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인생
김 정 곤
이 세상 모든 신께
넝쿨 장미와 아카시아향이 온 누리에 은은하고 찬란한 아침 해가 환희의 봄을 노래하는 이 시각 이 세상 모든 신께 기도드립니다.
저를 질투하지 마십시오.
쌍둥이로 태어나 짝을 잃은 슬픔을 겪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척추를 다쳐 2급 지체장애자가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여섯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의사의 권익을 찾는 의권 투쟁을 하다 수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위암으로 위 절제수술을 받고 얼마 후 장 중첩증으로 소장 절제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어버릴 뻔도 했습니다.
키 158cm에 체중이 45kg밖에 되지 않는 자그만 체구로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힘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칠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이 늙은이에게 찾아오는 환우들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찡그리고 왔다가 밝은 얼굴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지혜와 건강을 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가정에 평화를 주시고 두 아들이 활기차게 사회인으로서 제 몫을 다 할 수 있게 해주셔서 또 감사드립니다.
아내와 40년을 웃으며 바라본 것에 감사드립니다.
내년 3월 칠순 잔치 대신 미흡하나마 자그마한 시집 한 권으로 지인들께 그 동안의 은혜 갚게 하옵소서.
지금 이 순간 제 일생 가장 행복합니다.
신이시여!
이제는 더 이상 저를 질투하지 마십시오.
지는 해가 떠오르는 해보다 더 아름답다 했습니다.
하루를 아니 한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다
지는 해처럼 아름답게 사라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설령 내일 이승을 떠난다하더라도 밝은 미소와 맑은 눈빛으로 작별하게 하소서!
이 세상 모든 신이시여.
제발 더 이상 질투만을 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
신록의 계절 6월을 만끽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무엇인가
어두운 기운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누나는 다짜고짜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입으려 하자 그때야 울음을 터트리며 새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엄마가 돌아가셨단다.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등교할 때만 해도 건강하시던 엄마가 돌아가셨다니….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고 신입생대표로 '' 신입생은 말 한다''는 글이 학교신문에 실리기도 하고 초등학교 같은 반에서 함께 진학한 친구도 많아서 그야말로 꽃피는 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열세 살 꿈 많은 소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장례식을 치르고 와서도 학교를 다녀와서는 무심코 ''엄마''하고 안방 문을 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뜻한 양지 볕에서 엄마 무릎에 누워 귓밥을 파주는 사랑의 손을 만지며 어리광 피우던 호사는 이제는 내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고 웃는 일도 시들해지고 등교조차하기 싫어진 즈음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보다 더 큰일이 벌어졌다.
골목길
고향 집 골목길을 돌고 돈다
어디 정겹지 않은 골목길이 있을까마는
반백 년 흐른 후에 찾아온 골목길
자국 자국마다
켜켜이 쌓여있는 추억의 편린
술래잡기하던 친구들 웃음소리 가득하고
싸움박질 하던 친구들 고함에
새들은 달아나고
열일 곱 어린 나이에
엄마 영정 들고 울먹이며 걷던 형 얼굴
어리둥절 뒤따르던 동생 얼굴
아직도 떠날 줄 모르고
덩달아 나도 엉거주춤 머무는
애잔함이 짙게 묻어나는
그 골목길
아버지의 무단가출
엄마가 돌아가시고 미처 숨 고르기도 전에 아버지가 ''돈 벌어 올게''라는 지극히 간단한 메모 한 장을 남기고 무단가출을 하셨다.
졸지에 고아가 된 오 남매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남매가 의논한 결과 각자도생을 위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명문 여고를 다녀 가정교사로 입주하고 형도 가정교사를 했지만 나와 쌍둥이 동생 그리고 초등학교 다니던 막냇동생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학업의 끈은 놓을 수 없어 등교는 꼬박꼬박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몇 푼의 생활비로는 언제까지 견딜 수는 없었다.
잊지 못할 선생님
중2가 되자 집안 살림은 더 궁색해지고 등록금을 못 내고 결국에는 등교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비록 출석을 불리지는 않았지만, 꼬박꼬박 학교는 갔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점심시간에 무료급식으로 나오는 식빵 한 조각과 한 통의 우유를 얻어먹기 위해서.
연속해서 몇 번의 등교정지를 당하자 더는 배짱을 부릴 수가 없었다.
며칠을 결석 아닌 결석을 하자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셨다.
집안 사정을 이해한 선생님이 가시면서 선생님 호주머니에 있던 돈을 몽땅 주고 가셨다.
''힘내라. 살아 못할 일은 없다. 네 꿈인 육군사관학교를 가려면 일단 중학을 졸업해야지''라는 격려 말씀과 함께.
호떡 장수 아저씨
중2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하교 후 나는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었다.
초승달 뜬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삭풍은 허기진 나를 더 허기지게 했다.
엄마가 하늘로 가서 별이 되시고 아버지는 돈 벌러 가신다고 집을 나가신 후 소식이 끊긴 터라 4남 1녀는 뿔뿔이 흩어져 이 집 저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형과 누나는 고등학생이라 입주 가정교사라도 할 수 있었지만 어린 나를 선뜻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아침에 큰집에서 나올 때 "오늘 오후에 둘째가 제대해서 집에 온다고 하니 학교 끝나면 너의 외갓집으로 가거라"라는 큰어머니 말씀이 있었다.
얼마 전에 외갓집에서 나와서 큰집으로 간 터라 다시 외갓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바람은 차고 배는 고프고 신세가 하도 처량하여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밤은 깊어 자정 통금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내 눈 속에 반가운 호떡 수레가 들어왔다.
무작정 들어간 수레에는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함께 그날 장사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아저씨! 그 연탄불 끄지 마세요. 저 오늘 여기서 자야 해요"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교복을 입은 채로 울면서 말하는 나를 보더니 " 너 부모님께 야단맞고 가출을 했지? 이 녀석아! 부모란 다 제 자식 잘되라고 야단도 치고 매도 들고 그러는 거야. 집에서 걱정하고 계실 테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팔다가 남은 호떡을 두어 개 주고는 연탄불에 물을 부어버리는 것이었다.
울면서 호떡을 먹는 사이에 연탄불은 꺼지고 아저씨는 빨리 집으로 가라고 재촉을
하셨다.
고아 아닌 고아 신세가 된 나는 대성통곡을 하고 사연을 들은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시면서 내 손을 잡아주셨다.
아저씨 집으로 따라 갔더니 단칸방에 애들이 세 명이나 자고 있었고, 나는 자는 둥 마는 둥 웅크리고 있다가 아침에 아주머니가 끓여 주시는 우거지 죽을 맛있게 먹고 등교 준비를 하는데 내 등을 쓰다듬으며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단다.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해!"
이후 본과 3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간신히 의대를 졸업하게 되었다.
인턴을 끝내고 다시 찾아간 그곳에는 호떡 수레도 이미 없어졌고 아저씨는 어디로 이사를 하였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따뜻했던 온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병일지
중2 봄방학을 맞아 중3 진학준비를 하던 중 발끝에서 시작된 마비 증세가 서서히 올라와 며칠 지나지 않아 온몸이 마비되어 목과 양팔 밑으로는 움직일 수도 없고 감각도 없어 대소변 처리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가출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기는 했지만 가난한 아버지가 내 병을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은 다 큰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앉을 수만 있으면 창밖 풍경이라도 볼 텐데 누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사지가 뻣뻣해지면서 팔도 다리도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누워서 그냥 죽을 수가 없어서 이 병원 저 병원 심지어는 부산 제3 육군병원까지 찾아 갔었다.
그러나 진단 결과 답은 한결같았다.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사춘기 예민한 감성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다.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않았다.
기적을 만나다
유월 중순 엄마 제사를 지낸 다음 날 새벽에 어디선가 까치가 울고 있었다.
엄마가 다녀가시면서 보낸 까치였다.
그날 오전에 반갑고 반가운 전보를 받았다.
부산대학병원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오신 유명한 교수님께서 수술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해 정밀진단을 다시 하고 수술을 받게 되었다.
임상시험용 수술이라 일체의 치료는 무료로 한다.
단 만일에 수술에 실패할 경우에는 대학병원 해부실습용으로 시신을 기증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렇게 운명의 신께 아니 조 성옥 교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고 수술대에 올랐다.
9시간 만에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을 거쳐서 병실로 돌아왔다.
의식이 회복되자마자 이 병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가 내가 두 번째고 내 앞서 수술을 받았던 강원도 아주머니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나도 과연 살아 퇴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의과대학 해부실습용으로 남겨지는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
착잡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가 만난 의사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양 팔과 얼굴 뿐, 몸뚱이는 완전 마비라 꼼짝을 못하니 욕창이 생겼다.
피부이식 수술을 세 번이나 했었지만 다 실패하고 네 번째 수술을 마치고 나온 며칠 후 간병해주던 누나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만 침대에다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내가 내놓은 오물이지만 이것이 다시 상처로 들어가면 수술을 또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이식에 필요한 피부를 떼어낼 수 있는 곳이 더 이상 없는 절박하고 황당한 상황이 되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홍길동 아닌 김의진 선생님이 " 짜자자잔!" 하고 나타났다.
간호사도 부르지 않고 장갑도 낄 겨를도 없이 양 손으로 그 오물들을 신문지에
옮기는 것이었다.
예민하다는 사춘기에 환자가 된 나는 수시로 김 선생님을 괴롭혔다.
시도 때도 없이 마치 내 가족인 것처럼 불러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얼굴 한번 찡그린 적도 없었으며 힘들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참 신기했다.
언제나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병실에 나타나는 저 의사는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어디 있다가 저렇게 총알같이 나타나는지?
항상 콧노래를 부르며 다니는 김 선생님의 인기는 말 그대로 최고였다.
환자들한테만이 아니라 병동 간호사들에게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무리 의사라도 맨손으로 오물을 만진다는 것은 쉽지 않을 터인데 거의 본능적이고 반사적으로 하는 김 선생님의 처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의 은인을 넘어 영웅으로 내 마음 속에 깊이 모시게 되었다.
당시 내가 장차 의사가 될 것이라고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그때에 그는 이미 나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가 되셨다.
가을 운동회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잔잔한 어느 가을날 오후
일광욕을 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 동산에 올랐다.
그곳에서는 전찻길 건너 맞은편에 내가 다니던 경남중학교가 보인다.
마침 그때 그 학교에서는 가을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우레 같은 함성과 북소리 장구 소리와 함께 뛰고 달리는 친구들의 모습들이 선연하게
다가왔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장교가 되겠다는 꿈이 사라진지 오래일 뿐만 아니라 두 발로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춘기 소년의 가슴 속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신은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 벌을 주셨을까?
원망하고 또 원망하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줄 때 그가 이겨내지 못할 고통은 주지 않는다.
그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깨달음이 내 인생을 어떻게 뒤바꾸어 놓을지는 이때는 미처 몰랐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온몸 마비로 인한 욕창으로 네 번의 피부이식수술 후
21개 만에 결국 내 다리로 걷지도 못한 채 휠체어를 타고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무료입원에 부산대학병원 최장기간 입원 기록을 뒤로 한 채.
21 개월만의 귀가
일 년하고도 구 개월 간의 병원 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온 집은 말 그대로 썰렁했다.
퇴원을 축하하는 팡파르는 고사하고 아버지의 한숨소리만 가득했다.
전혀 난방이 되지 않은 방은 시베리아 벌판이 따로 없었다.
이불을 깔고 누웠지만, 장기간 침대 생활을 한 나에게는 마치 바위 위에 누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기도 불편한 이부자리도 잠시였고 우선 배가 고파도 집 어디에도 먹거리가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의 절망감이 나를 괴롭혔다.
성경책과 고구마
방은 온기가 없어 썰렁한데 일어설 수 없다는 자괴감과 절망감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집안에는 물 이외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다니던 막내의 제안에 나는 그만 영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앞집에 사는 아이가 성경책이 필요한데 성경책을 주면 고구마를 한 개 주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입원 중에 간호사 누나가 준 그 성경책을 고구마와 바꿔 먹었다.
이후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성당에서 세례를 받을 때 신부님께 고해성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신부님께서는 "내가 너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라고 말씀해주셨지만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몸과 마음속에는 죄로 그리고 빚으로 남아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식 때 자신에게 약속한 두 아들 결혼 시킨 후 언제인가 진료실 문을 닫은 후 일 년 간 주님이 허락하는 곳에서 의료봉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이다.
추위와 배고픔도 잠시 어떻게든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내 발로 걸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독기를 품게 되고 자신과의 싸움을 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재활의학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병원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해 혼자서 죽을 힘을 다해 방 안에서 벽을 짚고 걷는 연습을 계속했다.
나의 재활 의지를 한기와 허기도 꺾지는 못했다.
광안리 백사장에서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끝에 나는 비록 목발에 의지 했지만 걷기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퇴원 후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나서시던 아버지께서 두고 가신 담배를 가지러 집으로 다시 오셨다.
형도 누나도 학교에 가고 없었고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안방에 있던 담배를 들고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뒤뚱 걸음으로 담배를 들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아버지의 눈물과 나의 눈물이 엉켜 강물을 이루고 있었다.
그 때 그 순간의 아버지와의 포옹을 잊을 수 가 없다.
그 때 그 감격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버님 전 상서
그립고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란
세월이 가도 바래지 않는
짙고 짙은 물감인가 봅니다
때로는 달 빛 타고 오시고
때로는 별 빛 타고 오시네요
생전에 지으시던 그 미소
보름달 속에서 보이고
생전에 들려주시던 그 말씀
달 빛 타고 들려 주시네요
보고 싶은 아버지
오늘 밤에는 저와 함께
가로등 환한
꽃길을 함께 걸어요
꿈속에서라도 함께 걸어요
우리
광안리 해변
광안리 바닷가는 그리움 가득한 마음의 고향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바라보며
절망을 삼키며 한숨짓던 고아 소년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끝내 울음 토하던 그 곳
모든 일을 기도하듯 하라는 깨우침 있어
이를 악물고 기듯 걷듯
파도소리만 들리는 깜깜한 시각까지
모래사장에서 자신과 끝없는 싸움을 하며
자살이라는 몹쓸 것을 바다에 던지고
목발 짚고 허허로운 웃음으로
돌아서던 곳
그리움 가득한 마음의 고향
나의 어머니
떡 사세요. 떡!
어느 해 여름방학 때 쌍둥이 동생과 나는 아르바이트 아닌 생존투쟁을 하고 있었다.
둘이서 떡 장사를 하는데 까까머리 머슴애 둘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떡 사세요! 떡"을 아무리 외쳐도 떡은 팔리지 않고 따가운 햇볕에 떡에서 쉰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우리가 먹어버리자는 생각과 그래도 본전은 건져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번민하는 사이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더는 지체할 수가 없어서 그 떡판을 들고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누나를 찾아갔다.
차비가 아까워서 두 시간을 걸어서 갔다.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떡판을 들고 나타난 쌍둥이 동생을 본 누나는 울면서 우리들의 뺨을 때렸다.
이미 떡은 상해서 버려야 하는 지경인데 지체장애인 동생이 그것도 걸어서 거기까지 온 것이 떡이 상한 것보다 누나 속이 더 상했던 것이다.
" 정 안 팔리면 그냥 먹어버리지 그랬냐! 미련들 하기는."
그랬다.
정말로 미련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육십하고도 아홉인 지금도 나는 여전히 미련하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로 먼저 소풍 가버린 쌍둥이 아우가 너무나 그리워지는 밤이다.
하늘나라도 소한인 오늘 밤은 엄청 추울 텐데...
아우야!
미안하다. 내가 미련해서.
그리운 아우에게
아우야
오늘따라 하늘은 더 푸르고
바람은 더 세차게 불어댄다
네가 잠든 그 곳은 시방 눈발도 날린다지
입춘도 지났건만 창밖의 바람은 고추보다 맵다
10분 늦게 나왔지만 엄마 뱃속에서는
지가 형이었다고 우기던 아우
먼저 태어난 아이가 동생이 되는 나라도 있다고 엄마한테 진짜로 형이 나인지 너인지 물어보자고 우기던 아우
10분 늦게 태어난 것이 그렇게도 억울해
20년 먼저 떠나버린 거야?
오늘따라 유난히 보고 싶은 아우야
서로가 서로를 보며 닮았다며 웃던 아우야
그리움이 짙디짙으면 바람타고 구름타고
돌아오기도 하는가 보다
오늘 새벽 거울 안에서 이제 내가 형이다
내가 먼저 갔으니까 내가 형님이지라며
버티고 서 있을 아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진하고 진한 이 그리움을 어찌 전하나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우리 인연의 색깔은 어떤 색이었을까
어린 과외 선생
오리처럼 뒤뚱 걸음이지만 혼자 걷기를 시작하자 이제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해야겠다는 당연한 욕심이 발동했다.
우선 필요한 것이 등록금 마련이었기에 초등학교학생들을 모아 과외선생을 했다.
우리 집은 장소가 협소해 학생 집에서 수업을 했다.
두 군데 과외선생을 하며 독학을 하게 되었는데 4년 만에 들여다본 중학교 교과서는 전혀 딴판이었고 수학에 나오는 집합이라는 것은 그 의미조차 몰라 한글사전을 찾아야 할 정도였다.
정작 과외를 받아야할 학생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그러나 내가 과외를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 죽기 살기로 공부하던 중 심한 감기몸살로 이틀을
과외수업을 못해주게 되었다.
사흘째 되는 날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나에게 세 명의 꼬마들이 물어물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손에 과일이 든 비닐봉지 하나씩을 들고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 선생님! ''
하면서 들어서는 아이들은 흠뻑 젖어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제자들에게 어떤 존재이며 스승이 제자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야하는지.
새삼 중2 담임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때 늦은 고등학교 입학
독학하느라고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터지자 아버지는 ''그렇게 애쓰지 말고 쉽게 입학할 수 있는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닭이나 키우면서 너하고 싶은 문학공부를 하면 어떻겠니?''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가톨릭 신부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반드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야했다.
결국 지방 명문고라는 청주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하고 때늦은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또한 녹녹치 않았다.
동급생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많은데다 순수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 근처에 오는
친구들이 없었다.
동급생이 아니라 거의 아저씨 대접을 받았다.
4년간의 투병생활로 인해 아주 가까운 친구 몇 명 이외는 나와 교류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외톨이 신세였다.
그래서 학교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 시를 쓰며 학우들과 어울렸다.
시화전도 하고 시낭송회도 하면서 가까이하는 선후배들이 한 명 한 명 늘어갔다.
2학년 봄 어느 날 같은 성당에 다니는 동급생 여섯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다.
자기들은 단순히 동급생이 아니고 의형제들인데 나이가 같아 가끔씩 마찰이 있을
때는 갈등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큰형으로 모시고자 왔다는 것이다.
이틀간의 고민 끝에 승낙을 하고 '세븐브라더스'의 맏이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각자 다른 직업을 가졌지만 모두들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고 다섯은 서울에서 한명은 청주에서 나는 울산에서 살고 있지만
오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의형제의 연이 이어지고 있고 지금도 매달 한 번씩 저녁
모임을 갖고 있다.
나는 개원의사라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참석하지 못하지만 전화로 카카오톡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친형제 못지않은 정든 탑을 쌓아가고 있다.
고2 첫 모임 때 함께 외쳤던 ''포에버 세븐브라더스''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고
이승을 떠날 때 까지는 만남이 이어질 것이다.
아니 저승에 가서도 의형제는 계속 만날 것이다.
에피소드 하나.
3학년 졸업 무렵 대학에 입시원서를
제출하러 갔었는데 어떤 사복 입은 학생이 '' 정곤이 형!''하고 나를 불렀다. 내가 그에게 한 대답은 '' ''너는 누구니?'' 였다.
한반에서 일 년을 지내고도 그가 같은 반 친구라는 사실을 몰랐다.
2년을 거의 매일같이 성당에 드나들면서 학생회 월간 소식지를 직접 먹지에 쓰고
등사해서 만들었으니 언제 대학입시준비를 제대로 했겠는가?
결국 졸업반이 되어서야 학업에 매달렸으니 같은 반 친구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졸업한 것이다.
아마 그 친구가 함께 의과대학에 다니지 않았다면 지금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때늦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진로에의 고민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진학문제로 고심하게 되었는데 내 꿈인 가톨릭 신부와
아버지의 꿈인 의사가 결국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버지는 결혼도 못하는 신부가 되는 것에 반대하셨다.
당시에는 아버지는 신자가 아니었다.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의 허락과 누나 형의 지원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반대하셨다.
성당 성모상을 탑돌이 하듯이 돌고 돌면서 묵주기도를 드렸다.
기도에 대한 답이 왔다.
''일단 의사가 되어라. 의사가 되고 나서 신학교로 간다고 하면 그때는 아버지도 지금처럼 강경하게 반대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의과대학 입학
청주에서 멀지도 않고 국립대학이라 등록금도 비교적 적게 드는 충남대학교 의예과로 원서를 접수하고 나서 보니 신학교를 갈 요령으로 거의 매일 하교하면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입시공부는 게을리 할 수밖에.
의예과에 합격 하려면 현재 성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터.
또 며칠을 죽기 살기로 책과 씨름을 한 결과 다행히 일차는 합격을 했다.
이차 면접에서 예상했던 문제가 터졌다.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이론수업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 어려운 해부실습 수술실실습 등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겠는가를 두고 면접관 교수님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충남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 된 지 5년 밖에 안 되었으니 이런 경우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아직 없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불합격되면 어쩌나 노심 처사 끝에
최종 합격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석합격생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지체장애인이라
나도 덩달아 합격이 된 것이었다.
이것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의과대학 졸업
입학했다는 기쁨과 뿌듯한 마음으로 즐겁게 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로 진학하자마자 해부학실습이라는 고약한 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격한 포르말린 냄새야 병원 생활을 오래 한 나였기에 별문제가 없었지만 어려운 의학용어 그리고 나이어린 의대 선배들의 군기 잡기가 결코 녹녹치 않았다.
툭하면 이런저런 핑계로 매타작이 다반사라 아예 내복을 두툼히 입고 학교에 다녔다. 그렇지만 의사가 되어야 신부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텼다.
임상에 들어와서는 정신과라는 학문에 매료되면서 그리고 연애를 하면서 반드시
신부가 되지 않아도 정신과 의사가 된다면 내 꿈의 절반은 이루어질 것이라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신부에의 꿈을 접고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어렵고 고단하다는 인턴 생활도 여러 동기생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치고 정신과를 지원하려 했으나 모교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었을까? 인연이었을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신과 주임교수님의 소개로 서울 강북삼성병원에 가서 이시형 박사님의 제자가 되었다.
정신과 전공의 시절
서울에서의 정신과 전공의 시절은 나의 황금기였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난 후라 그런지 건강에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고
정신과 공부와 진료 역시 내 적성에 맞아 즐겁게 수련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잠이었다.
몇 날 며칠을 연속해서 당직하고 하룻밤에도 몇 번씩 응급실을 오르내리며 환자를
보니 다시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았다.
도저히 참기가 어려워 하루는 회진이 끝나자마자 이시형 박사님께
'' 저 잠 좀 재워주세요.'' 라고 하소연을 드렸다.
그런데 대답이 걸작이셨다.
'' 닥터 김은 밥을 앉아서 먹나 서서 먹나? 예일대학에서는 전공의들은 식당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해. 전공의들은 식사도 서서 그것도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면서 일해.''
'그렇구나! 전공의는 상머슴이구나 하고 당연한 고생이라고 그래도 인턴 시절보다는 낫구나!'라고 스스로에게 위안을하며 정신과 전공의를 무사히 수료하고 전문의 시험도 합격했다.
전문의 시험 끝나는 날
일차 필기시험 합격하고 며칠 후 실기시험을 끝내고 나오자, 나는 마치 바람이 가득 든 풍선을 그냥 놓아버린 것처럼 허탈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감각마저도 잃어버린 채 순간 멍하니 서 있다가 청주에 계신 아버지께 우선 인사부터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청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생전에 안 하던 멀미를 하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에 아랫배가 아파왔다.
간신히 집에 도착하여 아버지께 큰절을 드리고 앉자마자 맹장염에 걸린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맹장이 터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 당장 병원에 가자고 하신다.
하루만 지켜보자고 말씀드리고 방에 들어가 누우니 교과서대로 순차적으로 맹장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대학 선배가 근무 중인 종합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 맹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고 선배가 말했다.
이것이 열세 번째 수술이니 이제 제발 수술은 그만 받으라고.
천운이었다.
만일에 하루만 일찍 맹장염이 발병했더라면 그렇지 않아도 늦은 내 인생 열차를 또
일 년 더 늦출 수밖에 없었을 터.
대학교수의 꿈을 접다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대학 전임강사로 발령받고 고향 부산으로
금의환향한 나는 대학교수로서의 꿈을 키운다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나를 살려주시고 오늘이 있게 해주신 조성옥 박사님과 김의진 박사님의 격려도 엄청 힘이 되었고 함께 근무하시는 선배 교수님들의 배려와 의국 전공의들의 도움으로
아주 행복한 대학병원 스탭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교수로 진급한 지 얼마 안 되어 전혀 예상 못 한 일이 터졌다.
공무원 하던 형을 불러내 함께 시작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로 끝나고 부도수표 위반으로 아버지나 형이 실형을 살아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도 형도 감옥에 보낼 수는 없어서 빚을 내가 떠안았다.
그런데 많지 않은 월급으로 빚을 갚다 보니 부부간의 불화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결국 영남지방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주는 병원의 신경정신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대학교수의 꿈은 조교수로 끝났다.
대신에 내 가정의 평화를 지키면서 아버지의 빚도 다 갚았다.
의사의 꽃
종합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5년을 끝으로 봉직의 생활을 마감하고 1992년 2월에
의사의 꽃이라는 개업을 하게 되었다.
대출을 받아 개원하면서 우려했던 것은 기우였고 개원 첫 날부터 밀려드는 환자들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2000년 5월부터 의약분업이 시작된다는 의료계의 위기가 찾아왔다.
정신과는 의약분업과는 직접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배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의사회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울산광역시의사회 부회장이자 대한의사협회 중앙위원으로 울산과 서울을 밥 먹듯 오가면서 무려 44일간이나 병원 문을 닫고 의사권리쟁취와 의약분업 반대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내 병원은 반 토막 나고 내 건강 또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다시 찾아온 병마
의사회 일과 개원의로서의 적지 않은 환자를 보느라고 불철주야 바쁜 생활을 보내던 중 2003년 사월 하순에 진료 중에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면서 잠시 의식을 잃어버리고 바지에 오줌을 싸는 일까지 생겼다.
놀란 직원들의 도움으로 이웃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이틀간 입원하면서 뇌 MRI는 물론 각종 검사를 다했었다.
진단 결과는 과로로 인한 뇌허혈성 장애였다.
퇴원 직전에는 위내시경 검사와 조직검사도 하고 왔다.
4월 말일 유난히도 비바람이 거세던 날 그야말로 잔인한 소식이 나에게 전해졌다.
위암이라 당장 수술을 해야 하니 지금 바로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진료실 창밖을 내다보니 바람은 더 거세졌고 빗줄기도 더 강해져있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이라 재차 전화로 대학병원에 확인하였으나 당장 입원하라는 말 뿐이었다.
전이여부는 수술을 해봐야 알겠다는 전언도 함께.
한참을 생각하다 내일 입원하겠다는 연락을 하고는 직원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내한테 전화를 하였다.
출타 중이던 아내는 황망한 표정을 하고 내 진료실에 들어섰다.
이틀 뒤 내 14번째 수술은 위암 수술이 되었고 위의 사분의 삼을 절제했다고 들었다.
다행히 특별한 전이는 없었고 2주 만에 퇴원을 했다.
단 한 달만 이라도 쉬지를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되지만 퇴원 후 이틀 만에 다시
진료를 개시했다.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종일 상담실을 지키는 동안 체중은 자꾸만 자꾸만 줄어들었다.
하체의 힘은 빠지고 기운도 없었지만 나의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버티다보니 차차 호전되고 환자도 무리 없이 보게 되었다.
열다섯 번째 수술
이제는 병마와 영원한 이별을 했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진료실을 지키던 2010년
어느 날 밤 갑자기 배가 풍선처럼 불어나면서 복통은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고 이러다가 배가 풍선 터지듯이 터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을 거쳐 입원을 하였다.
이틀을 꼬박 통증과 싸우면서 수술하지 않고 완화시켜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내 생애 열다섯 번째로 또 수술실을 구경하게 되었다.
소장협착증으로 인해 이번에는 소장을 잘라냈다.
퇴원 후 역시 불편해하는 환우들을 외면할 수 없어 이틀 만에 다시 진료실에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울산 동구의 유일한 정신과의원이라 내가 자리를 비우면 환우들은 시내까지 가야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체중 감소는 오히려 위암 수술 때 보다 더 심하게 왔다.
키 158센티미터에 체중이 16키로가 빠졌으니 기운이 더 없어지고 하체의 힘은 더 빠져 한동안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은 함부로 제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다.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기에.
늦깎이 시인 등단
17년간 연속해서 울산에서 서울로 수시로 오르내리며 정열을 쏟았던 의사회 임원 일을 그만두고 진료에 전념하게 되면서 건강도 어느 정도 찾아가고 진료실도
안정되어 가고 있어 마음의 여유도 생겨 그동안 접어 두었던 글쓰기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틈틈이 의사회 회지에 시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내 시를 밖에 드러내기는 너무 미흡하다고 생각할 즈음 아내의 권유로 영남문학예술인협회 신인문학상공모전에 응모했다.
2015년 겨울호에 시 ''가는 봄 오는 봄'' 외 2편이 당선되어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서 본의 아니게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문학공부를 하게 되었고 수시로 시상이 떠올라 잠을 설치기가 다반사였다.
올해 오월에는 '문학시선작가회'와 서울일보가 공동주최한 윤동주시인 탄생 백주년 특별문학상 공모전에서 '' 내 몸에 담은 동주형의 꿈''(김정곤의 자화상)이 대상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2년 후 봄이 오면 내 뒤를 이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되는 아들에게 내 진료실을물려주고 은퇴를 할 생각이다.
은퇴 후 일 년간은 의대 졸업식 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신과 약속한 의료봉사를 하면서 좀 더 문학공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은 소망을 가져본다.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좋은 글 은은한 향기가 나는 글을 쓰고 싶다.
한 명에게만 읽히는 백편의 시 보다도 만 명에게 읽히는 시 한편이라도 남기고 싶다.
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회
아버지가 총각시절 첫 애인이었던 어머니와의 결혼은 할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에 반발한 아버지는 세 번씩이나 가출을 하여 북간도로 도망을
다녔다.
결국 아버지는 내 생모와 결혼을 하였고 어머니는 충격을 완화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양재학원을 다니다 결혼하였는데 딸이 태어나고 그 이듬해 갑작스러운 사별을
하고 청상과부로 살다가 내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아버지와 재혼을 하셨다.
콩쥐팥쥐 이야기만 듣고 자란 사춘기 소년은 계모라는 선입견으로 얼마간은 경계를 했었는데 친척 어른들께서 아버지의 첫 연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머니라고
불렀다.
끼니도 걱정해야할 궁핍한 가정에 그것도 5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돌보겠다고 딸
한명을 데리고 자진해서 우리 집으로 오신 것에 대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새어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청춘을 다 바쳐 삯바느질로 6남매의 뒷바라지를 하셨고 아버지께는 절대순종을 하셨다.
호강 한번 못하시고 97세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과 존경심은 영원할 것이다.
어머니 전 상서
하늘나라에서 천사가 한 명 부족하셨나보다.
97세가 되신 어머님을 부르셨다.
내가 열네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지 일 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아버님께서
나를 데리고 어디를 가자고 하셨다.
어떤 예쁜 여인과의 첫 만남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분이 우리 집으로
오셨고 내 어머니가 되셨다.
어린 나이에도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집안에 그것도 자식이 5남매나 되는 지지리도
궁상맞은 집에 청상으로 왜 오셨을까 궁금했었다.
어머님이 고생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늘나라 천사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바로 저 분이 천사이시구나 생각했었다.
한참이 지난 후 큰어머님을 통해 아버지와는 첫 연인이셨고 어찌어찌한 사정으로 두 분은 헤어지게 되었고 아버지는 두 번이나 만주까지 가출을 하셨지만 결국 할아버지의 뜻대로 장가를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결혼하시자 일본으로 가셨고 양재학원에서 공부하시던 중 결혼하셨고 딸 한 명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상이 되셨다고 한다.
사춘기 예민한 시기의 올망졸망 6남매를 잘 건사하셨고 작은누나와 우리 5남매와의 갈등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해 주셨다.
어떤 계모 이야기나 콩쥐팥쥐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동화나 소설에 불과했을 뿐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분이 서로 존대어를 쓰셨고 부부싸움을 하신 날에도 잠은 꼭 한 방에서 주무셨다.
어려운 살림에 어찌 고단하고 힘들지 않았을까 만은, 삯바느질로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며 묵묵하게 그리고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어머님!
오신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병명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전신 마비가 되어 대소변도 받아내야 하는 차남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끝에 의사로 의대교수로 키워내신
어머님!
맏며느리가 하늘나라로 가자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인 어린 손자 손녀를 손색없이 키우신 어머님!
경상도 사나이의 전형이시던 아버님이 84세로 당신의 곁을 떠나던 그 날까지 진정한 내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던 어머님!
평생을 독서와 기도를 취미로 하시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삼종기도를 하셨던 어머님!
무슨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시느냐고 질문하면 씩 웃으시며 "딱 두 가지다"
라고 하셨지요.
"하나는 너희들 잘되라고 또 하나는 내가 너희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하늘나라에
들게 해달라고 기도한다"하셨지요.
어머님!
용서해주세요.
어머님께서 놀라실까봐 셋째가 먼저 간 것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아차! 지금쯤 영곤이를 만나서 더 놀라셨겠네요.
어머님!
떠나시면서 저희들에게 남긴 무형의 유산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좋은 것은 무형의 유산이라 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네요..
어머님!
상속세 대신에 어머님 가르침대로 남을 배려하고 관용하면서 일하듯이 기도하고 기도하듯이 일하면서 살게요.
참! 어머님 제가 이번에 신인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네요.
내달 초순에 상 받으면 어머님께 꿈 속에서 라도 드릴게요.
정말 너무 너무 보고 싶네요.
어머니!
부디 불효자식을 용서하시고 하나님 보필 잘 하십시오.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제 꿈나라로 오세요.
저도 어머니 보고 싶으면 꿈나라로 달려갈께요.
어머님!
안녕히 계세요.
제일 속 많이 섞힌 차남 올림.
쌍둥이 에피소드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나의 가장 어릴 적 기억은 할머니에 닿는다.
할머니께서 외출을 하실 때 웬만한 곳이면 쌍둥이 손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는데 전차만 타시면 아무도 물어본 사람도 없는데 애써 다가가 ''우리 손자요. 우리 쌍둥이 손자. 참 예쁘지요?''하고 자랑을 하시는 것이었다.
일면식도 없으면서도 예외 없이 "고놈들 참 귀엽네"라고 대꾸를 해주었다.
워낙 많이 닮아 친척들도 구분을 잘 못했다.
음성은 너무 비슷해서 아버지께서도 '큰 곤이냐? 작은 곤이냐?'라고 물어보실 때가
적지 않았다.
쌍둥이로서 에피소드가 한 둘이 아니지만 참 난감할 때도 있었다.
여름방학 때 청주 어느 이발소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인사를 하는데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엉거주춤 아는 채를 하고는 이발이 끝나고 이발비를 내자 아까 그 사람이 내 것도 함께 내고 갔다고 했다.
쌍둥이 동생을 잘 아는 누군가 나를 동생으로 착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집에 돌아와 쌍둥이 아우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기는 했는데 아우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감이 안온다고 했다.
본의 아니게 아우는 그 사람에게 큰 결례를 범하고 말았다.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야 고맙다는 인사라도 전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움이란 끝이 없는 것인가
언제까지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달래야 하는가
밤 사이에 별빛 타고 와서는
내 창가를 가만히 두드리다
말없이 돌아서는
너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
화들짝 놀라서 달려 나갔지만
어느새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가버린 너의 흔적에
눈물로 답하는
이 안타까움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
쌍둥이 아우야
그토록 그리움이 몸서리 친다면
우리
이전 처럼 그렇게 함께 살자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함께 살자
그리움이 끝이 없다면
차라리 함께 살자
당선소감

헐벗고 배고픈 시대를 살아온 시니어세대 모두가 숱한 상처를 안고 있으며 적지 않은 절망감에 좌절도 한두 번 경험하지 않았을 터.
막상 전기나 다름없는 제 자신의 이야기를 보내놓고 난 후 스스로 발가벗은 것 같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굴곡진 삶을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분들께 동병상련이 되고 다음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 조금이나마 용기를 주는 글이 된다면 제 부끄러움은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미흡하고 누추한 글에 당선이라는 영광스러운 옷을 입혀주신 심사위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65세 시인으로 늦깎이 등단 후 끊임없이 격려해주시고 성원해주신 '영남문학예술인협회' 회원님 '문학과시선'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체장애인 남편을 40년 넘게 한결같이 웃음으로 내조해준 내 사랑 그리고 내 희망, 내 등불인 두 아들에게도 고맙고 고맙다고 전합니다.
이번 당선에 힘입어 더욱 따뜻하고 포근한 글이 나올 수 있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늘 찡그리고 왔다가 웃으면서 돌아갈 수 있는 진료실이 되도록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의 소임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설령 내일 이승을 떠난다하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기도하듯이 일하고 일하듯 기도하는 하루 하루를 살겠습니다.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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