허규, 허형식 등의 흉상이 배치된다.

◆독립운동의 토대가 된 성리학
성리학은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 성리학(性理學)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해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했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유학이 어떻게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의아해 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허위는 성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유학자들은 허위와 같이 항일전쟁을 통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다른 유학자들은 파리장서운동(巴里藏書運動)처럼 장서운동에 나서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 유학자는 조선 후기에 근기(近畿) 지방에서 성호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호학파(星湖學派)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근기학파 또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라고도 한다.

이익은 이황(李滉)의 성리학적 입장을 받아들였으나 허목(許穆), 유형원(柳馨遠) 등의 학문경향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학문체계를 이룩했다. 이익의 학문과 사상은 후학들에게 이어졌는데, 그의 후손 가운데는 경제학을 연구한 이만휴와 천문학과 문학을 연구한 이용후, 경학과 사학 등의 이가환, 지리학의 이중환이 잘 알려져 있다. 성호학맥을 이어받은 영남 지역 선비들 가운데 겸산 김정기(김수희 경북지방경찰청 차장 조부) 선생을 비롯한 14인은 파리장서 운동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여기서는 파리장서 운동에 대해서 살펴본다.

유교계는 3·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획책하다가 발각됐다. 1919년 기독계와 불교계가 주동한 가운데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유교계는 대대적인 장서운동을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이것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이다. 파리장서에는 김정기, 박정선, 허평, 박상윤, 손상현, 이학교, 안효진, 박상윤 등 14인이 소눌 노상직과 함께 조선 독립을 탄원하는 유림의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이밖에 137명의 유림 대표가 전문 2천 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이 장서는 심산 김창숙이 짚신으로 엮어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져갔다. 임시정부는 다시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해 한문 원본과 같이 3천부를 인쇄했다.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면우 곽종석을 비롯한 수많은 유림이 체포되고 투옥됐다.

유림이 장서운동을 일으킨 데에는 독립선언서에 왕조의 복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서명하는 것은 한국 유림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봐서다. 다른 하나는 신학문을 배우며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은 수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항일 의병운동의 무장투쟁으로, 파리장서 등 문장투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한국수자원공사가 허위 선생 집안 3대 13명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자 구미국가산업단지 4공단 확장단지 내 물빛공원에 조성할 기념공원과 조형물.
한국수자원공사가 허위 선생 집안 3대 13명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자 구미국가산업단지 4공단 확장단지 내 물빛공원에 조성할 기념공원과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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