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이 '해골'인
굶주려 뼈만 남은 아이가
병역 기피자가 되고
육군 일등병이 되었다가
해병대 대위가 되었고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노동자의 지도자로 온 힘을 다하다
미국으로 와서
정신병 진단을 받았으나
그것을 극복하여
미국 연방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고
긴 타국 생활로 잃어버린 조국의 언어를 찾기 위해
한글을 배우며
작가의 꿈을 꾸는
흘러간 굴곡의 이야기
그때 흘리던 눈물은 지금도 흘릴 수 있는데
한번 떠난 잎은 다시 그 자리에 올 수 없는 나는
낙엽입니다
살 만하니 병들고
다시 고국에 돌아가 살 수 없는 처지의
썩은 낙엽입니다
고국을 떠난 지 40년 가까이 국적 포기를 안 한 이중 국적자입니다
그것은 저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중학교는 굶어, 결석을 밥 먹듯이 해서 겨우 졸업을 했고
고등학교는 고1 때부터 취직 반에 들어 고2(?) 때는 민중서관
활판 부 수습생으로 고3(?) 때는 취직 생활을 위한 연습, 졸업 후
K 서적에 입사하여 직장인이 됐습니다.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어 S 대 입시를 봤는데
수학 문제가 6문제인가, 7문제인가 나왔는데 5-6문제는
전혀 알 수가 없었고, 나머지 한 문제도 아리송해 도중에 시험장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종로 학원가에서
수학을 중점적으로 공부를 하고 통금 사이렌 직전에 집에 왔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입시에 또 낙방, 안 되겠다 싶어
다음에는 다른 과를 지원하기로 하고
취직이 쉽다는 후기 대학인 S 대에 입학, 몇 개월 다니다가 저는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저의 별명은 해골, 또는 왕 눈깔이었습니다.
어릴 때 너무 굶주려 바짝 말라서 눈만 크게 보이다 보니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런데도 직장과 학교나 학원에 잠을 뺏겨
수면 부족으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입영통지서까지 나왔습니다.
저의 학력은 이것까지 입니다. 그래서
배운 것이 많지 않아 이국 생활 40년, 영어도, 한글도 제대로
못 하는 반벙어리입니다.
삼랑진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온 부모님께서는
영등포 꿀꿀이 죽을 파는 시장 부근에 자리를 잡으셨다.
나는 영등포 영중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했고 얼마 후
동쪽에 사는 학생은 (소문에) 영동초등학교로 (나중에는 남쪽에
사는 학생은 영남초등학교로) 재편성하여 나는 3학년 때에
영동초등학교로 다니게 됐다. 교실은 천막이었다.
이(기생충)들이 너무 많아, 특히 여자아이들 머리에는 하얀 것들이
기어 다녔고 서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털실로 짠
옷이나 장갑에는 쌀알만 한 이들이 박혀 있었다.
남자아이들 머리나 몸에는, 기계 총, 도장 부스럼이라는
피부병이 많았다. 학교에서는 DD T 살충제를 주어 그것을 조그만
주머니에 넣어 상의 겨드랑에 달게 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목욕이나 빨래를 할 여건이 안되어 목욕은
일 년에 한 번 설날전에 할까 말까 였고 빨래도 자주 할 형편이 안되어 이가 들끓었다. 특히 서캐는 일일이 잡을 수 없어 촛불에 그슬리면 따따따 인민군 따발총 소리를 냈고 추운 겨울에는 얼어 죽으라고
옷가지들을 밖에 내 걸었다.
우리 가족들도 미군 부대 식당 쓰레기통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를
끓여 파는 꿀꿀이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나 꿀꿀이 죽은
돈 주고 사 먹어야 하므로 부담이 가서
자주 먹지는 못 했다. 담배꽁초도 들어있고 동전, 깡통 뚜껑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코 푼 휴지도, 가래침도 있다고 했으나
그때는 그것을 따질 형편이 못 되었고 오히려 그런 것이라도 있는 게
다행으로 여겼다. 운이 좋으면 칠면조고기도, 햄, 소시지 조각도 먹을 수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왕건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께서는 신기하게도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미군 물자인 페인트, 잡화 등을 파셨는데 장사가 잘되는지
가게를 차리셨고 "자고 먹을 것만 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아저씨를 점원으로 두셨다. 가게 안에 군용 목침대에서는
아저씨가 주무시고 가게 뒤엔 우리 가족이 살았는데
어느 봄날, 가게를 아저씨에게 맡기고 우리 가족은 창경궁 벚꽃
구경을 갔다 왔는데 집과 가게가 불에 타서 재만 남아 있었다.
외상으로 가져온 물건들이 많았다고 했고, 더욱이 아저씨가
안 보여 아버지께서는 "내가 김 씨를 죽였다"고 통곡을 하셨다.
"그렇게 착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만 구경하러 갔다"고
어머님께서도 우셨다. 부모님께서는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김 씨 아저씨를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화제로 빚을 잔뜩 지고 갈 곳이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종이상자와 군용 천막 천으로 잠자리를 만드셨고
술과 담배를 못 하셨던 분이 술과 담배를 시작하셨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매일 우셨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저씨 혼령을 볼 낯이 없다고 이사를 했다.
전 해군 본부와 장훈 중 고교가 있기 전 신길동 고갯마루
공동묘지를 옆으로 한 판자촌에 있는
아는 이의 헛간을 빌려 보금자리를 만들었지만,
빚쟁이들이 아우성치는 난장판의 나날이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아예 방 한구석에 살림을 차렸다.
돈을 받기 전에는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중학교 입시가 내일모레인데 공부는 무슨 공부인가
밖으로 겉돌았다.
메뚜기, 도마뱀을 잡으러 다녔고
남의 밭 고구마, 무를 캐 먹고
관악산, (서울 대학교가 생기기 전) 검지산(산 이름)부근의 절과 기도원 근처에서 칡뿌리를 캐다가 젊은 스님, 박수무당에게 얻어맞았다.
다행히 봉천, 사자암, 신림, 난곡, 고개에는 (달동네가 생기기 전)
서낭당이 있어 북어, 하얀 쌀밥 (잿밥), 과일, 어떤 날은
고기산적, 돈도 있었다. 그것들은 나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운이 좋아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기운이 없어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결석을 하자 반장과 담임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셨다.
이틀을 먹지 못해 송장처럼 널브러진 우리 가족을 봤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교우 돕기 쌀 한 줌씩 가져오기 운동을 벌여
김익주 담임 선생님은 몇 명의 급우들과 쌀 봉지를 들고
집에 오셨다. 그러나 "고맙습니다"라는 말보다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자존심의 발로였고
자신에 대한 최초의 반항이었으며 현실에 대한 부정이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참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러나 끝마무리를 잘하는 자신에 신뢰감을 가질 수 있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친구들 고마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리중에 가장 예민한 소리는 아버지 발소리다.
빈곤은 먹이에 집중하다 보니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의 움직임이
새끼의 전부다. 엄마가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역시
우리 남매들이 가장 잘 이해되는 음역이다.
동생 중에 절대음감을 가진 동생이 있다.
내 바로 밑에 여동생, 정말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동생이다.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동생은 "아버지가 오신다" 하면
정말 아버지께서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 손에 들고 있는 봉지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알고 있어 우리 가족 사이에는 개 코, 또는
도사, 울보라는 별명을 가진 동생이다.
배고픔에 지친 가족들은 여동생처럼 절대음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동생이 "아버지다!"하고 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 손이
빈손이면 울보는 울대를 몇 옥타브 올려 사정없이 울었다.
보고만 있던 우리들도 따라 울었다. 엄마도 울보를 부여안고 우셨다.
아버지도 눈물을 보이셨다.
기절초풍을 할 일이 생겼다.
죽은 사람이 시장 바닥을 걸어 다닌다는 이야기다.
방물장수 할머니 말씀이 김 씨 아저씨를 시장에서 보았다고 하신다.
부모님은 믿지 않으셨다. 잘못 보셨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귀신 이야기는 부모님 가슴에 더 큰 상처만 만들고
흐지부지 사라졌다. 경찰서에서 김 씨는 외상으로 들어온 자재와
금고를 빼돌린 후 페인트와 휘발유를 가게 안에다 뿌리고
불을 질렸다는 이야기와 지금은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고 부모님에게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는, 믿었던 김 씨 아저씨의 정직한
고백? 앞에 부모님은 할 말을 잃었다고 하신다.
"믿었던 주먹이 다운되는 순간"
1960년대 길거리 좌판에서 보던 시다.
부모님 가슴을 가히 짐작한다.
나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김광오, 고교 동창이며
회사 입사 동기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직장과 학교를
다니던 나는 친구와 같이 입영 통지서를 받고 친구는 입대했지만
나는 기피를 했다. 핑계는 건강이 좋지 않고, 그보다는 집도 절도 없는 집안의 8남매 장남으로 무기력한 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동생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내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생애 처음으로 병역 기피자라는 죄목의 붉은 줄이 생겼다.
친구와 나는 짝꿍처럼 잘 어울렸다.
입대 후 에도 곧잘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친구한테 온 소포에 전사통지서와 유품이 와서
친구 집으로 달려가 보니 친구 사진 앞에 향이 타고 있었다.
무장공비 토벌 작전 중 전사한 것이다.
동작동 국립묘지, 친구 앞에서 나는
대한민국 남자로서 부끄러움을 느낀 날이다.
얼마 후
병역 기피자 자수 홍보 포스터가 서울 곳곳에 붙어졌다.
나는 모든 것을 치우고 자수를 한 후,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강원도 모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건강이 좋아졌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주고 운동까지 시키니 이처럼 신나는 곳은 없었다. 운동을 열심히 했다. 이제는 해골도 아니고 왕 눈깔도 아니다.
어느 날 전우신문에 각군 사관후보생 모집 광고 중 해병대 사관후보생 모집 광고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육군 졸병 일등병이 지원하기엔 산 넘어 산이었다. 육군에서 육군 장교가 아닌 타군 장교로 가기 위해서는 육군 참모 총장의 추천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소대장 추천에 중대장 추천서, 그걸 가지고 대대장 추천서를 받고, 연대장, 사단장, 또는 군사령관, 서울에 있는 육본까지 올라가 추천서를 받고 중앙 대학교에서 필기시험, 체력시험, 신체검사까지 통과해야만 해병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육군 일등병이 어떻게 이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가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는, 강인한 정신과 육체만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일을 시작했다. 드디어 2박 3일 휴가증을 받아 육군본부 위병소까지 왔다. 어느 곳이나 비슷한 절차였다. 위병소 근무자나 헌병은 나를 보면 "새까만 졸개가 겁대가리 없다"며 "쪼그려 뛰기 3만 번" 또는
어느 곳은 "쪼그려 뛰기 백만 번"하며 얼차려(벌)를 주었고 장교들은 육군에도 장교가 될 기회가 많은데 왜? 해병대로 갈려하느냐고 물었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에게는 체력시험이 문제였다. 죽기 살기로 뛰었다.
애초부터 선두에 설 생각은 없었다. 포기하여 낙오자가 되지는
말자는 것이 나의 각오였다. 이것이 나의 생활 철학이 되었다.
드디어 해병학교에 입교했다.
나의 육군 이등병, 일등병 생활은 만족했다. 풍족한 식사, 넘치는
운동량, 적당한 스트레스가 있어 건강한 몸을 만들어 주었다.
군 생활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어떤 군인은 음식이 맛이 없다고
조미료를 몰래 사 먹고, 부모한테 총을 잊어버려 돈이 없으면
영창에 가야 한다고 거짓 편지를 보내 그 돈으로 상급자에게
뇌물, 또는 외출을 나가 돈을 흥청망청 쓰는 자들도 있었다.
내가 자대 배치를 받고 내무실에 들어서니 거기에 있는 군인은
전부 동생뻘 되는 상급자들이 30여 명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가끔 어린아이들은 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어떤 어린아이는 생트집을 잡아 나를 구타했고
어떤 바로 밑 동생 같은 놈은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하며 몽둥이로
나를 후려쳤다. 어린아이들은 수없이 나를 얼차려를 주었다.
어떤 때는 눈깔 동작이 건방지고 불량하다고 집단폭행도 당했다.
(지금은 비인간적인 언행, 체벌이 없다고 한다.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나는 인내심 수련이라고, 체력단련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하여간, 육군 졸병은 내무반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하며 해병학교에 입학했음을 신고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원, 섭섭했다.
해병학교는 진해 바닷가에 있었다. 해병대 장교는 대부분 여기서 배출한다고 한다. 해군 사관학교도 이웃하고 있는 이곳은 조용하고 공기도 맑고 상쾌한 바닷바람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전반에 걸친 전술학을 배울 것이며 임관하기 전까지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하고, 공수낙하 훈련, 그리고 특수전 훈련을 수료해야
한다. 여름에는 해군 사관학교에서 전투 수영을 배웠다.
왜소한 몸을 가진 나는 무거운 철모와 M1 소총이 나를 힘들게 했다.
더욱이 무거운 철모로 머리가 파묻히고 착검한 총의 높이와 키가
총을 내가 메고 있는지, 총이 나를 메고 있는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동기생과 한참 웃었다. 그런 모양새로 완전군장을 해서
진해에서 창원, 또는 천자봉 정상까지 뜨거운 땡볕에 뛸 때면
죽을 것 같지만 낙오만은 하지 않았다. 정신무장이다. '선두에 설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더불어 낙오할 생각도 아예 하지 않는다'
동기생 몇이 픽 쓰러진다. 의무병이 들것에 실어 구급차에 싣는다.
스파르타식 교육과 훈련 방식이다. 낙오나 미달은 퇴교다.
수시로 동기생 몇 명씩 퇴교를 당했다. 어떤 동기생은 며칠 있으면
임관을 하는데 아깝게 퇴교를 당했다.
임관을 앞두고 부모님을 임관식에 초청한다는 편지를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병역 기피자로 끌려가
혹독한 벌을 받는 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임관식에서 나에게 소위 계급장을 달아 주셨다.
아버지도 나도 눈물을 보였다.
나는 해병대 소위 정복을 하고 육군에 있을 때 근무하던 부대의
대대장을 찾아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중대장과 함께 내가 있던
내무반을 방문했다. 감개가 무량했다. 나를 몽둥이로 때리던 아이가
병장을 달고 최고 선임자가 되어 있었다. 나한테 미안했었다고
큰소리로 나한테 "충성" 하며 거수경례를 했다.
건강하니 군 생활도 순탄했다. 그러나 대위로 진급하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진로 문제였다. 솔직히 나 같이
고학력 출신도, 배경이 좋은 것도, 특출한 소질을 가지지 않은 자는
올라갈 자리가 애매했다. 운이 좋아 영관급으로 진급해 보았자,
그때 사회에 나오면 내 나이가 얼마나 되는가? 결혼도 해야
하는데 전세방이라도 얻을 돈이 생기는가? 그렇다고 지금 제대를
하면 취직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 머리가 아프다.
더구나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어 가야 할 길도 더 안 보이는데
이래도 저래도 답이 없다. 우물쭈물하는 공백은 술이 메꾸었다.
'술! 많이도 퍼마셨다. 차라리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소연할 걸!'
'선두에 설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 더불어 낙오할 생각도
아예 하지 않는다'
1978년 백령도에서 해병대 대위는 제대한다.
그리고 국립묘지에 있는 친구 김광오한테 제대 신고를 한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서울대 앞, 신림동 달동네에 살고 있었다.
강제 철거된 판자촌 주민에게 구청에서 관악산 앞 작은 산에
한 가구당 택지 12(?) 평씩 분배해 주었다. 그것이 신림동 달동네다.
거기에 새로운 판자촌이 생겼다. 수도, 하수도, 전기도 없었다.
화장실이 몇 군데 있었는데 관리자가 없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여름에는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고 겨울에는 똥과 오줌이 얼어붙어
산처럼 쌓여 사용할 수가 없었다. 집마다 땅을 파서 화장실과
우물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화장실과 우물 거리가 가까워
물에서 똥, 오줌 냄새가 났다. 그 우물과 화장실을 내가 만들었다.
냄새가 지독해서 더 깊이 파고 파이프를 박고 펌프를 세우니
냄새가 덜 했다. 그러나 식수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때 생긴 것이 물지게꾼과 똥 퍼 가는 직업이다. 그들은 "똥 퍼
똥 퍼" 하며 외치고 다녔고, 산 밑에 수도가 있어
산 위까지 가기가 힘이 들어 그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먹지는
못 해도 물은 있어야 했고 똥은 퍼야 했다. 또 한 가구당 한 사람씩
나 오라 해서 노역을 시키고 밀가루를 배급받았다. 얼마 후 전기
가 들어왔지만, 전기료를 낼 돈이 없자, 사람들은 전선을 옷핀으로
찔러 사용하다가 감전 사고가 나기도 하고 밤에 똥을 퍼서 검지산
가는 산등성에 버리기 시작했다. 유독 진달래꽃이 많이 피던 산에
꽃은 많이 피어 있는데 똥 냄새가 지독했다.
겨울이 문제였다. 똥이 얼자,
똥 퍼가는 사람이 오지 않아 집마다 도끼나 야전삽 또는 곡괭이로
깨트려 산에다 버렸다. 내가 주로 했는데, 옷이며 얼굴이 똥투성이
였다. 또 하수도가 없으니 사람들이 사용한 물을 아무 데나 버린
물이 얼어 산 꼭대기에서 내려가기도 올라가기도 어려웠다.
눈이라도 오면 사고가 일어났다. 노인들이 많이 다쳤다.
사람들이 타고 남은 연탄재를 던지기 시작했다.
달동네는 항상 싸우는 소리, 술 먹고 노래하는 소리, 웃는 소리,
그리고 이유 없이 고함지르고, 악을 쓰는 소리로 시끌시끌했다.
그때 일급 뉴스는 남편이 목숨 걸고 월남에 가서
꼬박꼬박 보낸 돈으로 마누라는 춤바람이 나서 어느 놈팡이와
도망간 사건이다. 귀국해서 집에 오니 집까지 팔아 버린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달동네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관악산과 검지산(산 이름)은 각각 개울을 가지고 있었고
관악산에서 흐르는 개울이 더 컸다.
어릴 적에는 목욕도 하고 가제와 송사리도 잡았고 두꺼비(개 이름)와
물장구치며 놀았던 곳인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모여들자
더러운 시궁창이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왔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
내가 집에 오자, 외조모님은 결혼을, 아버지는 신림동 향토예비군
중대장을 하면 어떠냐고 떠보신다. 월급은 얼마 되지 않지만, 과외
수입이 있고 고정 수입이라 괜찮은가 보다고 하신다.
결혼문제는 부모님도 적극적으로 합세하셨다. 박씨 집안의 종손이고
나이도 32살이나 되었으니 너무 늦었다는 말씀이다.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대방동 성당 할머니들이
주축이 되어 중매를 섰다. 영등포에 있는 한의원 집 둘째 딸이었다.
선을 보고 교제를 시작했는데 그만두기로 했다. 우리 집과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다. 영등포 사거리
목 좋은 곳, 삼 층 빌딩이 그의 집이었고, 언니와 형부는
명문대 출신이었다. 내가 졸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처가와의 불화가 보이는 것 같아 서다. 그리고 천주교를 믿어야 하고 결혼식도 천주교회에서 해야 한다는 조건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둘째 딸은 나를 죽자 사자 쫓아다녔다. 같이 도망가자고도 했다. 나는 웃었지만,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결혼했다. 마침, 도림동 성당 주임신부님이 해병대 출신
이라 결혼식 준비는 급속도로 진행되어 성당은 나중에 다니기로 신부님과 약속하고 신림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30년? 후 나는 미국에서 영세를 받았다.)
유일하게 민간인 출신으로 516 군사 쿠테타에 참여했던 R 씨의
회사 계열인 K 회사에 입사, 공장 새마을 지도자 선거에 출마 등록을
했다. 선거 연설문을 작성하여 녹음기를 놓고 집사람 앞에서 연설
예행연습을 했다. 얼마 후 노동자들은 나를 당선시켜 주었다.
대전 서구 도마동 새마을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나는 새마을 지도자로서 온 힘을 다했다. 우선, 서울역 뒤 만리동 고개 도로 정화 작업부터 시작했다.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깨어 출근하여 통금 사이렌 직전에 집에 왔다. 사원들과 아침 일찍부터 도로변을 쓸고
닦았다. 휴지를 줍고 쓰레기를 치우고 담배 재떨이 겸 쓰레기통을
설계, 제작하여 거리 곳곳에 설치했다. 사원 복지를 위해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사주와 협의, 개선하는 데 노력하며 효율적인 생산성을
위해 품질관리, 개선, 능률 향상을 위한 아이디어 수집, 우수한
사원의 포상 등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주는 막대한 외화로 독일제 다색 오프셋 인쇄기, 최신 사진식자기, 카메라, 등을 수입해서 인쇄방식의 현대화를 하다 보니 활판 계통에 몸담고 있던 수많은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을 우려해, 노조를 만들 움직임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그들은 나만을 의지했다.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다.
다른 일자리로 대체 해 주기를 원했다. 정부와 사주는 이런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노사협의회라는 것을 만들어 노사협의회 회장은 사장 또는 사주, 노사협의회 부회장은 새마을 실천본부장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감투는 두 개다. 새마을 실천본부장 겸 노사협의회 부회장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감투다. 쉽게 말하자면 어용 노조 위원장이고, 더 쉽게 말하자면 허수아비라는 말이다.
나는 새마을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노조의 방패막으로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새마을 지도자가 되기 위해 출마했지, 노사협의회
부회장이 되기 위해 출마하지는 안 했다. 그것은 가진 자의 횡포다.
저녁이면 가진 자들은 나를 요정으로 모셔 갔다. 그리고 그들은
치즈 몇 조각, 양주 몇 잔에 내 봉급의 몇 배의 돈을 지급했다.
이것도 강제다.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본부장 차 타시오" 하면
차를 타야 한다. 새마을 운동 지도자가, 달동네에 사는 내가 요정에서 술을 먹다니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해병대 대위 시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악몽이 다시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이고 뭐고 다 집어치울까 말까?
새마을 운동이란 더 나은 삶의 비전이 보여야 한다.
밥줄이 끊어질까 말까 하는 지금은 아니었다.
사양길에 들어선 활판 계의 주조, 문선, 식자, 등등
각 부서의 사람들은 나와 은밀하게 만나기를 원했다.
술집에서, 다방에서 또는 생일이라고, 장례식장에서
모임을 했다. 그들의 노조 결성은 거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연판장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사주 측도 이미 알고 있었다. 주모자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살생부였다. 그들의 움직임이 겉으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탄의 도화선이 타고 있었다.
나는 긴급 노사 협의회를 열 것을 사주한테 건의했다.
사주 측 K 사장은 선수를 친다. "연일 계속되는 새마을 사업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안타깝게도 시대 흐름이 활판 계의 타격을 주어
상심이 크실 줄 알고 저희도 그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낙오자 한 사람도 없이 구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마시고 지금까지 잘 하신 대로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얼마 되지 않지만, 여러분 노고에 감사하다고
금일봉을 주셨습니다. 누구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렇게 회의는
끝났다. 수군수군하면서도 선뜻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약하니까 약자다.
칼을 쥔 자가 나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데 토를 달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은 안심하는 모양이다.
사주의 플라세보 처방이 약발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월은 얼렁뚱땅,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가장 거북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때, 기억과 망각의 혼돈 시절
항상 어수선했던 날들
한쪽 귀는 노동자의 소리를
한쪽 귀는 사주의 소리를, 정부의 시책을 들어야 하는 야누스의 시간
이미 혀는 굳어가고
내 자존심의 최후 마지노선은
귀머거리인 척하는 것 이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윗집에 살던
요시찰 인물이었던 김교수가 할 수 있는 말은 꽃 이야기뿐이었고
나는 술 이야기 이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왕대포집에 배수진을 친 나는
벽에 쓴 누군가의 낙서를 쳐다보며
게걸스럽게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어제도 오셨는데 오늘도 오셨군요. 내일 또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안주는
기분 더러워서
자신이 한심해서라는
이유가 안주였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사건으로 세상이 난리다. 신문 호외에 주먹만 한 활자가 대통령 유고를 알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에 포기한 미국 비자의 유효기간을 살폈다.
아직 살아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집사람에게는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1979년 11월 2일, 5를 가지고 김포 공항을 빠저 나갔다.
영어를 알아듣지도 못 하지만, 영어로 해도 미국 사람들은
이해를 못 했다. 부산에서 영어를 가르쳤다는 김 선생도 우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영어교육에 이상이 있는 것 같었다.
할 수 없다. 만국 공통어로 손짓, 발짓했다.
처지가 비슷한, 부산 김 선생, 광주 이 검도 사범, S 대 사학과
출신 강군,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한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시카고 변두리, 싸구려 아파트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제일 나이가 많은 김 선생이 대장, 내가 부대장, 강군이 회계 담당
회장, 이 사범이 살림 담당 회장, 그래서 부를 때는 대장님, 부대장님
강 회장, 이 회장으로 정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아침은 가까운 곳에 있는 커피가 공짜인 도넛 집
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점심과 저녁은 밥(안남미)에 닭고기나 생선
통조림으로 하기로 했다. 계산해 보니 개나 고양이가 먹는 통조림보다 싸서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남미계와 흑인들이 많고 거리가 지저분했다. 그 대신 월세가 무척 쌌다. 밤에 전등을 껐다 켜면 바퀴벌레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기가 막히게 많았다. 대장이 아파트 사무실에 가서 얘기 하니 오히려 화를 내며, 이 바퀴벌레들이 아시안들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삿대질을 하며 살기 싫으면 나가라고 지랄을 해서 혼났다고 한다. 우리는 바퀴벌레와 6개월 동안 같이 살았다.
우리는 밤에는 공장이나 사무실 청소를 했고
낮에는 강 회장 지휘 아래 이력서를 작성 했다.
강 회장 정보에 의하면 코리안은 꾀 안 부리고 일 잘하는 불쌍한 후진국 사람으로 알고 있어 쓸데없는 거짓말이나 허풍을 떨지 않는 한
채용하니 잘난 척하는 것보다는 불쌍한 척하는 편이 좋다고 했다.
그들이 공장 근로자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장거리 전화로 한국에 전화할 리도 없고, 한국에서 그 전화를 받고
답변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지금은 통신수단 발달로 확인 이 쉽지만) 그렇지만 나중에라도 솔직하지 못한 것이 발견된다면 코리안 전체의 문제가 되니 거짓 행동은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공장에 취직하는 것보다는 식당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과 중국요리를 배워 식당을 차리고 싶었다.
마침, 교포가 하는 중국집에서 침식 제공, 종업원을 구한다 하여
가족들과 이별주를 마시고, 또 지긋지긋한 바퀴벌레와도 헤어졌다.
미시간주에서 제법 큰 식당을 하는 경상도 사나이와 그의 부인은
서독 광부와 간호사 출신으로 서로 눈이 맞아 미국으로 튀었다 한다.
교포사회에서 성공한 사례다. 그의 노래는 항상 "하루해는 너무
짤 바요"였다. 무슨 노래의 토막인지 모르지만, 그 토막만 불렸다.
부지런하고 열성적이었다. 경상도 시골에서 남의 땅으로 농사를 짓던
소작농의 아들로서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떠돌아다녔다 한다.
나와 모양새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성장기였다.
사장 집 지하방에서 4명의 새 식구가 나를 위해 환영 파티를
열었다. 서로 어떻게? 왜? 미국에 왔느냐라는
질문은 피했다. 육군 일등병 시절로 돌아갔다. 선임 순으로
업무가 주워 줬다. 나는 식당 청소, 설거지, 채소 다듬기를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서서 일했다. 고단한 하루였고, 지하실에
와서는 그냥 곯아떨어졌는데 중간에 잠에서 깼다.
내 옆 침대에는 자갈길을 달리는 탱크 한 대와 트럭 한 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 나서는 탱크는 박 선생, 정 선생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투덜거렸다.
한국에 갈 여비가 생기자, 나는 서울로 날아갔다.
일 년 만에 온 서울, 집사람과 딸내미가 있는 영등포 처가 대문을
뚜드렸다. 모두 놀랬다. 집사람은 훌쩍훌쩍 울었다. 그동안 소식이
없어 미국에서 딴살림을 차린 줄 알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당에
다니는 사람 중에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다음 날 우리는
달동네를 갔다. 가슴 아팠다. 달동네는 나를 항상 괴롭혔다. 부모님은
더 늙어 보였고, 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말씀은 "돈 없이 객지에 나가서 얼마나 고생이 많냐"라고 하시며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 하시지만
미국에 가면 떼 돈을 버는 것으로 아는 달동네 인식은 동생들
까지도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장남이 장남 노릇을
못 한다는 눈치는 내 가슴에 대못을 사정없이 꽝꽝 박았다.
얼마 되지 않지만 용돈 하시라고 부모님에게 봉투를 드렸다.
동생들에게도 봉투 하나씩을 주었다. 그런데 남동생이
"형이나 형수랑 잘 살아" 하면서 봉투를 던지자 그 순간, 내 손은
남동생 뺨을 때리고 있었다. "형이 뭐 잘 한 게 있다고 때려" 하며
엉엉 운다. 나도 남동생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지만 집사람과 딸내미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장난감도 사고 옷도 사고 식당에도 갔다. 그리고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돈을 주고 미국에 올 절차를 받으라 하고 미시간주로
돌아왔다.
1981년 8월 5일 집사람과 딸내미가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다.
집사람은 딸내미를 업고 세탁소에서, 나는 식당에서 일했고
어느 정도 중국식당 운영을 파악하자, 인디애나주에 있는 일본 식당
에 취직을 했다. 일본 식당을 알고 싶어서다. 그런데 휴가를 가서 자신을 생각해보니 사업을 해 본 적도 없고,
돈 버는 기술도 없고, 돈도 없고, 어떻게 식당을 할 것인가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의욕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집사람은 친정에 손을 벌려 보자고 했지만 죽으면 죽었지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올바른 판단의 결론
이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사방을 헤아려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용기를 낼 수밖에, 나에게 용기란 돈이 들어가면
안 되는 조건이 있다. 돈도 없고, 나올 구멍도 없으니깐.
'아! 찾았다 하나 있다 그것은 두뇌다.'
학교는 올바르게 다니지 못했어도 학교 다닐 때 받았던
수십 장의 우등상장과 상장들,
육군 일등병이 해병대 장교가 된 용기와 두뇌, 동기생의 간부, 새마을
운동 지도자, 전부가 빈손으로 누구의 도움 없이 한 경험이 나는 있다, '아! 나는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야 집사람도 그렇고.'
나는 공부를 해서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했다. 집사람과 함께
식당 일을 하면서 뉴욕, 엘 에이, 시카고, 등 대도시 한인사회 지인과
신문을 통하여 우리 영어 수준과 공부해서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보았다. 시, 주 공무원, 연방 공무원, 가리지 않고 찾았다
그 결과, 육군 군무원과 우체국 직업이다. 둘 다 연방 공무원으로
봉급도 은퇴 후 혜택도 좋았다. 유급 휴가와 병가도, 휴일도 많아
가족과 즐길 시간도 충분히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군무원은 우리
부부가 같이 근무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체국
시험을 보기로 했다. 영어도 그다지 많이 필요 없고 암기력을 위주로
한 시험이었다. 식당 퇴근 시간이 밤 10시, 매일 새벽 1시까지
시험공부를 하여 집사람은 인디애나주에서 만점을, 나는 99.8점을
받았지만, 응시자가 너무 많아 발령받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때, 다니던 식당이 장사가 부진해서 우리는 미시간주로 가야 했다.
마침, 지방정부에서 실시하는 직업학교(요트 제작)가 있어 거기를
수료하고 요트 공장에 입사하여 회사에 다니면서 우리 부부는 다시
시험에 응시하여 또, 집사람은 만점, 나는 또 99.8점을 받았다.
드디어 발령을 받아 상급 부서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임지로 왔다. 홀랜드시다. 더치페이로 유명한, 네덜란드 민족이 모여
사는, 식당에 가면 부부, 또는 가족끼리 손을 잡고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과 튤립 꽃, 풍차가 있는 인구 6만의 작은 도시다.
주로 백인이 거주하고 개혁교회가 많다. 옷을 기워서 입고 다닐 정도의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자존심이 강한 민족 같다.
집사람은 아이들 때문에 나만 먼저
우체국에 출근해서 우체국장에게 첫인사했다.
또 한 명이 있었는데 백인 여자였다. 그 여자 시험 점수는 99.6점,
나는 99.8점으로 내가 우선권이 있었다. 우체국장은 백인으로 미 육군에서 부사관으로 오래 근무한 노인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3개월의
수습 기간 동안 시험에 통과해야만 한다고 엄숙하게 말하고, 시험방법은 1200개의 주소를 암기하고 거기서 무작위로 뽑은 100개의 주소을 우체부 번호로 만들어진 공간에 지정된 시간 내에 적중률 95% 이상을 집어넣는 시험이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나만 따로 불러 종이에다 그 시험에 합격해야만 연방정부 공무원법에 의한 급여를 주지만 불합격하면 합격할 때까지 시간당 .5를 주겠다며 .5라고 썼다.
나는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는가 하고 백인 여자한테 물어보니
자기에게는 아무 소리도 안 했다는 것이다. 노조위원장에게 얘기하니
그는 봉급 주는 날, 진짜 그렇게 주는가 보자고 했다.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1200개의 주소를 암기하기 시작했다.
거의 백인인 우체국 안에는 노골적인 차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면 코를 막고, 내가 갖다 놓은 우편물을 집어던지고
내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으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코를 손으로
가리며 일어서 나갔다. 동양인과 같이 근무하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는 것이고 마늘 냄새가 나고 더럽다는 것이다. 우체국장이 왜? 나에게만 .5라고 썼는지 알만했다.
우체국에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직원도 있고, 미군으로 한국에 근무한 직원도 있고, 한국 고아를 입양한 직원도 있었다. 그들이 한국에서 무엇을 보고 왔는가? 그것이 그들이 나한테 하는 행동이다. 측은하고 불쌍한 후진국 국민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속이 상한 것이다.
'자! 그럼 나는 여기서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직분은 우편물을 판매, 접수, 분류, 관리, 우송, 그리고 우편배달을
제외한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일이다. 업무는 쉬운 것 같은데
직원과의 알력에 심각한 스트레스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절대 낙오란 있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생각대로
후진국 사람처럼 불쌍한 시늉을 하여 동정받으며 지내야 하는가?
내가 그들보다 보수를 적게 받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들보다 더 받고 또,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나는 지금 막 시작했지만 나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이
있었다. 임시직, 우편물 우송직, 청소직, 등 여러 백인이 있었다.
단 하나, 실력으로 하는 것 밖에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나는 쫓기는 토끼가 될 것이다. 죽기 살기로 뛰는 토끼가 될 것이다.
백인들은 여기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지만
나는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배수진을 칠 것이다.
나는 1200개의 주소를 일주일 만에 암기하고 일주일 동안 속도 훈련을 한 후 시험을 봤다. 96% 적중률로 합격했다. 우체국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언가 잘못됐다고,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우체국장은 노조 위원장을 불러 다시 하면 어떠냐고 했고, 노조 위원장은 나한테 다시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했다. 다른 백인들도 보고 있었다. 시험관이 "시작" 하며 스톱워치를 눌렸다. 그리고 내가 분류한 것을 검사했다. 100%로 합격이다. 우체국장은 한동안 '멍' 하고 있었다. 일주일 후 우체국장은 전 직원들을 모이게 하고 내 이름을 호명한 후 '우체국 기록상' 2주일 만에 1200개의 주소를 암기하고 합격 한 것은 처음이라면서 표창장을 주었다. 백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후 에도 나는 표창장 10번, 집사람은 3번을 더 받았다.
상금 아니면 특별 호봉 승급도 같이 받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공짜는 없었다. 사냥개에 쫓기는, 목숨 걸고
달리는 토끼의 심정으로 쉬지 않고 노력했기에 있었다.
그 후 악질 우체국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미국 성당에서 영세을 받을 때, 내 대부가 되어 내 손을 잡고 신부님 앞으로 나갔다.
그는 나를 아들처럼 대했다.
집사람과 나는 백인들이 싫어하는 휴일 근무를 도맡아서 했다.
휴일은 2배의 돈을 받았다. 악착같이 일을 하고 재투자를 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우리 부부는 정신병 진단을 받고 의사로부터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받아
유급 휴가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유급 병가를 이용해서 세계 여러 나라를 관광을 했다. 한국과 미국 48주 곳곳을 아이들과
캠핑을 갔다.
백인들이 우리 부부를 무시하고 시기하는 눈총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소포 분류하던 백인이 눈 보호 안경과
마스크와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긴 집게를 들고 나한테 와서는
보여 줄 게 있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한국에서 온 소포가 터져서
내용물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멸치였다. 백인들은 기겁하며
물러섰다.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나한테 물었다.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하니 나를 쳐다보는 눈이 아프리카 식인종을
보듯 했다. "아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이것을 씹어 먹어"하며
나 보고 멸치를 집게로 집어 소포에 넣어 줄 수 없느냐고 집게를
나한테 내민다. 나는 화를 버럭 내며 "아니야! 이것은 내 일이 아니야!" 하며 거절했다. 급기야 완전무장(?)을 한 청소부가 그 소포를 처리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름에 수취인이 없어 우체부가 보관하고 있던 소포 하나가 터져
바닥에 흥건히 액체가 고여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우체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한국 시골에서 김치를 비닐봉지에 넣어 소포로 보냈는
데 높은 온도로 발효가 되어 비닐봉지가 터진 것이다.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한 번도 이런 냄새가 없던 곳이었기에 더 했다. 한국에서 온 것이다. 나도 한국에서 왔다. 괜스레 죄인이 된 기분이다. 이게 뭐냐고 직원들이 물었다. 한국에 갔다 온 직원은 독가스를 만드는 핵폭탄이라고 킬킬거린다.
그들이 킬킬대는 것은 아무런 마음 없이 하는 장난이지만,
나와 집사람에게는 심각한 스트레스였다.
내 앞에서는 말은 안 하지만 그들이 꾹 참고 있는 게 있다.
멸치 사건 때, 누가 뒤에서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격지심인가 하고
그냥 흘려버린 게 있다. 보신탕 이야기다.
우리 동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신문과 TV 방송에서는 연일 톱기사로 떠들어 댔다.
동남 아시아 사람들이 옥수수밭에서 개를 잡아먹은 사건이다.
이곳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는데
개를 죽이고 먹기까지 했으니 살인사건보다 더 크게
취급했다. 그 불똥이 중국과 한국 사람에게 튀고, 조그마한 나라,
만만한 한국이 제물이 되었다. 개 목을 밧줄로 묶어 나무에 달고
몽둥이로 때려잡는 사진을 나한테 보여 주었다.
나도 개고기를 먹었다고 했다.
한국 전쟁 때 먹을 게 없어 어쩔 수 없이 먹었다고 했다.
너의 들은 먹을 것이 풍부한데도 다람쥐도 잡아먹고, 말도 잡아먹고,
새도 잡아먹지 않느냐 먹는 것 가지고 더 이야기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나와 집사람은 말이 많은 사람들을 한 두 사람씩 집으로 초청
하여 식사도 같이하고 수시로 있는 파티에는 김치와 멸치조림를
달곰하게 요리해서 항상 맛을 보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겁을 내어
김치 조각을 칼로 썰어 한 조각 먹고 콜라 한 모금 마시던 백인들이
지금은 나보다 더 잘 먹는다. 그런데 멸치는 죽었다 깨어나도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백인들처럼 신사는 없다.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고 남을 배려하고 도와주고 남을 존중해 준다. 다만 소수의 성질 나쁜 자들이 문제다. 어디 가나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런 나쁜 사람 때문에 우체국과 백인을 상대로, 인종 차별로 E E O(균등한 고용기회 위원회)에 제소를 했다. 수개월의 심의 끝에 나의 손을 들어줬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영어문제로, 하고 싶은 표현을 제대로 못 해서다. 그러나 여러 백인이 도움으로서 이겼다.
우체국은 철저한 군대식이다. 모든 게 선임 순이였다.
수습 기간을 지나 정식 직원이 되는 것도, 휴가도, 선임 순이였다.
다음에 정식 직원이 되는 것은 내 차례였지만 엉뚱한 백인이 먼저 되었다. 우체국장, 상급 기관에 건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권리를 위해 싸워야만 했다. 그동안 미국 생활에서
익힌 경험에서다. 여기서는 울지 않으면 젖을 안 준다.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요트공장에 다닐 때, 수습 기간이 끝내면 진급하기로 했지만, 진급이 안 되어 물어보니 담당자가 "너는 진급을 안 해줘도 만족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 진급해 주기를 원하느냐?"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그래서 수없이 싸웠다.
싸워서 이길 때마다 나는 집사람을 부둥켜안았다. 집사람은 울었다.
타국에서 사람도, 언어도, 풍습이 다른 이곳에서는
부둥켜안을 것은 집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잘 사는 것은 그들이 잘못과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포용하는 신사도에 있었다.
그 후로 백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틀려젔다.
오늘은 광복절이다.
유학생들과 교민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태극기를 보며 목사님의 피아노 반주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리고 추석에는 한국을 알리기 위한 행사를 열었다.
목사님이 주도하여 종교 구분 없이 참가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시카고에서 한국무용단을, 미시간주에서
태권도 시범단을 초빙해, 이곳 백인들을 위시한 타민족에게
한국을 보여 주었다.
'나에게 준비된 미래는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해 보았더니 무언가 되더라' 얼마 전에 우리 부부는 은퇴했다. 긴 우체국 근무였다.
막내가 미 육군 장교로 한국 비무장 지대에서 근무하다 제대했다.
내가 사는 집에는 에이커 땅에 한국 대추나무, 나주 배나무, 감나무,
밤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석류나무, 앵두나무가
뿌리를 박고 살고 있고,
딸 하나와 아들 둘도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여기를 떠날 수 없다.
해마다 채송화, 분꽃, 봉숭아, 활련화, 석류꽃, 벚꽃, 백일홍, 나팔꽃,
과꽃, 할미꽃이 피며, 상추, 한국애호박, 한국 찰옥수수, 배추, 무,
쑥갓, 푸추, 고추, 마늘, 한국오이, 들깨, 대파를 매년 재배한다.
겨울에는 건강 때문에 구매한 콘도가 하와이주 와이키키에 있어서
거기서 지낸다. 당뇨병과 고혈압이 있지만 마음에 여유가 있다.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오래 사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살다가
가족에게 부담 안 되게 멋있게 잠자는 훈련을 며칠 한 다음 죽었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유언서를 변호사 앞에서 작성했다.
첫째로, 생명 보조 장치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죽은 다음 우리의 몸을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 (이 사항은 운전 면허증에도 명시되어 있다. 운전 면허증 사본 첨부) 한다는 내용이다. 마음이 가볍다. 이것을 우리 부부는 행복이라 말한다.
여기에는 고국에 없는 동물이 있다.
주머니쥐다. 재미나는 동물이다. 행동이 느리고
고양이 크기 정도며 새끼들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닌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을 생각나게 한다. 자기보다 큰 동물이나 움직이는 물체 앞에서는 처음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공격할 것처럼
하다가 반응이 없으면 피하거나 죽은 시늉을 한다. 그래서 도로에 많이 죽어 있다. 자동차가 오면 적으로 생각하고 차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죽은 척해서 라고 한다.
집사람은 나와 달리 '먹이'가 풍부한 곳에서 자랐지만 부족한 먹이를
위해 발 버둥댄, 나를 위해 한마디 군소리 없이 따라 준 노고에
더욱 사랑을 느낀다.
먹이
디아벨리 변주곡을 듣다가 짜증 나니
입을 벌리고 공격할 것 같은 주머니쥐를 보고
무심코 "너 디아벨리 변주곡을 먹을 줄 아느냐" 고 했다
(나는 종교가 없어 스테인드글라스에 여과되지 않은 서울이 불면증이다)
지난날을 잊지 못해 벌린 입에
쌀알을 퍼부어도
다물지 못하고 죽어있는 모습의 거북스럽고 답답한 표현은
빙판길, 연탄재를 아무리 뿌려도 내려가기 어려운
산동네 엥겔계수였다
장떡과 사카린을 넣은 밀기울 빵을 신기하게 여긴 문학소녀
애인의 언어는 '시'였다
애인의 언어에는 그런 떡과 빵은 없었다
별과 달, 꽃과 나비, 사랑과 그리움, 바다와 등대 따위의 환상뿐이었다
사랑은 영원하다 했고 사랑만 있으면 어떠한 부족함도 채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애인은 식도가 긴 달동네 목구멍까지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다가 도중에
주저앉아 버렸다
산동네 정상에서 내려가기 위해
젊은 관악산 바람들은 같은 시간대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움직였다
후진 골목길을 휘돌아 설레발쳤다
굼뜬 쥐는 없었다
애인들의 변주는 쉽게 아물었다
지금도 달동네 가로등은 헛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가
'먹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서울
안녕하십니까
◆당선 소감

내가 싫어하는 것 중에는 골프와 문학이 있다.
골프는 엄두가 안 나서, 문학은 "먹이"가 안돼서다.
대물림하는 지긋지긋한 가난에 골프는 꿈속에서도 없었고 문학이란, 언감생심 고생하시는 부모님 앞에서는 금기 사항이었다. 사춘기 때 몰래 시와 소설, 철학책을 사 보면서 잠시 작가의 꿈을 가졌으나 내 주위의 가난한 문학가를 보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런데 55년이 지난 어느 날 골프채가 단단히 굳어 있는 나의 "먹이"의 개념을 깨고 나의 십 대의 꿈이었던 문학을 끄집어내었다.
나이 71살 때 하와이에서.
겨울이면 고국에서 온 80대 어른부터 본토에서 온 사업가, 종교인까지
이구동성으로 골프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필드에 몇 번 나가 봤으나 살아온 세월이 강하게 거부 하여 포기하자 친한 지인들도 골프장에 가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때 하와이 문예 공모 광고가 잊었던 사춘기의 꿈을 일깨웠다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고국을 떠난 지 40년 가까이 한글을 멀리하다 보니 맞춤법과 문법이 엉망이어서 다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평생 남이 만든 울타리에서 어쩔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해 왔던 내가, 내 의지로
쓴 글을 검토하고 수정하고 생각하는 것을 투명하게 글자로 나타내자 어떤 희열을 맛보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나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71살 늦깎이로 시작하여 72살에 고국의 문학상 당선 소식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부족한 저를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들과 몸이 편치 못하고 한글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저를 격려하여 이끌어 주신 이언주 하와이 H 문인협회 고문과
김사빈 회장, 그리고 친구 이재기 장로 부부, 아내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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