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8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김길영 '노병의 증언'

노병의 증언 / 김길영

이 글은 예비역 하사 이규락의 6.25전쟁 참전기參戰記이다. 필자에게 수차례 들려준 이야기를 종합하여 노병의 증언이란 제목을 붙이고 글을 완성해서 그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연락이 끊겼다. 6.25전쟁 발발 65년 만에 '판문점선언'으로 종전이 눈앞에 온듯하다. 전쟁의 참상이 어떠했는지 이 시점에 알리고 싶다.

군 입대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경주공업중학교 3학년 때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앙학련회 간부들이 내려와 학련회 중심으로 학도병 입영을 독려했다. 나는 학급 장이었고 그 땐 학생들도 좌우로 갈라져 갈등을 빚을 때였다. 내가 학도병을 지원하지 않고 징집명령에 따라 입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서 학도병으로 입영한 경주지역 학생들이 안강전투에 참전하여 참패를 당했다. 군인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시상황이 워낙 다급한 나머지 사격연습 몇 번 시켜서 안강전투에 투입시켰던 것이다.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들이 안강전투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50828. 나는 할머니를 비롯한 부모형제, 그리고 신혼의 아내와 헤어져 집결지인 경주향교로 갔다. 경주향교강당에는 경주중학생과 경주공업중학생, 경주문화중학생 등, 수십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얼핏 보면 학도병들의 출정식 같았다. 이때 징집에 응해서 작별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사지로 가는 마지막 인사나 다름없었다. 그러기에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 모두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 산을 바라만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먹밥 한 덩이씩 받아먹고 트럭에 분승하여 대구로 갔다. 초행길인 대구는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서 마치 전쟁터로 가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결지가 대구남산초등학교였다. 대부분 학생들이었는데, 모인 숫자가 수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점호를 마친 후에 분산 배치되었다. 경주에서 징집되어 온 우리들은 동인로터리 부근에 있는 제사공장(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가다구라'제사공장)에 수용되었다. 그곳이 임시 훈련소였다. 군대 조직을 편성하고 내무반도 배치 받았다. 교복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보니 군인이 다된 기분이었다. 내무반에서 내무규율이나 근무요령 등 기초교육만 받고 밤 10시경 소등과 동시에 취침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기 때문이다. 전투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어느 전선에 배치될 것인지 두려움뿐이었다. 안강전투에서 맥없이 죽어간 학도병들처럼 나도 어느 산천에 묻힐지 모르는 불안감이 잠을 설치게 했다. 앞서 학도병으로 입대한 선배들의 많은 희생을 본 터라 내가 적군과 대치상황에서 총을 겨눠 적을 사살하고 내 목숨을 지켜낼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생각보다 밤은 길었다.

*

영천전투

50829. 아침 5시에 나는 기상나팔소리를 들었다. 한 번도 긴장상태에서 살아보지 않은 나는 흥분이 되어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신체검사를 받고 하루를 보냈다. 그 다음 날은 왼 종일 제식훈련만 받았다. 91일이 되어서야 봉덕동에 있던 국방군 6연대 사격장에서 M1소총과 실탄을 지급 받고 3일 동안 사격훈련을 받았다.

5094. 한 밤중에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부대는 대구역에서 기치를 탔다. 밤중에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기차선로를 확인해보았다. 복선이 아닌 걸로 봐서 경주방향으로 간다고 지레짐작했다. 하양역에서 내려 어느 과수원창고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아침밥을 먹었다.

5095. 하양에서 금호 소재지를 지나 일본군이 경비행기 저장방카로 사용하던 격납고에 분산 배치되었다. 하루 종일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틀간 꼼짝하지 않고 대기하면서 출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 너머 영천 쪽에서는 포탄 터지는 소리와 총성이 요란했다. 비가 오는 밤하늘엔 전폭기가 떠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5096일 새벽. 8사단 16연대는 영천시가지 탈환작전에 돌입했다. 시가지는 모두 피난을 떠난 뒤여서 인기척 없이 주인 잃은 개들만 총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우리는 첫 전투로 소규모의 적을 만나 접전 끝에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시내 곳곳에 인민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부상자들은 여기저기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저항하던 인민군 잔병들은 보현산 방향으로 물러갔다. 영천 시내를 탈환한 여세를 몰아 고경초등학교 뒷산에 집결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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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표지판을 매다

5097. 새벽 5, 보현산 쪽으로 북진한다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맡은 임무는 대공표지판을 매고 맨 앞에 전진하는 것이었다. 대공표지판이란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크기의 두 장의 천이다. 한 장은 흰색이고 또 한 장은 붉은 색 천을 똘똘 말아서 매고 다녔다. 통신병과 함께 중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임무로 아군 비행기가 공습할 때 재빨리 우리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작업이었다. 내가 맡은 일을 게을리 하면 자칫 아군에게 인명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아군의 최전방 공습을 꾀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나의 임무가 부대 맨 앞에 서는 위치라서 적에게 집중포화를 맞을 수도 있지만, 총검을 들고 싸우는 전투병 못지않게 내가 맡은 임무 또한 작전수행에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처음으로 격전을 치른 곳은 보현산 줄기의 작은 봉우리였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고, 가파른 비탈에서 격전이 벌어지다보니 쌍방 간 부상병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인민군병사 몇 명은 나무 둥치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퇴각하는 인민군 잔병들도 부상병들을 돌보지 못하고 달아나기 바빴다. 저들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전우애를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석양녘에 고지를 탈환하고 산 정상에서 점호를 해본 결과 중대병력이 소대 병력으로 줄어 있었다. 나는 고향 친구이자 경주중학생이던 박준영을 만났다. 둘이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느 형제가 이렇게 반갑겠나 싶었다. 같이 징집되어 같은 부대, 같은 소대에 편성된 전우들 중에 박준영을 포함한 몇 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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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병력이 소대병력으로

중대장과 소대장이 전사하고 이등상사가 중대장 임무를 대행했다. 첫날 전투에서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다. 조그만 봉우리 하나를 탈환하는데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입은 것이다. 이렇게 병력 손실을 입으면서 백두산, 압록강까지 전진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낮에 점령한 고지를 사수해야 했기 때문에 최정상을 기준으로 사방 4-50미터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21조로 야간보초를 섰다. 암호도 하달 받았다. 생면부지 병사와 한 조가 되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부대에 소속되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전우애 때문일 것이다. 참호 속에서 전우의 나이와 고향, 가족사까지 일일이 묻고 물어 모든 것을 알고 나선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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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 전투

영천 보현산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며칠 동안 보현산을 샅샅이 뒤져 인민군 잔당을 소탕한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진지를 구축하고 정밀수색 중에 능선 아래 골짜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총상을 입은 인민군 소좌 한 명과 사병 두 명이 발견 되었다. 소좌는 포로로 후송처리하고, 사병 두 명을 심문했더니 포천, 원주가 고향인 중학교 상급생이었다. 그들은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단기 훈련을 받고 전투에 참가한 학생들이었다. 두 사병은 포로로 처리하지 않고 부대에서 우리 병력처럼 데리고 다니다가 북진할 때 원주에서 귀가시켰다.

50911. 우리 8사단과 3사단의 연합작전으로 인민군 15사단 보병연대를 청송일대에서 섬멸했다. 아군은 단번에 15킬로미터를 북진했다. 이때가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기 며칠 전의 전황이었다.

50 917. 영천전투에서 기선을 잡은 8사단은 의성을 거쳐 안동 강변에서 야영을 했다. 그날은 추석 전날이었다. 달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고향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입대 며칠 전 결혼한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다. 몽달귀신을 면해주려고 부모님이 부랴부랴 맺어준 인연이었다.

야영을 마친 16연대는 영주. 풍기. 죽령까지 북진하여 인민군 주력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폈다. 8사단 3개 연대는 도송산 죽령-소백산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우리 16연대는 단양. 21연대는 예천지역에 각각 배치되었다.

50919. 밤에는 인민군 1개 사단 규모와 맞닥뜨렸다. 작전이 시작되자 치열한 공방전이 이틀이나 계속 되었다. 완강하게 버티던 적과 싸웠으나 우리의 인명 피해는 미미했다. 이때 생포된 인민군병사들만도 몇 백 명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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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된 인민군

안동에서 제천으로 그리고 원주로 가평으로 숨 가쁘게 북진하는 동안 큰 전투는 없었다. 적의 꽁무니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쫓고 쫓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서울성동중학교에 도착한 8사단 전 병력은 4일간 재정비검열을 받았다. 내가 군에 입대 후 처음으로 소고기 맛을 보았고 술을 마셔봤다.

50928. 부대검열이 끝나고 작전수송차량에 승차 했다. 중부전선 동두천을 경유 철원에 입성하면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철원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약간 경사진 길이었다. 길 양편으로 띄엄띄엄 경주 봉황대 같은 봉우리마다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영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환영인파가 도열하듯 계속 늘어났다. 우리 부대는 의기양양하게 환영인파에 손 흔들어 답하면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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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평야 대 혈전

철원시가지 곳곳에는 방공호가 있었다. 상황이 급한 인민군 부대는 민간복장으로 갈아입고 위장하면서 우리를 환영하는 척했던 것이다. 철원시가지를 경유하면서 진격명령이 내려져 마침내 대 혈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마땅히 은폐할 곳이 없었다. 대평원에서 논두렁이나 밭고랑에 몸을 숨겼지만,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져 피아간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었다. 3대대장이 철원시내 작전 도중 도로에 매설된 지뢰 폭발로 전사하자 부대 병사들은 적개심에 불타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적군도 만만치 않게 대응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논두렁을 타고 공격하던 허경행 전우가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우리 부대는 전방 고지에 집중포화를 퍼붓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생포한 포로 중에는 적군의 사단군악대원 25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병사들은 모두 북한지역 중학생이었다. 내가 속한 부대는 철원 북방지역을 향해 돌진 했다. 임진강 발원지인 고암산을 넘어 마식령산맥 남단에 있는 이천伊川에 도착한 후 이틀간 휴식을 취했다. 중부전선은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승차이동이 불가능하여 오직 도보로 북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급품이 최전선에까지 도착하지를 못해 며칠씩 굶다보니 병사들은 지쳐 있었다. 수송용으로 끌고 다니던 소를 잡아 끼니를 때우는 비참한 광경도 벌어졌다. 채전 밭에서 무를 뽑아먹기도 하고, 산길 행군 중에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전쟁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아군이 북진을 거듭할 때 적군은 맞서 싸우기보다 장기 매복 작전에 들어갔다. 좀체 나타나 싸우고자하는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부대는 터진 봇물같이 돌진에 돌진을 거듭했다. 부대에 결손이 생기면 바로바로 병력을 보충해 주었다. 병력이 손실되고 보충되는 일이 잦다보니 누가 선임 병이고 누가 후임 병인지 헛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잠시 조용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처음 출발할 때 인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고향친구 박준영이 유일하게 내 옆을 지켜주었다.

* 국경선 초산

501016. 국경선 초산까지 어느 부대가 먼저 들어가느냐 내기하듯이 시간을 다투었다. 실제로 압록강 강물을 어느 부대가 먼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칠 것인가 내심 경쟁 중이었다. 평양을 왼편으로 끼고 대동강을 따라 승호. 심동. 강동을 거쳐 밤늦게 성천 강변에 있는 북한 인민학교에서 야영준비를 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여서 기습공격을 받을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지형이었다. 부대는 경비병을 배로 늘리고 기습공격에 대비했다. 밤 열시쯤에는 날씨가 몹시 추웠다. 폭격으로 파괴된 가옥 폐자재와 학교주변의 울타리를 뜯어와 운동장 대여섯 군데에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이 타오르면서 갑자기 동시다발로 폭발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일시에 야영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어느 모닥불에서는 5,6명이 목숨을 잃었고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넓은 운동장 전체가 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이 순간 경비병이 배치된 곳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적의 1개 중대는 부대가 야영하고 있는 진지를 향해 중화기와 따발총으로 공격해오고, 거기에 박격포 포탄이 떨어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사상자가 늘어났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적을 쫓아 나섰다. 패주하는 적을 추격했는데 그 소탕작전이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기습공격을 당한 인민군은 성천군 일대에서 사복으로 위장하고 동굴이나 빈 가옥에 숨어 있었다. 16연대는 도주하는 인민군 일당과 숨어 있는 패잔병들을 샅샅이 뒤져 35십여 명을 생포하여 상급사단으로 후송 조치하는데 성공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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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에 빠지다

한편 억류하고 있던 군관 몇 명을 심문한 결과, 지형적으로 국군이 이곳에서 야영할 것이라는 정보를 토대로 인민군 1개 중대 병력을 사복으로 갈아입혀 산속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주민으로 위장하고 우리 부대가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주민을 가장한 몇몇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고, 우리 부대를 향해 환영한다는 모양새를 보였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지 합니다." "쌍수 들어 환영합니다." 능청스럽게 외쳐댔다. 몇몇은 대한민국만세를 삼창까지 외치곤 천연덕스럽게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인민군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던 그들이 폭발물을 장치하리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영천전투에서 살아남아 2천리를 북상하던 전우들이 목숨을 많이 잃었다. 우리부대는 북진을 거듭하면서 감격에 도취되어 있었다. 전술전략도 허술했다. 항상 경험을 먼저하고 후회가 뒤따랐다. 패주하는 그들이 그런 묘책까지 쓸 줄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천의 참혹한 교훈을 깊이 새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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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 북진!

국군이 북진하면서 성천전투 다음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작전명령은 선발사단인 우리부대에게 중국과 접해 있는 국경선까지 북진할 것을 거듭 명령했다. 우리 8사단은 묘향산맥의 험준한 북창을 거쳐 맹산에 도착하고 고원지대인 덕천을 순차로 점령했다. 그 일대 잔당을 소탕하라는 작전에 돌입했다. 묘향산맥의 백산. 영원 등 깊은 골짜기 일대를 수색하면서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다. 교전 때마다 많은 전과를 올렸다. 험준한 고산지대에서 패주하는 적을 찾아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작전이 아닐 수 없었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 생목숨을 담보로 하는 싸움이다. 피아를 막론하고 먼저 발견한 쪽에서 승리하게 되어 있다. 쫓기는 자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휘계통이 무너져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기士氣가 떨어져 있으며, 각종 무기와 장비를 보급 받지 못한 약점이 있었다. 소탕작전은 4일 만에 종결짓고 우리부대는 평안남도 도경계를 넘어 청천강 상류 강변에 위치한 구장球場에 도착했다. 작전명령을 기다리며 보급품과 장비검열을 받았다. 전투 없는 휴식이 며칠간 지속되었다. 못다 잔 잠도 실컷 잤다. 생사를 넘나들기를 반복하다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머릿속에서는 죽은 동료가 눈에 아른거렸다. 바위틈에서 고개 내민 인민군 병사를 내가 먼저 발견하고 사살해버린 일들이 순간 스쳐갔다.

*

작전 하나

501113. 우리부대는 청천강 건너 북방으로 30킬로미터 지점에서 운산. 회천을 연결하는 방어선에 배치됐다. 이 전선이 바로 중공군을 격퇴하라는 방어선이었다. 진지 참호 속에서 적을 기다리던 중 작전하나가 떨어졌다. "부대원 중에 일본 말 할 줄 아는 사람은 일본 말을 하라."는 지시였다. 아마 중공군이 일본군을 겁낸다는 데서 나온 심리작전으로 생각했다. 당시 정황은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운산과 회천지역에 B26, B29폭격기 등 폭격기를 총 출동시켜 밤낮으로 중공군 남하지역을 연일 폭격했다. 참호 속에서 포탄이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본 나는 곧 전쟁은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쏟아 붓는 포탄에 살아남을 자가 있을까 싶었다. 벌써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전선은 아군의 집중 포화로 중공군 야간 공습이 1주일 정도 주춤했다.

501122. 우리 부대는 회천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때 부대의 목표는 중국과의 경계선인 초산까지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천에서 초산까지는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회천까지 가는 도중에 중공군의 공격이 있었다. 후방 여러 산골짜기에서 나팔소리, 북소리가 어우러져 어두운 장막을 깼다. 요란한 소리를 잠재우며 따발총소리가 따따따따, 따따따따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부대는 진격하지 못하고 묘향산 남단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 소대장 전사

소대장이 박격포를 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소대장 대신 선임상사가 전투를 지휘했지만 밤새도록 불안한 총알이 빗발쳤다. 먼동이 트자 아군과 적군이 구별되었다. 밤새 몇 명의 전사자가 생겼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날이 밝아오자 작전명령이 또 날아들었다.

"총알이 있는 대로 집중 사격하고 후퇴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령에 따라 총알을 다 쏟아 부었다. 총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새벽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중공군이 발뒤꿈치까지 다가오면서 따발총을 연신쏘아 댔다. 부상자가 생겨도 돌볼 겨를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의기양양하게 전진하며 콧노래 부르던 때가 엊그젠데, 날개 꺾인 새들처럼 기세가 꺾여 목숨하나 챙기는 데도 힘이 들었다. 나와 동행하던 전우가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사한 전우들은 북한 땅 어느 곳인가 뼈를 묻고 영혼들은 지금도 그 하늘 어디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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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참가

중공군은 피리를 불며 좇아오고 발걸음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평소에 걷던 걸음보다 느리고 목이 말랐다. 부대는 오열을 갖추지 못한 채 통일성마저 잃어버려 오합지졸이었다. 어딘가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도망치듯 쫓기다 보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나는 총을 메고 수류탄을 가슴에 달았지만 싸우는 병사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질서를 찾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인민군 패잔병과 십여 차례 교전했다. 적의 패잔병들은 아군의 퇴로에 매복했다가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쫓고 쫓기면서 한 전투는 끝났다. 우리는 잔여 인원을 규합하여 부대를 재편성했다. 뒤에서는 중공군이 따라오고 인민군은 퇴로마다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에 완전히 포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전상자를 교대로 업고 살얼음판 청천강을 건너 우리가 야영했던 구장球場까지 후퇴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재정비하고 있을 때 초산전투에서 패배한 6사단 잔여 병들이 10여 명씩 무리지어 포위망을 뚫고 도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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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해전술

5011월말, 대공세작전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폈다. 인해전술과 야간 기습 공격에 유엔군과 아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밤중에 중공군들이 불어대는 피리소리는 소름이 돋았다. 꼭 저승사자들이 문 밖에서 수군대는 소리 같았다. 총소리도 나지 않았고 대포소리도 없이 그냥 온몸이 굳어져 갔다. 눈만 끄먹거리던 전우들은 이젠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서로 마주보며 한숨을 내뱉는데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공격할 때는 졸음도 오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날따라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졸리고 배가 고팠다. 그 음습한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잠시 총성이 멎고 달이 밝았다. 초저녁에 잠잠 하던 전선 밤공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5리 길 되는 적진에서 나팔과 피리를 불고 북을 울리며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내가 전투에 참가한 이래로 처음 느껴보는 음산함이었다. 이내 장막을 깨고 따발총 소리가 밤공기를 흔들어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분위기에 억압되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귀청이 찢어질 듯이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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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쟁

50124. 맥아더 사령관이 "새로운 전쟁이 시작 되었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발표문에 따라 유엔군이 점령했던 평양에서 모두 철수하고 북진 중인 전군에 "12월 말까지 철수 하여 삼팔선에 재집결하라."는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50 125. 우리 8사단은 평북구장에서 춘천까지 장장 4백여 리를 철수했다. 철수 작전이 도보행군으로 남하기 시작한 것이다. 1개 중대 단위로 북한의 청년단원 2-30명이 동원되어 소 두세 마리에 보급품을 싣고 내려오는 행렬은 평안남도 회천을 거처 황해도 곡산. 강원도 이천. 철원. 갈말을 지났다. 도보로 22일 간이나 철수행군은 계속되었다.

50 1227. 춘천이 가까운 삼팔선상에 도착했다. 하루 평균 30킬로미터를 도보로 행군했다. 철수 도중에 인민군 패잔병과 10여 차례 교전도 했다. 철수하는 부대 뒤에는 중공군이 따라오고 인민군 패잔병이 앞을 막았다.

501231. 한국전선은 남북한이 다시 삼팔선상에서 대치했다. 이날 자정을 기해 1차적으로 중공군 11만 명, 인민군 6만 여명, 도합 17만 명의 병력으로 6.25 초기와 거의 같은 경로로 삼팔선 돌파작전을 개시해 왔다.

5114. 서울을 다시 그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른바 '1.4후퇴'라는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국군이 비참하게 서울을 내주는 치욕의 날이 되었다.

* 1.4후퇴

우리부대는 이 때 춘천 변두리에서 3일간 장비검열을 마쳤다. 손실된 병력도 충원되었다. 그리고 양구방면으로 약 20킬로미터 지점인 춘성군 북안면 오항리, 일대의 삼팔선에 도착했다. 사명산 주령인 부영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거기서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적과의 접전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북한 인민군이 나타나 교전이 소강상태였으나 5111일을 기해 중공군이 삼팔선을 공격해 옴으로써 3일간이나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청천강까지 북진했던 전우들의 희생이 컸다. 이때 중대 서무를 보던 김현주 일등상사가 진급하여 중대 선임하사로 발령이 나고 내가 중대 CP로 내려와 OP와의 연락업무를 맡게 되었다. 8사단은 1.4후퇴명령으로 며칠간 강행군을 계속했다. 홍청. 횡성. 원주. 문막. 충주를 거쳐 19일 제천 한강상류 북노리 월악산 부근에 집결했다. 지리산에서 소백산맥을 따라 북상하는 인민군과 빨치산의 이동경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매복 수색작전에 돌입했다. 이곳에서 20일간 머무르면서 전력강화를 위한 훈련을 받고 장기교육을 받으면서 부대 재정비와 심신의 충전기회를 가졌다.

5122. 우리 16연대는 충북 월악산에서 다시 부대일제정비를 마치고 미 제2사단과 교대하기 위해 횡선전선으로 이동했다. 횡성 북방 2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성지봉과 오음산 삼마치재를 주저항선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적과 며칠간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치열한 공방전으로 쌍방 간 많은 병력 손실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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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 전사

5128. 중대장 연락병 임무를 맡았던 고향 전우 박준영 군이 업무연락 차 8킬로미터 떨어진 후방 CP로 오는 도중에 중대장 강신재 대위와 부관, 통신병이 방카에 함께 있다가 적의 포격으로 모두 전사했다는 비보를 전해 왔다. 중대장 강신재 대위는 육사 8기생이다. 국가관이 투철한 모범 장교로 부대 내에서 회자되었다. 중대장 강신재 대위의 전사는 너무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16연대 후방 CP는 횡성군 공근면 초월리 분지에 있었고, 9중대 CP는 민간인 임병천씨 집에 본부를 두었다. 나는 고향 전우 김구환과 함께 있었다.

51211. 중대장 연락병인 박준영이 도착했다. 중대장의 사후처리와 중대 지원업무, 행정업무에 의견을 나누었다. 이날 밤, 박준영이 내의를 빨아서 방에 줄을 치고 널어놓았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세탁물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곤한 잠에 취해버렸다. 문밖에는 3-40센티미터의 눈이 내리고 날씨는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갔다.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나서 깨어보니 삽질하는 소리였다. 집 앞 3미터 거리에서 방공호를 파는 소리였다. 불도 켜지 못하고 모두 깨워서 대책을 의론했다. 이때 예광탄이 발사되고 곧 교전이 벌어졌다. 16연대 3대대 후방본부와 각 중대 행정반 그리고 각종 전쟁지원물품보급소에 100여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적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날 밤, 전후방을 포한한 8사단 지역인 횡성. 원주. 전역을 중공군에 포위당하여 꼼짝달싹 못했다. 그들의 인해전술에 갇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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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되다

다음 날부터 3일간 적의 대대적인 수색작전이 전개됐다. 야간에만 잡혀온 아군의 포로 수가 수백 명에 달했다. 주간에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중공군의 활동이 뜸했다. 포로 신세가 된 우리들을 나무가 많은 숲속으로 숨게 했다. 적의 포로호송부대는 포로로 잡힌 아군병사들을 야음을 틈타 북으로 끌고 갔다. 우리는 모든 물품을 다 버리고 서류와 생필품 몇 가지만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같은 방에 있던 우리 세 사람은 적의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초원리 뒷산 고지에 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쌓여 하반신이 거의 묻히고, 한 발 내디디면 두 발 미끄러졌다. 예광탄이 발사되면 눈 위로 포복하면서 몇 시간 만에 겨우 고지에 올랐다. 낙엽을 모아 구덩이를 메우고 그 위에 눈으로 위장한 뒤에 세 사람이 숨어 있었다. 초원리 분지에는 16연대의 각 대대 후방CP와 미군 포병대가 밀집 주둔해 있었다. 대포, 자동차, 유류탱크, 각종 탄약, 보급품 등을 적군이 사용 못하도록 포병부대가 밤샘 포사격을 가했다. 초원리 분지가 불바다가 되었다. 정상에서 원주방향으로 가려했으나 달이 너무 밝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밤에 행동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때문에 다음 날 아침 동트는 대로 탈출하자는 의론일치 봤다. 세 사람은 골짜기 오목하게 팬 곳에 낙엽을 채워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51212. 날이 밝자 산 정상에서 노원리 분지를 향해 내려다보았다. 중공군이 개미 떼처럼 무리지어 다가오가고 있었다. 비로소 완전 포위되었음을 직감했다. 탈출 목적지는 원주였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도보로는 불가능했다. 낮에는 적의 습격이 두려워 어둠을 틈타 행동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조금은 안전한 숲에서 숨어 있기로 했다. 오후 2시경 중공군이 우리가 숨어 있는 산골짜기를 토끼몰이 하듯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발각된 우리는 두 손을 높이 들어 항복신호를 보냈다.

* 포로, 북으로 이송

중공군 뒤에 따르는 수십 명의 포로가 우리 부대원들이었다. 며칠 동안 함께 싸웠던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워낙 빠르게 인원이 보충되다보니 낯을 익힐 짬이 별로 없었다. 그 포로들 중에는 미군 병사도 몇 명 끼어 있었는데 저녁까지 붙잡혀 온 숫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포로 신세다. 그들의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어스름한 밤을 이용해 북으로 데리고 간다는 전갈이 왔다. 포로들을 소대단위로 편성하고 중간 중간에 중공군 감시병을 세워 개인행동이 어려웠다.

51213. 우리 포로들은 북으로 가고 있었다. 낮에는 아군의 비행공습 때문에 행동반경이 좁아졌다. 낮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숲속에서 취침을 시키고, 밤이 되어서야 국도를 따라 북상했다. 도로 양쪽에 늘어선 대열의 길이가 8킬로미터를 넘었다. 하룻밤 내내 걸어서 20킬로미터를 걸었다. 홍천을 지나고 춘천 소양강을 건너 북한강 상류로 진입할 무렵에는 아군의 포성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탐문해 보았다. 일부는 강원도 북부 평강 수용소에 수감하고, 일부는 비행장 건설현장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성분이 좋은 사람은 재 교육시켜 인민군으로 편입시키고, 신체가 좋은 사람은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보낸다고도 했다. 이때부터 감시병이 배로 증가되어 감시가 한층 강화되었다. 포로 중에 감시병 눈을 피해 탈출하다가 총살당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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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껍질을 벗겨먹다

7일 동안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했다. 어느 산골마을을 지날 때, 들판에 쌓여 있는 콩 단을 털어서 날콩을 씹어 먹기도 하고, 먹을 만한 풀잎이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다. 그런 것을 먹었는데도 아무도 탈이 나지 않았다. 짐승들이 겨울 산에서 먹이를 구해 먹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산에 눈이 많아 피신할 수 없을 때는 민가로 내려와 빈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빈집의 구석구석을 뒤져 먹을거리를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먹거리가 없었다. 무나 감자 구덩이를 찾느라고 포로끼리 야단법석을 떨기도 하고, 뭐 먹을 만한 것이 생기면 독수리 먹이 채가듯 낚아가 버렸다. 부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사람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포로는 계급이 따로 없었으므로 누구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포로 몇 명은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모포로 가리고, 먹다만 식은 밥이며 김치를 넣고 끓여서 한 입씩 번갈아 허기를 면했다. 다른 포로들 중에는 불빛 간수를 잘 못하여 중공군 감시병으로부터 혼쭐나게 벌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뺀찌 라일라! 뺀찌 라일라! 뺀찌 라일라! 화 부싱화"(확실한 중국말인지 모른다. 귀에 들린 대로 기억된 발음이다.) 즉 비행기가 날아온다. 불 피우지 말라고 야단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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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시도

신포리를 거쳐 지촌마을에 도착하여 하루 낮을 보냈다. 이 지역 오른쪽은 화천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김화로 가는 길목이다. 더 이상 북쪽으로 가게 되면, 전선을 뚫고 남쪽을 향하여 탈출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몇 포로들이 굳은 결심을 했다. 끌려가 죽음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탈출을 시도해 보자고 했다. 고향 친구 김구환. 박준영. 곽원영. 이종환. 경기도 시흥이 고향이라는 전우 두 명, 그리고 나. 일곱 명이 탈출을 결행하기로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임무를 주어 감시병들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보름달이 지고 며칠이 지났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웠고 금방 함박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중공군 감시병을 예의 주시하던 누군가가 차례차례 귀띔을 돌렸다. 중공군 감시병들이 잡담하며 한눈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나 둘씩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도로 지하 직경 1미터 되는 콘크리트 하수구 속으로 은신하는데 성공했다. 20 여분 지나 포로 대열이 모두 떠난 후, 옆 산자락으로 피신했다. 눈이 덮이고 잡목이 우거진 능선을 따라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거기서부터 한 시간에 1킬로미터씩, 4시간 정도 걸어서 산마루를 넘을 무렵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눈을 헤치고 가랑잎을 모아 그 속에 몸을 숨기고 하루 낮을 보냈다. 밤이 되어서야 달과 별을 보고 방향을 측정했다. 국군의 포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남하를 시도 했다. 3일을 굶었다. 눈뭉치로 목을 축이며 춘천소양강변에 도착하자 탈출계획을 수정했다. 이 지역은 중공군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소양강을 건너기로 했다. 수심이 얕은 곳은 얼어 있었지만, 수심이 깊은 곳은 얼지 않아 물이 흘렀다. 우리는 두 조로 나누어 인민군 검문소 150미터 강 하류에서 도강渡江에 성공했다. 하체가 모두 젖어 몸이 꽁꽁 얼기 시작했다. 움직여야 산다는 각오로 걷고 또 뛰었다. 전에 우리가 9중대 CP로 사용하던 집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그 집은 폭격을 맞아 집 한쪽 모퉁이가 부서져 있었고, 주인이 피난가면서 비장해둔 쌀과 감자 김치가 모두 털린 상태였다. 다행히 이곳저곳 뒤져 나온 약간의 곡식과 감자 몇 개도 찾았다. 불을 지펴 옷을 말리고 헌 소쿠리와 폭격에 부서진 문살에 불을 지폈다. 모처럼 뜨뜻한 밥에 된장국으로 식사 한기를 매웠다. 우리 일행 일곱 명은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 1차 탈출과 실패

이틀간 9중대 CP로 사용했던 민가 마루 밑에서 이불솜을 깔고 쉴 수 있었다. 이불솜만으론 체온을 유지할 수 없어 서로 껴안았다. 그래도 밤은 깊고 추웠다. 전쟁터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부모님과 아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내일 우리들에게 어떤 운명으로 다가올지는 상관이 없는듯했다. 사지死地를 간신히 벗어나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목숨을 가지고 중국 고사도 떠올려 보았다. 정량의 옥퉁소 소리가 귓속에서 적막을 흔들며 앵앵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존재는 포로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 아군의 진지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들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빌면서 졸음이 왔다.

5131. 국군의 복장으론 신분 노출이 쉬었다. 인민군 방한복 비슷한 차림으로 변장했다. 해방 전사라는 신분으로 통일하기 위해 낡은 방한복으로 비무장을 하고보니 밤에는 중공군, 낮에는 인민군 복장과 비슷했다. 중공군은 보급품을 마차로 이동했다. 야간에는 보급품을 실은 마차 뒤에 따라갔다. 우리의 신분을 숨기는 데는 별 탈이 없었다. 주간에는 외진 곳에 있다가 야간에만 행동했다. 9시경 중공군이 보급품을 싣고 홍천에서 삼마치고개를 넘으려는 뒤에 바싹 붙어 갔다. 고개 밑 분지에서 중공군 기마병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우리는 위협을 느끼고 불안했다. 그러나 보급품을 실은 마차는 고개 정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 올라갔다. 횡성 방향 먼 산을 바라보았다. 최전방에서 신호탄이 올라가고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차는 고갯길을 내려가다 우측 길로 가고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그 마차를 계속 따라갈 수 없었다. 도로 양 수로에 긴급히 몸을 숨겼다. 중공군 주저항선을 돌파하다가 중공군 전초병에게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포복자세로 기어가던 21조가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들이 비무장인 것을 알고 그들은 조용해졌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상황은 끝났다. 우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각오를 다진 전우들이었다. 들키지 않고 숨어 있던 다섯 명도 항복 시늉을 하며 그들에게 다가가 합류했다. 1차 탈은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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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사

길 동편 골짜기 외딴집에 중공군 중대병력이 임시 거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들을 심문했는데, 통역관이 없었다. 나는 한자로 "解放 戰士 歸鄕 中(해방 전사 귀향 중)"이라고 써서 보였다. 그들은 나의 묘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택동부대가 장개석 부대와 싸울 때, 장개석 군대의 포로들을 교육시켜 귀향시켰다는 내용이다.

포로로 끌려 다니는 일곱 명의 우리 일행은 1인분 식사를 나눠먹었다. 디딜방아로 쌀 한가마니를 도정해 주고 동쪽방향으로 행군했다. 그 길로 계속 가면 강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야산 평평한 능선에 1개 부대가 있었다. 그곳에 주둔한 부대는 주변 일대를 총괄 지휘하는 본부 같았다. 중공군 고문단이었다. 우리 일행을 간략하게 심문하더니 식사를 하게하고는 다시 행군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홍천시내 북쪽 산 밑에 방공호에 홍천군당인민의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인민위원회에 인계되었는데 조그만 오두막집에 투숙시켜놓고 감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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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위원회에 인계되다

우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어떻게 하면 탈출할 것인지 궁리에 궁리를 더했다.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던 어느 날, 군당위원회 직원이라는 자가 찾아와 쌀 두어 되를 주면서 밥을 해먹으라고 했다. 이것이 웬 떡이냐 하고 밥을 짓고 있었다. 다른 방공호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정보를 주었다. 그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춘천에서 1.4후퇴 때 피난 와서 더 가지 못하고 홍천에서 머물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정보 내용인즉, '오늘 저녁밥을 먹고 군당위원회 살림살이와 모든 서류를 우리들에게 짊어지게 해서 춘천까지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짊어질 물건들을 살폈더니, 모두 서류뭉치들이었다. 점령지에서 인민행동강령과 토지개혁요령 등의 유인물이었다. 우리들은 깜짝 놀라 긴급회의를 했다. 도망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어둠이 짙어질 무렵 밥을 짓는 척 하면서 서로 눈짓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우리들은 2개조로 나뉘어 남쪽 들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초병들이 달아나는 우리를 향해 총격을 가했지만, 어둠이 짙어서 더 이상 추격당하지 않았다.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2킬로미터를 죽기 살기로 뛰어 당도한 곳이 중공군 중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부대와 맞닥뜨렸다. 황급히 다리 밑으로 몸을 숨겼다. 꼼짝 못하고 저녁 내내 물구덩이에서 발발 떨었다. 다리 위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급해 보였다. 중공군이 이동 중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숨어 있다가 다리 건너 홍천시내 남쪽 산 밑으로 숨었다. 그곳에는 드문드문 몇 채의 집이 있었고, 큰 길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을 택해 피신처로 삼았다. 보아하니, 9중대 CP로 활용했던 집이었다. 그 집은 우리가 1차 탈출 때 은신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당분간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오래 잠복하는 길이 사는 길이라 생각했다. 기회가 올 때까지 이 집을 은신처로 결정했다.

* 2차 탈출 성공

운 좋게도 그 집에는 감자 구덩이도 있었고, 김치독도 묻혀있었다. 산골 살림치곤 괜찮은 살림 살이었다. 부엌 밥솥에는 밥이 꽁꽁 언 채로 있었다. 밥을 해놓고 미처 먹지 못하고 떠난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른다. 밥솥에 물을 붓고 김치 독에서 김치를 꺼내왔다. 언 밥이 풀린 탓인지 전혀 배고픔을 달래주지 못했다. 그래도 마른 풀잎을 씹을 때보다, 소나무 껍질을 씹을 때보다도 먹을 만했다. 얼음덩이 밥 한 그릇일망정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끝장을 보기로 했다. 죽든 살든 더 이상 이동하지 말고 그 집을 지키기로 했다. 옆방을 화장실로 사용하기로 하고 숨소리 죽여 가며 숨어 있었다. 비무장 상태인 우리들은 중공군이나 인민군을 만나도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군을 만나면 다행이지만, 적군을 만나면 꼼짝 못하고 끌려갈 판이었다. 일단 하룻밤을 실컷 잤다. 몽롱한 머리가 맑아졌다. 북진하고 있을 때는 일주일 굶으면서 행군해도 배고픔을 몰랐다. 긴장이 풀린 탓도 있겠지만, 밥 몇 끼 굶었다고 맥이 풀려 버렸다. 우스꽝스럽게 변해버린 우리들은 사람의 탈을 썼을 뿐 짐승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일곱 명은 상처 하나 없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입었던 군복을 간데온데없이 인민군 복장도 아니고, 중공군 복장도 아닌 어중간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1차 포로로 잡혀갔을 때 중공군 방한복을 걸친 후, 인민군에 인계되었을 때 또 몇 가지 피복을 얻어 입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군대라고 밝히지 않으면 소속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튿날, 낮에는 아군 비행기가 홍천시내 외곽을 폭격했다. 폭탄이 투하될 때마다 우리가 거처하고 있는 집 천정과 벽이 흔들리며 흙이 떨어졌다. 방문이 저절로 여닫히기를 반복했다. 우리들은 납작 엎드려 폭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성난 폭격기가 화풀이 하듯 폭탄을 쏟아 붓더니 정찰기가 북쪽으로 날아가자 폭격기도 따라가면서 폭탄을 투하했다. 다음 날도 아군 비행기가 홍천시내를 정찰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홍천시내 남쪽에서 아군의 탱크가 들어와 몇 발의 사격을 퍼붓고는 물러났다. 최전선이 우리를 지나 북쪽으로 이동된 것 같았다. 그때서야 우리가 적군과 아군의 완충지대에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저녁 무렵에는 언덕에 올라 정찰하는 여유도 생겼다. 홍천 서쪽으로 약 2킬로미터 지점 하천가에는 유엔군 트럭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들은 말없이 부둥켜안고 안도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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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을 만나다

51322. 11시 경, 유엔군 수색대가 30미터 앞에 보인 곳에서 백기를 들고 다가갔다. 우리 일행을 발견한 유엔군 병사들은 적으로 오인하고 총을 겨누어 금방 쏠 자세였다. 우리는 다시 손을 번쩍 쳐들고 항복 시늉을 한 다음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서 숨어 사는 며칠 동안 얼굴 한 번 씻지 못해 머리는 장발이 되었고 수염은 산적 같았다. 입고 있는 옷마저 각각 달라 몸에 걸치긴 했어도 옷이라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니까 40여 일을 굶고 지쳐서 눈은 칠팔십 리 들어가 있어서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포로로 시달린 40여 일, 총알이 빗발치고 파편들이 공중에서 날아 다녔는데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전우들이었다.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미군 헌병대에서 강도 높은 심문과 심사를 받았다. 다시 우리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원대복귀 명령을 받았다. 원주에서 기차 화물칸에 몸을 싣고 제천역에서 잠시 정차했다. 역무원들이 우릴 보고 '포로 많이 잡았다' 지껄였다. 우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는 역무원의 멱살을 낚아채고 땅바닥에 패대기쳐버렸다. 우리가 왜 포로인가.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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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졸 40여 일

우리 일행 일곱 명은 대구에 도착하여 8사단 보충대에 입소했다. 나와 고향 전우 박준영 외 5명은 횡성 전투에서 실종됐다가 40여 일 만에 8사단 16연대로 복귀한 것이다. 사단 보충대에서는 우리 일행을 데리고 빈 창고로 가서 분사기로 DDT를 뿌려댔다. 머리도 군인답게 잘라주었다. 그리고 온수목욕탕에서 때를 밀었다. 전쟁터 화약 냄새며, 중공군 노린내도 씻어 냈다.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특별 신체검사를 받았다. 모두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40여 일 동안 짐승처럼 마른 풀을 씹어 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은 목숨들이었다. 꽁꽁 언 밥솥에 물을 붓고 끓여 허기를 채웠다. 어딘가 모자라거나 병이 생길만했다. 그런데 멀쩡한 군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 부대는 211일 강원도 횡성에서 전면 피습당한 후, 33일 대구에서 재편성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 부모님 면회

훈련을 마친 2월 말, 우리 8사단은 11사단과 교대하여 지리산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공비토벌작전을 펼치기 위해 열차편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경산역에서 잠시 정차하는 동안 역무원을 통하여 고향에 엽서 한 장을 띄우게 되었다. 내가 일선에 있을 때에는 매일 같이 군사우편을 이용하여 소식을 전해드렸으나 포로가 된 40여 일 동안 편지를 띄우지 못했다. 고향집에서는 오매불망 내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내 편지가 끊기고 소식이 두절되었을 때 후방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8사단이 전멸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불길한 소문이 후방에 퍼져가던 차에 내 엽서를 받아 본 우리 가족들은 부리나케 봇짐을 메고 우리 부대가 있는 진주까지 찾아 오셨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긴 것이다. 이때 고향 전우 박준영이도 함께 면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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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병

51330. 우리 8사단은 지리산공비토벌에 참가했다. 전주에 사단본부가 주둔하고 10연대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21연대는 동부지역, 내가 속한 16연대는 동남부지역인 경남 진주농업시험장으로 가게 되었다. 전주 사단본부와 16연대가 있는 진주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전령이 당일 왕복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처럼 장거리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군용차량이 수시로 왕래하지도 않았다. 험한 재를 넘어야하는 경우가 많아서 연락업무가 불편했다. 그래서 막중한 연락업무를 당일 처리하지 못했다. 16연대는 전주와 진주 중간 지점인 전라북도 남원에 중간 연락소를 설치하고 전주 사단본부와 진주 16연대를 왕래하면서 연락업무를 수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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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전방으로 이동하다

51519. 8사단은 지리산토벌작전 중에 강원도 인제 기린면 현리 북방 주저항선으로 긴급히 이동했다. 525일 용포리 일대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북진했다. 연대 CP를 성화리로 이동하고 장기 주둔했다. 우리 연대는 서화면 노전편 전투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이 합세한 적군과 한 달여 동안 혈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전폭기와 동해 함포사격 지원을 받으며 맹공을 가했다. 중공군은 사상자가 많았다. 보급품 수송이 차단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소련이 유엔을 통하여 51710일 휴전회담을 요청해오고 개성에서 회담을 개최한 바 있었다.

51922. 16연대는 4개월간 혈투를 거듭하던 인제 작전을 다른 사단에게 인계하고 양구 고방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곳에서는 중공군 패잔병과 인민군혼합부대와 약 2개월 간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기세를 꺾어 놓는데 성공했다. 우리 부대는 2개월간 사수한 양구지역을 또 다른 사단에게 넘겨주고 우리 부대는 춘천으로 이동했다. 소양강변 백사장에 주둔하면서 부대 점검에 들어갔다.

*

다시 지리산공비토벌작전

51926. 우리 부대는 다시 지리산공비토벌작전명령을 받았다. 춘천에서 서울. 서대전. 전주를 거쳐 남원에 도착했다. 남원농림학교 후방에 CP를 두고 28일 임실군 갈평리를 통과해서 어느 냇가에 전방CP를 설치하고 작전준비에 들어갔다. 16연대 작전지역은 임실. 순창. 담양. 장성 일대의 지역으로 작전범위가 매우 넓었다. 지리산 동남부를 총괄하는 범위였다. 밤이 되면 공비들이 부락으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고 방화 후, 짐을 싣고 도망치면서 부녀자를 납치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51121일을 기해 정부군 2개 사단과 전투경찰대를 총지휘하는 야전사령관에 백선엽 소장을 임명하고 지리산 공비소탕작전에 총력전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으로 공비사살 438, 생포 528명의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4개 군 지역의 주민들에겐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5225. 우리 16연대는 2차 지리산토벌작전을 마치고 다시 정읍을 출발하여 청량리에 도착 했다. 수송부대 차량으로 포천군 오점포에서 6주간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포천에서 인제군 서화면으로 부대 이동했다.

52530. 당시 서화초등학교 운동장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대형 천막 10동을 세웠다. 그리고 16연대는 528월부터 인제군 서화면 가전. 대왕산 전투에서 요충지를 확보를 위해 격렬한 전투가 연일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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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고지

52923. 16연대가 김화전선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맡고 있는 수도고지에서 중공군은 하루 6백여 발의 포사격을 퍼부으며 공격해 왔다. 고지를 빼앗기고 되찾기를 열네 번이나 거듭하다보니 산은 민둥민둥해졌다. 그만큼 쌍방 간 병력 손실이 컸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아군은 휴전협정이 임박해지자 한 치의 땅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방어를 했다.

537월 초순. 중공군과 인민군 합동 대공세에 밀려 수도고지를 포기하고 20킬로미터나 후퇴했다. 김화읍 금곡. 방통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 지금의 휴전선으로 537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나는 휴전협정이 이뤄지기 약 4개월 전에 의병제대 했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발발해선 아니 될 일이다. 나와 같이 평생을 전쟁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병사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당선 소감

김길영
김길영

나에게도 상복이 돌아왔다.

논픽션부문과 시 부문까지 겹상을 받고 보니 여기저기 자랑하고픈 생각이 앞선다. 나이 들어서 상을 받는 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기쁘기도 하다. 글쓰기 도반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원했던 친척에게까지도 알리고 말았다. 칭찬이라는 게 어른 아이 막론하고 좋은 것이다.

나는 늦깎이 문학도다. 지난 9년 동안 여러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글 동냥하듯 시와 수필을 배웠다. 그것도 부족하여 지금 나는 문예창작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 상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글쓰기 결과물을 얻은 것 같아 기쁘고 감개가 무량하다.

매일신문시니어문학상이 벌써 4회째를 맞는다. 대한민국 시니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시니어문학상에 참여할 수 있는 연령층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거나 6.25전후 세대들이다. 우리들은 광복을 맞고 6.25전쟁을 겪었으며 4.195.16, 12.12 같은 불행한 사건들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IMF라는 국가부도 사태를 겪으면서도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세대들이다. 이제 매일신문사에서 큰 판을 벌려놓았다. 굽은 허리를 쭉 펴고 희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어 실컷 즐겨볼 일만 남았다.

나는 오늘 이 상에 만족하지 않겠다. 늦깎이로 시작한 글쓰기인 만큼 다음에도 다른 장르에 또 도전하여 문학성 있는 작품으로 알찬 열매를 거두고 싶다.

이 기쁨을 시와 수필을 지도해주신 여러 선생님과 수필사랑문학회, 텃밭시인학교, 푸른시창작원, 경희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님과 학우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민국시니어들에게 문학상을 제정해 주신 매일신문사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서 졸작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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