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탈출
밤중이 되자 드디어 초소에 불이 꺼졌다. 우린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다리 앞으로 다가섰다. 강물은 숱한 사연을 담아 물살을 밀어내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으나, 불안과 공포까지 씻어 가주진 못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려왔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철다리는 출렁거렸다.
3년 전 온 가족이 희망을 품고 이 다리를 건너왔고, 그때 동생이 발을 헛디뎌 수장이 될 뻔했는데, 지금 또 다시 목숨을 담보로 이 다리를 걸어가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상념에 빠질 여가도 없이 너무 긴장한 탓인지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정적 속에서 세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다리 중간에 다다랐을 때 불이 번쩍 하더니 인민군이 호루라기를 삑삑 불며 "거기서! 서지 않으면 쏜다!" 소리치면서 쫓아왔다.
혼비백산이 되어 죽을힘을 다해 뛰듯이 걸었다. 가슴은 두방망이질 치고 사색이 되어 앞만 보고 걷는데, 탕! 탕! 탕!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안내원은 빨리 걸으라고 소리쳤다.
그때였다. 곁에 있던 동료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언니는 머리를 감싸며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요! 어서요!"
손을 잡아 일으키려는데 쓰러진 동료는 꼭 살아서 고향으로 가라고 소리쳤다. 5일 동안 생사를 함께 해 온 동료를 차마 두고 갈 수 없었다. 울면서 계속 일으키려는데 또 총소리가 났다. 앞에 가던 안내원이 돌아서 언니의 손을 잡고 일으키려는데 또 총소리가 나면서 이번에는 안내원이 가슴에 총을 맞았다.
"윽!"
외마디 비명 후 안내원은 "순호씨! 빨리 뛰어요!"하고는 넘어졌다. 언니는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다.
기적 같은 힘이 어디서 생겼는지 죽을힘을 다해 펄쩍 뛰었다.
이젠 총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낮은 산등성이 숲 속에서,정신이 가물가물 해지면서 심연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언제 떠올랐는지 그믐달빛이 서편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믐 달빛은 스산하게 흐릿하기만 해서 임진강을 건너기에는 아주 좋은 밤이 된 것 같았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가끔씩 강 옆에 늘어져 있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려 서걱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목덜미가 서늘해 눈을 떴다 유월이지만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여명의 새벽이 뿌옇게 밝아오는 게 망막에 비쳤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 방금 건너온 다리를 바라보니 긴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인민군이 쏜 총알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죽은 두 사람에게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빌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흐르는 임진강물을 바라보니, 그 동안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아련히 떠올랐다.
1946년 이른 봄 친정아버지는 이북이 살기 좋다는 허위선전에 속아서 고향의 전답과 소를 팔아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를 왔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 보니 모든 상황이 달라서 망연자실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것을 알았다.
타향에서 새로 시작하기엔 녹록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이곳에서 터를 잡기 위해서는 이 지역 유력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서 집안끼리 혼사를 맺는 방편을 택했다.
그 후 아버지와 가족들은 혼례를 올린 언니만 철원에 남겨두고,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언니는 시집을 가자마자 호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시집에는 표독스러운 시어머니,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남편까지 시집 안에는 누구 하나 언니의 편이 돼 줄 사람은 없었다.
시아버지만은 어린 며느리가 가엾고 귀여웠지만 그렇다고 표 나게 대해 줄 수 없었다. 언니는 호된 시집살이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고 했다. 그 당시는 어린나이에 배고픔이 가장 서러웠을 것이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하루 세끼는 고사하고 한 끼 조차 먹기 어려웠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종같이 취급하면서 방안에서 밥도 함께 먹지 못하게 하고 부엌에서 먹게 하였고, 갖은 심부름만 시키고 밥 한술 떠 넣으려고 하면 온 종일 밥만 먹느냐며 밥그릇을 발로차고 물을 끼얹곤 했다. 언제나 도끼눈을 치뜨고 노려보면서 욕설을 퍼붓고 머리채를 거머쥐고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궁한 새는 숲으로 가도 쫏을 것이라도 있겠지만, 언니는 날아가는 벌레라도 잡아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욕설도 참을 수 있고 매도 참을 수 있지만 배고픔은 참을 수 없어 무말랭이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집에 있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만 같았다.
본래 언니는 꽤나 영특한 면이 있어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들과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정도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음을 굳히고 차근차근 귀향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귀향
그해 유월, 여름햇살이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에 언니는 고향마을에 들어섰다. 3년 만에 돌아오는 고향이 낯설지 않음으로 지금이나 그때나 변한 곳이 없었다. 뒷동산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바람도, 동네 앞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도랑도 변함이 없었다.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친정집 삽짝 문 앞에 다가서자, 불현듯 마지막으로 친정아버님의 간곡한 당부가 떠올라 쉽사리 집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희미한 불빛이 흔들리는 방안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머뭇머뭇 서성거리던 중,
"누구요?"
하면서 방문이 덜컥 열렸다.
남동생 창호였다. 어두운데도 금세 누군지를 알아보고,
"누부야? 누부야 맞지?"
하면서 한걸음에 달려와 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나다!"
"아이고 창호 많이 컸네?"
오누이가 얼싸안고 울자 안방에서 주무시던 조부모마저 바깥 소리에 놀라 마당으로 나오셨다.
난데없이 시집간 언니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온 식구들은 방안에서 모여 앉아 자초지종의 얘기로 온밤을 꼬박 새웠다.
그 동안 부모님은 부산으로 이사를 하시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막내 강호가 작년에 홍역으로 죽었다는 말에 친정집도 평온한 날이 없었음이 가늠되었다.
고된 시집살이를 피해 친정을 찾았지만 친정어머니가 겪은 고충까지 생각하니 언니의 슬픔은 더더욱 깊어만 갔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여명이 밝아오자 문 앞으로 나섰다.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어제 달궈진 초여름 열 기운에 텁텁했다.
예전에 늘 다니던 골목길을 따라 집 뒷동산에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 동안 차곡차곡 쌓여 있던 서러운 회한을 날려 보냈다. 어디선가 '고생 많았지 힘내라!' 라고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았다.
다시 찾은 고향 초등학교는 조용했다. 아직 등교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다. 예전 동무들과 놀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고 교사 뒤 우물은 이제는 큰 돌로 막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날이었던가?
그 해 학교는 발칵 뒤집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인 교장이 늦둥이 아들을 안고 우물 속을 내려 보다 실수로 안고 있던 아기를 우물 속에 빠뜨려 아기를 잃는 일이 생겼다.
그 일로 크게 낙심한 일본인 교장은 돌로 우물을 막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교장은 영특했던 언니를 조선인이지만 무척이나 예뻐하고 각별히 대해 주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교장선생님과 작별인사를 할 때 아이들과 교사들이 빙 둘러서고, 눈물에 젖은 교장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언니에게는 "선생님 되라" 꿈을 심어 주고 간 교장선생님이기에 몹시 슬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산으로
늦가을 추수를 끝내고 언니는 창호오빠를 데리고 부산으로 갔다.
부모님이 집을 지어 이사를 하고 난 뒤 언니를 불렀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마치 죽었던 이가 살아온 것처럼 기뻐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특히 어머니는 이북에 두고 온 언니 생각에 늘 애 태우며 살았는데 뜻밖에 언니가 돌아오자 가슴속에 있던 돌덩이가 치워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나 수척해진 언니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면 곱디고운 얼굴은 없어지고 가녀린 여자 몸으로 그 험한 삼팔선을 넘었을까 하는 생각에 "모든 게 내 탓이다! 너를 지옥 같은 곳에 밀어 넣고 우리만 돌아 온 것에 더욱 미안하다"고 하셨다.
언니는 새롭게 시작했다.
회사에 취직을 했고 예전처럼 생기발랄한 열아홉 살 처녀로 돌아갔으며, 우리 가족은 모처럼 찾아온 행복에 집안에는 웃음이 피어났다.
6.25 전쟁
그 행복도 잠시, 언니가 겨우 직장을 갖고 마음을 안정했던 시간은 잠시 뿐 이듬해 전쟁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한으로 물밀 듯 남으로 내려왔다. 완전히 전쟁준비가 된 인민군 앞에서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전쟁개시 3일 만에 서울은 인민군 손에 떨어졌고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는 사람, 졸지에 가족을 잃은 사람, 등 전쟁은 비참했다. 미국을 비롯하여 유엔에서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한반도로 파병을 결정하고 한국전쟁에 뛰어 들었다.
전쟁 개시일로부터 3개월 만에 남한 땅 대부분이 인민군이 장악하고 대구 부산만 간신히 버티며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여 국군은 버티고 있었다. 유엔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다시 국군과 연합군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고향 고령에 계시던 할머니는 연합군 전투기 사격으로 돌아가셨다. 전쟁 징집을 피해 산속에 숨어 살던 사촌오빠가 한밤중 집으로 내려 와 할머니 시신을 방안에 토장을 하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속으로 숨었다고 했다.
서울 수복 이후 부모님은 할머니 장례를 치룬 뒤, 할아버지를 모시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시댁으로
남북을 휩쓴 전쟁으로 우리 가족에게 뜻밖의 변화가 있었다.
이북에 살던 언니의 시댁이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을 왔고, 언니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아버지가 찾아 왔다.
집안 어른으로서 집안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불미스럽게 생각한다며 아버지를 찾아와 극구 사죄하며 언니를 데려 가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며 물리쳤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 통에 그것도 세 번이나 찾아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언니를 또 시댁으로 보낼 수 없다고 반대했고, 언니도 분명한 뜻을 드러내기 위해 가족들의 눈을 피해 집을 나가 버렸다.
하지만 운명의 쇠사슬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시댁의 집요함에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리시고 언니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사랑하는 딸을 마지못해 보내야 하는 아버지는 그 길로 지병을 얻어 평생 고생하셨다고 한다.
언니는 본인을 데리러 온 시아버지와 함께 시댁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시아버지도 피난 오면서 갖은 고생을 하시는 바람에 머리가 더 희끗희끗 해지고 주름도 깊게 패여 있었다. 그래도 이북 시댁에 있을 때 제일 아껴 주시던 분인데 마음이 몹시 안쓰러웠다.
차장 밖 뭉게구름이 목화솜처럼 보였다. 문득 전쟁 중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는 손자손녀들을 끔찍이 사랑하셨는데 어릴 적 큰 오빠가 늑막염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강 건너 용한 약국의 약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에 아버지의 만류에도 섣달 강을 건너가기로 하셨다.
뱃사공은 강이 얼어 배를 띄울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손자 생각에 얼어붙은 강을 걸어서 가던 중 강 중간쯤 아직 완전히 얼지 않은 부분이 '쩌저적'하는 소리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신령님께 제발 이 강을 무사히 건너 손자를 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의 모습은 얼음에 베여 치마 아랫부분은 피로 얼룩지고 얼굴은 꽁꽁 얼어 입도 달싹이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의 정성으로 가져온 약을 먹은 오빠는 기적적으로 살았다고 하셨다.
기차는 청도 역에 정차를 했다. 언니는 할머니 생각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바람을 쐬고 싶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에 내리는 사람, 타려는 많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역 밖으로 몰래 빠져 나왔다.
며느리가 사라진 것을 안 시아버지는 혼자 대구로 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보냈다.
언니는 대책 없이 저지른 행동에 후회를 하면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갈 곳이 없어 우남공원(현. 용두산 공원)으로 가 텅 빈 의자에 앉아 멀리 부산 앞바다를 보았다.
한 낮 햇살에 비친 바다는 물비늘처럼 반짝였고 선착장에 정박 중인 어선들 위로 먹잇감을 찾는 괭이갈매기 무리 떼가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한낮이라 공원은 한적했다.
언니는 여기까지 오게 된 사실과 상황에 울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오고 가로등이 켜지자 돌아갈 곳이 없음에 막막해졌다. 그 때 얼음공장을 하는 먼 친척 아주머니가 생각 나 그 집을 찾아갔다. 친척 아주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부족하다며 언제든지 오라고 했다.
당시 생각에 일 년만 숨어 있으면 시댁도 아버지도 나를 잊고 그 후에 내 살길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고 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만은 알려야 할 것 같아 작은 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반년 만에 작은언니를 앞장세우고 아버지가 찾아 오셨다.
언니의 남편이 한사코 언니를 데려 가겠다면서 반년동안 친정집에 눌러 있는 통에 순호언니는 할 수없이 남편을 따라 대구 시댁으로 들어갔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포기하고 시댁을 가니, 시아버지가 제일 반겨 주셨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못이기는 척하며 봐주다가 옛날 그 성질은 여전했다. 섬유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직원들이 근무시간에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언니가 대신 일을 보충하면서 직원들의 식사며 자질구레한 일들이며, 심지어 경리일까지 도맡아 하면서 밤낮 주야로 끊임없이 일을 했다.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았지만, 공장일이 바빠서 아기를 낳고 3일 만에 공장에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산후조리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시어머니 성정 또한 포악해, 아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서 애들은 늘 배를 곯았으며, 시아버지는 호인이시고 점잖은 분인지라 집안의 평화를 위해 참으시며 언니에게 늘 미안해하면서, "널 고생시키려고 데려오지 않았는데."하시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다.
남편의 외도
태산같이 믿어왔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몹시 슬펐다. 유일하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버님이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숱한 고생도 힘든 일에도 아버님의 격려로 버티어 왔지만, 앞으로 살아갈 것에 눈앞이 캄캄했다. 애초 남편에 대한 정은 없었고 표독한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더욱 난망했다. 그러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처넣고 사는 꼴이 되었다.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장을 세 놓고 서울에 가서 살자고 했다.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반대를 하면서 혼자 서울에 가서 살면서 기반이 잡히면 그때 가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남편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혼자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서울에서 식당을 차렸다.
그리고 공장을 팔고 난 후 조만간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이후 소식이 끊겼다. 얼마 후 시어머니이가 아들을 찾겠다며 서울로 가더니 보름이 지나도 역시 소식이 없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생각에 시어머니 방에 들어갔더니, 방안은 텅 비었고 썰렁했다. 다만 서랍 속에 언니에게 남긴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이미 새로운 여자에게 보라는 듯 "천금 같은 내 며느리" 하면서 노골적으로 언니에게 대놓고 비웃었으며, 남편한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언니는 치가 떨리고 분해서 휘청거리면서 방문을 나서는데 공장을 구매한 사람이 와서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독촉을 했다.
시어머니는 아들과 새 여자에게 공장 판돈을 몽땅 주었고, 언니와 애들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돈 한 푼 남기지도 않고 방 한 칸 구할 돈, 당장 끼니를 때울 보리쌀 한 줌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농간으로 남편과 새 여자랑 식당을 차리면서 철저하게 언니를 배척했다. 지난일 들을 생각해보니 저런 악독한 모자에게 조석으로 상 바쳐 섬겼던 게 억울했다. 시아버지와 공장을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세 식구 알몸으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쳤으며, 지난 일들을 생각해보니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모퉁이를 돌면 괜찮을까? 다음 모퉁이를 돌면 행복할까? 그렇게 속고 또 속으면서 이를 악물고 살아 보려했지만, 악랄한 시어머니와 남편한테 이용만 당한 철저한 바보였다고 생각됐다. 하지만 불쌍한 어린자식을 위해 이 악물고 살아야만 했고, 시장에 삯바느질 감을 얻어와 밤낮으로 재봉틀을 돌려 아이들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편 찾아서 서울로
순호언니는 쉴 틈 없이 밤낮으로 일을 하다가 결국은 과로로 병이 났다. 고민을 하다가 아직은 애들이 어려서 부모의 손길이 필요해 당분간 몸이 회복 될 때까지만 경제적 지원과 아이들을 돌봐주면 다시 일을 해서 살려고 했는데, 같이 식당을 하면서 모여 살자는 뻔뻔스런 제안에 언니는 큰 아들만 맡아 주면 나중에 데리고 가겠다는 말만 하고 딸애만 업고 나와 버렸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서울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입주가정교사 자리를 얻었다. 애가 딸려 있었지만 숙식제공이 되며 애가 순하고 예뻐서 그 집 가족들도 잘 대해 주었다. 몇 달 동안 편하게 쉬니 몸이 회복되고 마음도 편했다. 그렇지만 남편에게 두고 온 아들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회복이 되는대로 돈을 벌어 아들을 데려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주인 집 아주머니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아이가 아직 어리고 당신도 젊은데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재혼을 하는 게 어떠냐고, 그리고 애기는 애기가 없는 부자 친구에게 양녀로 보내자고."
그러면 애기도 부유한 가정에서 귀여움을 받고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동생 같은 마음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며 언니에게 제안을 했다.
언니는 이 말에 그 동안 참아온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났다.
내 몸 하나 편하자고 아이를 남의 집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몇 날을 서울시내 다른 일자리를 구하러 다녀도 애 딸린 여자를 받아주는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박복한 어미보다 부잣집 양녀로 사는 게 나을 수 도 있겠다."라는 생각에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제안을 수락했다.
딸을 데리고 시장에 가서 옷도 사 입히고 공원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하루를 애하고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부잣집 부부가 아이가 좋아할 만한 큰 인형도 준비해서 애를 데리러 왔다.
부부는 딸애를 보자마자 너무 예쁘다며 무릎에 앉혀 놓고 볼을 부비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니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무릎에서 내려와 언니의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가지고 있던 인형을 던져 버리자 모두 놀라 달래고 얼러도 막무가내로 밀 쳐내고 언니 치맛자락만 잡고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언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무슨 몹쓸 짓을 하고 있는지" "아가 이 어미가 잘못했다." 부모 자식 간의 천륜을 함부로 끊으려고 했던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어린 아기가 깨우쳐준 것이었다.
사실은 언니는 딸애를 입양시킨 후 이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끝낼 작정이었다.
늑대를 만나다
그 다음날 애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왔다. 언니는 생활용품 장사를 하러 시골이나 시내 변두리 이곳저곳을 다녔다. 장사를 하다 날이 저물면 시골집 뒷방에서도 하룻밤 신세도 지고 때로는 식당에서도 하룻밤을 보냈지만 고된 줄 모르고 애기를 업고 다녔다. 하루가 저물고 잠자리에 들 때면 두고 온 아들 생각이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구박 받고 사는 건 아닌지 생각만 하면 가슴 한 켠이 시리도록 아팠다.
"그래 얼른 돈 모아서 작은 가게라도 내면 데려와야지"
그때까지만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지내게 해달라고 온 마음으로 빌었다. 다행히 잔병치레 없이 자라는 희야가 고맙고 그리고 곁에서 말동무라도 되어주는 덕에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날도 시골에서 가지고 갔던 물건들을 다 팔고 오니까 날이 저물었다. 인근에 여관까지 가려면 꽤 먼 거리였다. 여름이라 춥지 않으니까 여관비도 아낄 겸 산비탈 빈 헛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곳으로 갔다. 문짝이 없어 좀 꺼림칙했지만 헛간이라도 짚들이 가득 쌓여있고 문 옆에는 농기구들이 놓여있었다. 뒤쪽을 갔다. 짚을 깔고 애기를 눕혔다. 그리고는 언니는 벽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날이 밝는 대로 서울로 가야지 하면서 하루 종일 길을 다녀서 피로가 한꺼번에 물려와 심연에 나락으로 한없이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할퀴면서 휙 지나갔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면서 눈을 번쩍 떴다. "헉!" 외마디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아뿔싸! 이걸 어쩌나! 순간적으로 잠든 아기를 덥석 안아 품에 안았다. 본능적으로 아기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앞뒤를 둘러보았다. 뒤는 벽이고 사방은 짚들만 가득하고 앞 문 쪽에는 파란 눈의 늑대가 하얀 달빛아래 긴 꼬리를 이리 털썩 저리 털썩 대면서 다가오는데, 도망갈 길은 보이지 않고, 절체절명에 순간이 가슴을 조이면서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입구에 쇠스랑이라도 가져다 옆에 두었더라면 왜 미쳐 그 생각을 못했을꼬?
옛말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늑대라는 짐승도 서 있거나 앉아있어도 정신만 차리고 있음 덤비지 않는다고 했던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는 늑대가 많아서 수시로 마을에 내려와서 돼지새끼도 물어가고 여름에 멍석에 잠든 아기도 물어가는 사례가 많았다. 아버지는 장에 가서 돼지새끼를 사서 지게에 담아올 때는 의례히 늑대가 앞뒤를 따라온다고 했었다. 아버지는 담력이 크신 분이라 오히려 친구삼아, 파란 눈을 갖고 따라오면 칠흑 같은 어둠을 밝혀줘서 괜찮지 않느냐면서 웃으시던 아버지, 지금도 아버지가 "순호야 겁 먹지마라! 정신 바짝 차리고 눈 속에 힘을 주어라. 정신 줄을 놓치면 안 돼. 늑대라는 짐승은 혼을 빼서 덤비기 때문에, 눈에 힘을 주어라. 그럼 물러간다.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도 넌 살아남았어." 지금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었다. 땀은 비 오듯이 흘러내려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꽉 낀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후회가 밀려왔다. 멀어도 여관까지 갔어야 했는데, 여기서 우리 모두가 죽는다면 차라리 아기만이라도 그 집 양녀로 보내줄 것을….
우리 모녀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지금당장 저 거대한 몸을 날아 달려들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각을 다투면서 무거운 정적이 흘러가고 일각, 이각, 삼각, 늑대와 눈싸움은 계속 이어지고….
그 때 늑대가 돌아섰다.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도운 걸까? 저승에 계신 아버지가 도우신걸까? 한숨을 쉬면서 잠든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쌕쌕거리며, 아기는 그냥 잠만 자고 있었다.
딸의 상처
작은 가게를 얻어 장사를 했다. 이제 딸아이는 다섯 살이 되었다. 일찍이 철이 들어서 엄마를 꽤나 잘 도와주고 그런 대로 장사가 잘 되어서 아들을 데려오려고 했다. 학교에도 보내야 했기에….
호사다마라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이였던가, 이제 생활도 안정되고 셋이 함께 살면 되겠다 싶었는데 몸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에 갔더니 심각하다고 입원을 해야 된다고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병원 문을 나섰다. 온통 언니의 하늘은 잿빛같이 어둡기만 했다. 남들은 잘만 사는데 수시로 나오는 불행의 그림자는 또 다시 절망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며칠을 고민하다 잠시 딸애를 남편한테 맡겨야겠다고, 딸애한테는 엄마가 아프니까 얼마동안만 아버지한테 있어달라고 했다. 엄마가 병 나으면 데리러 갈 테니까 오빠도 있고 착하게 있으면 모두들 좋아할 테니까. 그때는 오로지 그 길밖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가 없었다. 훗날 이일로 인해서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딸에게 줄 줄이야 ……!
딸애는 식당 뒷방에 아들하고 살았다. 아들은 학교에 가고 하루 종일 방안에서 혼자 놀았다. 식당을 하니까 밖에는 못 나오게 해서 친구들하고 놀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조그마한 봉창으로 키가 작아 까치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낙이였으리라! 아이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열 밤 자면 데리러 온다는 엄마는 오지 않고 오빠는 학교 갔다 오면 식당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혼자서 밥 먹고 혼자 놀았다. 어쩌다 아버지가 잠깐 들여다보고 할머니는 시골에 가셨는지 한 번도 보이지 않고, 엄마가 보고 싶어 울면 오빠가 좀 있으면 엄마가 데리러 올 거라고, 아버지가 알면 혼난다고 달래기도 했다.
어느 날 희야는 화장실 간다고 하고선 도망을 쳤다. 어린애라 얼마 못가서 붙들려오고 그날은 아버지한테 맞고, 그 여자한테도 수시로 맞고 꼬집히기도 했다. 그럴수록 틈만 나면 도망을 갔다. 몇 번을 그러니까 아예 방문에다 자물쇠를 채워놓고 밥 먹을 때면 열고 화장실도 방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어느 날 이른 저녁을 주고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도망을 갔다. 죽을힘을 다해서 다리 끝까지 왔다. 언덕 위에 엄마친구 이모 집을 찾아가면 엄마를 만날 수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왔는데, 겨울이라 금방 어두워서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아 다리 난간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너무 추워서 발발 떨면서 마침 퇴근시간이라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다 말고 다시 되돌아와서, "얘, 아가야 왜 이러고 있어 집에 가지 않고!" 딸애는 아저씨를 올려다보고는 "아저씨 엄마 찾으러 왔는데, 너무 어두워서 이모 집을 못 찾겠어요." "그럼 내 등에 업혀라 아저씨가 찾아 줄게?"
12월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아저씨는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딸애를 업은 채로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 혹시 이 아이를 아느냐고, 몇 집을 계속 문을 두드려가며 물었지만 모른다고…, 그 때 등에 업힌 딸애가 집이 낯이 익는지 "이모 이모" 하면서 불렀다. 문이 열리면서 방금 희야 목소린데 희야 가 이 밤에 웬일이냐고! 어떤 아주머니가 나왔다. 등에 업힌 희야가 이모하고 불렀다.
낯선 아저씨 등에 업힌 애기를 안았다. 꽁꽁 얼어있는 애기를 우선 방안에 이불속에 넣고 아저씨를 찾았더니 벌써 가고 없었다. 훗날 생명에 은인인 그 아저씨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찾으려 했지만 못 찾아서 못내 아쉬워했었다고 한다. 몸이 녹았는지 희야 는 '이모 엄마는?' 그래 오늘밤자고 내일 엄마를 찾아보자 하고는 애를 다시 눕혀두고 온 몸을 살폈다. 군데군데 꼬집힌 자국이며 멍든 곳이 많았다. 통통하게 예쁜 얼굴이 핼쑥하게 여윈 모습에 아직도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일은 저 엄마를 찾아줘야지.
한 밤중에 아들 원이가 찾아왔다. 등 뒤에 아버지를 데리고 희야 찾으러 늦게까지 다니다 혹시나 해서 이모 집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 길로 희야 는 끌려가서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귀 고막까지 터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언니 친구는 수소문해서 며칠 만에 언니를 만났다. "희야 저래두면 죽을지도 몰라. 빨리 데려와야 한다고," 한달음에 식당엘 찾아갔다. 방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있었고, 소리치면서 당장 문을 열라고 했다. 방에는 요동 없이 누워있는 딸애를 보았다. 이건 딸애 모습이 아니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빈껍데기만 남은 딸애의 모습이었다.
6개월 만에 만나는 딸아이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고, 방에는 악취가 진동을 했고, 밥그릇에는 언제쯤 밥인지 말라붙어 있었다. 언니는 울지도 못하고 외마디 비명이 새어나왔다.
"희야…!."
병원에 입원을 하고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나와서는 "당신이 애 엄마냐고, 그냥 죽게 버려두지 왜 데리고 왔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사경을 헤매는 딸을 안고 의사한테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전 후 이야기를 모두 했더니, 그제야 모든 사실을 알고 매우 분개했다.
인면수심이라 했던가. 아무리 비정한 아버지라 했지만 고막이 터졌을 때 진작 치료받았으면 고칠 수도 있었는데, 평생에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희야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얼굴에 핏기가 돌면서 깨어났다. 엄마를 알아보고는 계속 울기만 했다.
"희야 잘못했어. 진작 널 데리러 갈 것인데,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엄마와 딸은 부둥켜안고 오랫동안 울었다. 영양실조와 멍든 곳은 치료하면 낫지만 고막은 고칠 수가 없다고 했다. 마음에 상처 또한 얼마나 컸을까? 이번에야 말로 지긋지긋한 인연의 고리를 끊어내려고 했다. 언니는 아동학대로 남편과 그 여자를 고소했다. 병원에서도 진단서와 증거자료가 될 수 있는 사진까지 함께 만들어줘서 법원에 제출했다. 재판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건을 맡았던 국선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 비정한 아버지와 그 여자는 마땅히 법에 심판을 받아야 되겠지만 먼 훗날 두 아이들이 받아야할 또 다른 상처들을 한번쯤 생각해 보심이 어떻느냐고, 그 당시에는 교도소 갔다 오면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져서 자녀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이 어떤 직종을 가지게 될지 모르지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느냐고….
순간 언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한 마음에 생각 없이 했지만, 고소를 취하했다. 희야 는 한 달 후에 퇴원을 하면서 원이도 같이 데려왔다. 자식이 있으니까 이혼만은 하지 말자고 해서 앞으로 서로가 인연을 끊고 살자고 하면서 헤어졌다.
마지막 효도
언니는 원이랑 희야랑 셋이 살기 좋은 곳으로 다세대 주택을 사서 이사했다. 집에서 나오는 월세만 받아도 충분히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희야는 자라면서 인물이 뛰어났다. 그러나 수시로 귀가 아파서 고통을 호소했다. 그 옛날 아버지한테 맞은 고막이 터지면서 후유증이 남았고, 물이 가끔씩 흘렀다. 언니는 그럴 때마다 좋은 약이랑 이름있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했다.
어느 해 학교에서 예술제를 하는데 희야가 혼자 무용을 하게 되어 무용복을 사 입혔다. 천사처럼 예뻤다.
"희야! 돌아서 봐라! 너무 예쁘다."그런데도 그냥 서 있기만 하는 희야를 보면서 또 한 번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한 쪽 귀가 안 들려 웃기만하는 희야를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언니는 희야에게 마음과 몸에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무대에서 마음껏 춤추게 하는 길 밖에는 없을 것 같아 계속 무용을 시켰다. 희야는 차츰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 유명한 무용선생 제자로 들어가면서 큰 무대에도 가끔씩 서게 되었다. 희야가 행복해 하면 언니도 행복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으로부터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날라 왔다. 둔기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 갔고, 늘 엄마 속만 태우기만 했던 일을 이제 찾아뵙고 못 다한 효도를 하고 싶었다. 그날 대구행 마지막 열차는 끊어지고 다음날 열차로 가야될 것 같아 애들한테는 혹시나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잘 견디고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놓았다.
어머니는 대구에 사는 큰 오빠와 함께 살고 계셨다. 그리하여 순호언니는 꿈속에서도 그립던 엄마를 만났다. 옛날 모습은 간데없고 파리해진 모습으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엄마를 "엄마, 엄마 제가 왔어요. 순호가!" 엄마는 겨우 눈을 떴다. 그토록 보고 싶던 딸이 눈앞에 보였다. "어? 니가 왔나. 참말로 니가 왔네."하시면서 힘없이 손을 내밀었다.
오랜 세월 끝에 모녀는 만났다. 엄마 앞에 한없이 울었다. 쌓이고 쌓인 서러움을 눈물로 토해냈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얼마나 그립던 엄마인데 며칠째 곡기를 끊으시고 겨우 목숨 줄을 이어 온 것 같았다. 죽기 전에 너 언니 한번 봐야한다고, "이제 널 봤으니, 눈 감을 수가 있겠구나!" 하시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의사를 불러왔다. 그 시절에는 의사가 왕진을 다녔다. 링거를 꼽고 최선을 다해서 낫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렸다. 형제들도 모두 모였다. 처음으로 칠남매가 다 모였다. 기력이 다 떨어져 며칠 넘기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 계속 영양 주사와 한약을 드시게 했다. 처음에는 차도가 없어 사경을 헤매셨다. 언니는 애가 탔다. 어떻게든 엄마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에 3일 기도를 드리려고 절에 갔다. 밤낮으로 절을 하면서 부처님께 마지막 딸로서 최선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엄마를 살려달라고,
언니의 정성에 부처님도 감동하셨는지 차츰 엄마가 기력을 회복했다. 일주일동안 언니는 걷지도 못해 방안에서 기다시피 하면서 엄마를 간호했다. 한 달이 지날 때쯤 엄마는 문밖출입을 할 정도로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리고 한시름을 놓고 난 후 언니는 서울 집에 남겨둔 애들 걱정에 서울을 가야만 했다.
"엄마 서울에 있는 원이와 희야 보고 금세 다시 오겠소"라고 올 것을 약속하고 서울로 갔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 겨울 엄마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훗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가슴 가득히 회한과 슬픔으로 남아 있었다고…. 세 들어 있던 세입자가 언니가 없는 사이 몇 사람이 공모해서 돈 뜯어낼 요량으로 사기를 쳤다. 할 수 없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법원에 고소장을 냈다. 빨리 끝날 것 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재판은 삼년동안 끌었다. 그 때 만난 변호사가 헌신적으로 언니를 도와주었다. 재판 관계로 늘 만나면서 두 사람은 정이 들었다.
변호사는 처음부터 언니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고 했다. 언니는 나이어린 신랑 만나 시어머니 질투 때문에 자연히 멀어졌고 지금은 남보다 못한 원수지간처럼 살았는데 중후하고 인품이 있는 그 남자에게 따스한 봄바람이 느껴졌다. 재판 때마다 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언니의 항변에 판사도 놀라워했다. 변호사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신을 변호하는 지혜에 탄복을 했다. 순호씨가 법 공부를 했으면 우리들보다 훨씬 잘해낼 것이라고, 그렇게 하여 재판은 3년 2개월 만에 언니의 승소로 끝나고 사기극을 벌였던 세입자들은 법에 심판을 받았으니….
찾아온 인연을 보내면서 엄마와의 약속을 법원문제로 동분서주하다보니 엄마의 부고장을 받고 평생에 엄마의 가슴에 회한을 남겨 놓은 게 한이 되어, 방안에다 빈소를 차려놓고 아침, 저녁으로 엄마를 추모하면서 상석을 올렸다.
어느 날 곗돈을 타고 애들을 데리고 저녁식사를 하고 집에 왔는데, 선뜻 대문에 발을 들여놓자 머리끝이 쭈삣한 게 소름이 끼쳤다. 뒷집을 찾아가 아저씨에게 우리 집에 같이 좀 가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저씨는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가 빈소에 흰 커튼을 홱 젖혔다. 곗돈 태워 주었던 계주가 칼을 들고 서있었다. 아저씨는 방문을 열었을 때 커튼 밑에 무언가 움직임이 있었지만 나가다 말고 되돌아와서 열어봤는데, 아저씨는 여자를 방바닥에 팽개치고 경찰을 부르려고 밖으로 나갔다. 곗돈을 뺏을 요량으로 먼저 와서 기다린 것이었다. 울면서 돈이 급해서 그렇다고 용서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언니는 그대로 용서해주도록 아저씨를 만류했다. 이번에도 엄마의 영혼이 언니를 지켜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삼년동안 법원 관계로 변호사와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하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했고, 그 또한 마지막 사랑이 되었다.
사랑을 보내면서
언니는 따뜻하고 중후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그 사람의 인품에 차츰 호감을 느꼈다 그 분 역시 언니의 똑 부러진 성품과 기품이 있어 보이는 모습에 처음부터 호감을 갖고 기나긴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헌신에 가까울 정도로 열정을 갖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몇 달 만에 한 번씩 재판을 받을 때마다 만나서 계획을 세우고, 재판에 대항할 법적인 문제를 의논했다. 삼년동안 자연스럽게 변호사와 의뢰인의 자격으로 데이트를 하다 보니, 두 사람 간의 사랑이 깊어졌다.
언니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기도 했다. 애들도 법원문제로 가끔씩 집으로 찾아오는 그 분이 싫지 않았으며, 그분도 애들을 진심으로 보살펴 주었다. 때로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우리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걸 누구보다 더 언니는 알고 있었다. 아직 그분은 미혼이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을 애 딸린 기혼녀가 그 분의 반려자가 될 수는 없었다. 언니 나이 삼십대 후반이고, 그 분은 노총각이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불 보듯이 뻔 한 사실인데, 그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시절 그 분과의 사랑했던 기억들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했다. 지독한 몸살을 앓고 난후 느낀 것은 인연이란 때로는 만나지 말아야 했던 일이였는데, 그러나 처음으로 내게 찾아온 행복이었고,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삶이였다. 그 분은 내 지난날에 불행했던 과거를 행복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무성한 나무가 되어줄 것을 약속했으며, 그 사람의 체온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살아 있음이 증거였다. 끝까지 내 손을 놓지 않으려는 그 손을 내 손에서 놓으려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만나서 생각해 보자고 했다. 이번에도 안 나오시면 단념하겠다고……!
몇날며칠을 고민 끝에 약속 장소로 나갔다. 마음속에는 한없이 그 사람을 붙잡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 분을 보내야 한다고 아예 만나서는 안 된다고 찻집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리고 끝내 돌아서고 말았다. 언니의 마음에 새겨진 고통의 상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벌써 어둠이 깔린 길거리에는 자동차들이 불빛을 가르면서 쌩! 하고 달려 나가곤 했다. 밤거리를 휘청거리면서 걷는데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눈물이 절절이 흘러 내렸다.
볼테르는 '눈물은 슬픔의 말 없는 말'이라고 했던가. 슬프다고 말하는 것보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은 슬픔의 말보다 더 참말이라고 했다. 평생을 내 옆에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했던 그 말은 세월이 흘러도 생생하게 생각 날것이고,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도 애틋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물은 흘러도 여울은 남는다더니, 세상사 인연은 가고 오는 길 인 것을 그 사람을 보내고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세상 어느 것도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언니의 절절했던 처음이자 마지막인 첫사랑은 애잔한 마음으로 그렇게 보내면서, 들녘에 서 있는 겨울나무처럼 얼고 터지는 고통을 버티어내야만 더 푸르고 싱싱한 제 빛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저 들판의 나무는 침묵으로 나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삶을 이기는 것도 가지는 것도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스스로 내려놓아야 했기에 아픔은 컸지만 그래도 마지막 내 자존심이 아니었던가!
그 해 아들 원이가 급성 뇌종양으로 수술 받고 일주일 만에 하늘 나라로 떠나갔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미쳐버리고 싶었다.
옛 말에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단장에 아픔의 심정을 어찌 필설로 다 쓰겠는가.
끊어지지 않는 인연
세월이 많이 흘렀다. 희야가 결혼할 나이가 됐다. 막상 결혼을 시키려니까, 아버지라는 존재가 불거졌다. 서울 하늘같은 곳에 살면서 딸 결혼식에 모른척하고 넘어가려다가 사돈네 집에 할 말이 없어 할 수 없이 예식장에 초대했다. 평생을 원수처럼 살면서 오만가지 악다구니를 퍼부으면서 죽을 때까지 안보고 살자했는데, 호적상에 버젓이 살아있어 다정한 부부인척 혼주석에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눈길조차 보내고 싶지 않은데, 친척들의 축하소리가 들리면서 참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시어머니도 아들 따라 결혼식에 참석했다. 손녀사위 절까지 받으면서….
희야는 연예계에선 매우 인기가 좋았는데, 언니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해서 포기해야만 하는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언니의 병원비가 엄청나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취소하고 일본으로, 외국으로 공연하러 다녔다. 한창 CF, 방송국 출연들을 접은 채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순호언니는 아이 낳고도 산후 조리도 못했고, 젊을 때 몸을 너무 무리해서 무릎관절이 아프면서 온 몸에 류마티스 관절염이 전이가 되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계속 누워만 있었다. 희야는 좋은 약이랑 병원치료를 하면서 엄마를 살려냈다. 그리고 악착 같이 돈을 모아 넓은 아파트를 사서 엄마를 모셨다.
미움도 사랑처럼
딸의 결혼식으로 인해 형부는 가끔 언니 집에 찾아오는 것이었고, 할머니도 슬그머니 찾아왔다. 아직 호적상으로 며느리인지라, 할 수없이 받아주게 되었다. 나중에야 알고 봤더니, 시어머니는 지금까지 살고 있는 표독한 작은 며느리에게 갖은 학대를 받으면서 오갈 데 없는 차에 슬그머니 순호언니네 집에 들어오려는 심사였다. 그동안 시골 친척집으로 전전하면서 오랫동안 눈치 밥을 먹으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나이 70이 넘어서까지 남에 집에 더부살이 하는 게 안 돼서, 작은 며느리한테 가 있었는데, 밥을 굶기기 일쑤였고, 저녁밥은 아예 주지 않아 물로 배를 채웠으며, 형부와 시어머니는 구박을 받고 사는 신세가 되었다. 과거 어린 며느리를 굶기고 구박하고 못 살게 굴던 시어머니는 그 업보를 고스란히 말년에 그대로 받고 살게 되었다.
어느 날 형부가 언니를 찾아 왔다. 빈털터리가 돼서 오갈 데 없고 의탁할 곳이 없어 언니에게 사정을 했다.
과거 언니에게 모질게 군 점에 대해 사죄를 하면서 과거를 잊고 시어머니와 본인을 좀 받아 주길 간청했다.
정말 어이없는 말에 말문이 먹혔지만, 늙은 시어머니를 보니 측은 지심에 당분간 들어 와 살라고 했다.
그렇게 언니는 시어머니를 11 년간이나 봉양했다.
언니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시어머니 탓도 아니고 남편 탓도 아니고 모두 내 전생의 업보가 아닐까? 시어머니의 인생도 참 불쌍하게 보였다.
늘 마음에 들지 않아 밀어내기만 했던 남편도 가여운 마음이 들어 같이 살기로 했다.
언니는 이제 시어머니와 형부에 대한 원망과 미운 마음을 털어 버리기로 했다.
이왕 받아 주기로 한 마당에 더 이상 옛 묵은 감정을 담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애미야! 내가 사람으로서 정말 못할 짓 많이 했지? 갓 시집 온 어린 며느리를 구박하고 평생 원수처럼 대했던 나를 용서해 다오"
언니와 시어머니는 서로 두 손을 맞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형부는 지난날 잘못을 속죄하면서 언니를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오랜만에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삶으로 돌아왔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이었다.
몇 년 만에 언니의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다. 병환이 깊어 이젠 바깥출입을 못하고 있다고, 일간 한 번 다녀가라는 내용이었다.
편지 받고 며칠 후 언니가 남편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언니의 장례를 치른 그 날은 봄바람이 세차게 불어 벚꽃 잎이 눈처럼 하얗게 세상을 덮은 날이었다.
어디선가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야! 내가 온 이곳은 편하고 참 좋다. 이제 여기서 영원히 살 거야. 여긴 아등바등 미련 떨며 살지 않아도 되고, 하여튼 너무 좋구나!"
한 많은 여인의 일생이었다.
친정집 가족의 안위를 위해 선택된 결혼에서 가시밭길을 걷는 인생이 되어 버린 언니의 일생은 그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이미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아님 시댁인가, 원수 같은 남편인가,
어디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속 시원히 풀어줄 데는 없었다.
언니는 현명한 답안을 찾았다.
본인의 인생을 화해와 용서로,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당선소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봅니다. 지금은 긴장되어 있던 온 몸의 세포가 사르르 제 자리로 되돌아가며 짜릿한 전율을 일으킵니다.
먼저 떠난 순호언니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그려집니다. 사랑과 미움을 한 몸에 안고.......!
여행 중 기쁜 전화를 받고, 제일 먼저 서울에 사는 언니의 딸 희야에게 소식을 전했지요. 폰에서 울먹이는 질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모 사랑해요" 라고.
인간의 감정은 슬플 때에 눈물이 나지만, 너무 기쁠 때도 눈물이 나는가봅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서울에 사는 맏딸에게 카톡을 날렸지요. "와! 우리엄마 대박이다!" 다시 정신을 차려 우리가족 카톡에도 소식을 알렸지요.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아들, 손자, 며느리들이 앞 다투어 축하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어머님! 대단하십니다."라고.
구미에 사는 둘째가 회사의 업무가 바쁜데도 밤을 세워가며 워드작업을 해준 보람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대구예술대 시니어아카데미 우리 반 학우님들의 응원도 큰 몫을 차지한 것 같습니다.
작년에 상 받을 때는 우리가족이 바쁘다고 한 명도 참석치 못했지만 금년엔 4남매 모두 축하해준다고 야단법석입니다. 꽃다발 속에 파묻힐 것 같고요. 우리 반 학우님들 보기에 체면이 좀 설 것 같네요.
먼저 저의 어설픈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살다보니 어려움을 참고 살아온 날들에 감사드리고요, 희수를 바라보는 이 나이에 대박을 터뜨린 나 자신에도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그리고 주변에서 자상히 지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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