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8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성보경 '삶의 소용돌이 헤치고 꿈을 향한 네 걸음 걷다'

1. 프롤로그

사람은 누구나 이 땅 위에 단 한 번 주어진 삶의 길에서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 꿈의 성취를 위해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인생길은 어쩌면 좋을까?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머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70년 세월을 보낸 오늘, 지난 삶을 생각하며 펜을 잡으니 꿈만 같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15층 아파트의 9층, 베란다 창을 열어젖히니 훈훈한 바람이 아침 햇살을 가득 안고 거실로 파고든다. 자녀들은 모두 객지로 나가고 두 늙은이가 조용히 사는 집이다. 삼십 평 남짓한 서민 아파트지만 전기, 상하수도, 도시가스, 주방시설이 완벽하고 TV, 냉장고, 세탁기, 전기밥솥 등 가전제품이 구비되어 있다. 또한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된 컴퓨터와 프린터가 있어 이메일을 주고받고 글공부 하는데 손색이 없다. 불과 오십여 년, 반세기 어간에 의식주 생활환경이 백 년을 뛰어넘은 듯하여 어리둥절하다.

2. 오늘의 일상과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나는 6.25사변 때 머리 총상으로 뇌신경 장애를 입어 왼쪽 수족이 어둔하다. 또 어릴 때 병치레를 자주 해서 중년까지 건강상태가 나빴는데, 삶의 환경이 좋아지면서 나이 들어 오히려 편히 잘 산다. 전기온돌매트가 깔린 따뜻한 침상에서 그 옛날 군불 지피던 구둘목을 잊었고, 본디 이가 하나도 없는데도 5년 전 시술한 임플란트 인공 치아로 못 먹는 음식이 없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에도 오리털 재킷 덕분에 추위를 모르고 살았다. 또 아내와 둘이 마주하는 식탁이지만 흰 쌀밥에 된장국이 몸에 베인 예전 맛 그대로이고, 후식은 캘리포니아 오렌지, 이구아수 커피 등 세계시장 농산물이 밥상을 풍성케 한다. 유년에 가난으로 배고프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 식민지 통치가 극에 달했던 해방 직전에 나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패전을 눈앞에 둔 일본은 징용과 위안부 차출로 우리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갔고, 전쟁 물자 충당을 위해 식량과 일용품을 수탈하여 우리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했다. 식량 부족으로 생존에 급급해야만 했고, 젊은 아들딸들이 사지로 끌려가는 불안과 슬픔을 견뎌내야만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정치 불안과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해 국민의 삶은 캄캄한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연이은 흉년으로 식량이 모자라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웠고, 춘궁기를 넘길 때 영양실조로 부황이 생긴 사람도 많았다.

이처럼 가난한 삶을 이어가는데 설상가상으로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봄 어머니께서 동생을 낳고 심한 산후 출혈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재취로 시집와서 딸 둘을 내리 낳은 다음, 아들인 나를 낳아 애지중지 아끼고 얼마나 사랑하며 키웠는지 모른다. 당신은 헐벗어도 자식에겐 따숩게 입혔고, 배고프던 시절 조석으로 내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소한 누룽지 뭉치를 손에 쥐어 주셨다. 추운 겨울밤 어머니 곁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가슴을 만지며 잠들던 그 어머니가 별안간에 사라져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일 때 먼 허공 바라보며 "엄마"하고 부르면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곤 했다. 그 애달픔이 오늘에도 내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요즘은 산후 출혈 정도야 병원에 가서 수혈하고 지혈제 사용하면 쉬이 고치는 병인데, 가난하고 못 살던 그 흘러가 버린 옛날이 안타깝고 원통하기 짝이 없다.

삼년상을 치러야 하는데 또 그해 가을에는 할아버지까지 별세하셔서 겹 상중에 집안이 어지러웠다. 오래도록 줄 잇는 문상객에게 술상을 차려야 했고, 가난한 살림살이 치다꺼리도 힘들었을 텐데 아버지는 어머니 떠난 빈자리를 어찌 감당하셨을까. 긴긴 겨울밤, 사랑방에서 호롱불 켜고 읽으시던 '옥루몽' 낡은 책갈피가 눈에 선하다. 겨울이 가고 그 이듬해 여름, 또 한 번의 고난이 닥쳤다.

3. 6.25사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이 우리 남한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전쟁발발 한 달여 만에 부산과 경남·북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가 북한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팔월 초순, 적군은 나의 고향 경남 창녕 인근까지 밀고 내려왔다. 격렬한 전투가 거듭되어 우리 가족은 밀양군 청도면으로 피란을 갔다. 당장 며칠 먹을 양식과 생활 도구를 챙겨 보따리를 이고 지고 집을 나섰다. 어린 나도 등에 괴나리봇짐을 메고 험한 산골 천왕재를 넘었다. 처음 몇 날은 구긔마을 김 씨 재실 헛간채에서 이슬을 피하다가 그 다음 깊은 산골짜기 칡넝쿨 사이에 움막을 짓고 버티었다. 얼마 후에는 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다른 피란민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다다랐을 때 미국을 비롯한 유엔 연합군이 참전했다. 드디어 전세가 반전되어 적군이 물러가고 우리 가족은 피란 생활 두 달여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옛 터전에 돌아와 보니 전쟁이 휩쓸고 간 마을은 완전히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집들은 불타 잿더미가 되었고 헛간채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을 앞 야산 너머에 미 24사단 최전선 본부가 자리 잡고 있어 적이 집중 공격을 퍼부어 마을 전체가 불탔다.

격전지였던 마을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동네 안 개울의 으슥한 자리, 잡초가 무성한 곳에는 시체가 즐비했고, 안골 산자락 여기저기 참호마다 뒹구는 해골과 수없이 널브러진 백골들은 가슴이 섬뜩하도록 무서웠다. 마을 주변에는 전쟁의 잔재물이 널려 있었다. 찢긴 군복 조각, 주인 잃은 군화 짝, 야전 통신망 전선, 대포와 박격포, 수류탄, 카빈 소총과 탄창, 총검, 철모와 수통, 야전삽과 배낭, 씨레이숑 등등 낯선 전쟁 물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인간의 생존, 삶과 죽음의 갈림길, 전쟁의 현장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산자락 땅가시나무 잔가지에는 송장 파리 떼가 꽃이 핀 듯 엉겨 붙었고, 피란 가면서 버리고 갔던 개, 누렁이는 눈알이 시퍼렇게 된 채 옛 주인을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오다가 설설 피하는 시늉을 했다. 먹을 것이 없어 시체를 뜯어 먹은 죄책을 느끼는 것일까? 한마디로 먹고 먹히는 생명의 존재적 비극, 아수라장이었다. 세상모르는 동네 아이들은 버려진 군수품 속에서 씨레이숑 자루를 뒤져 껌, 초콜릿, 커피, 설탕 들을 꺼내 먹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4. 총상을 입다.

불탄 집터 위에 수숫대로 움막을 짓고 이슬을 피하며 삶을 추스르던 어느 날이었다. 전쟁터에 깔려있는 무기와 총검을 수습하려고 나온 대지면 지서 순경 두 사람이 마을을 둘러보면서 집터 뒤켠 대숲을 향하여 무심코 총질을 했다. 그때 마침 나는 대밭 뒤 언덕에서 동무들과 놀고 있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순경이 쏜 카빈 소총 유탄이 머리를 관통했다. 같이 놀던 아이들은 놀라서 달아나고 나는 온 몸의 피를 다 쏟고 거의 죽은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한나절 뒤, 해거름에 학교에서 퇴근하던 형님이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창녕읍내 병원으로 업고 갔다. 의사가 나를 살펴본 뒤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해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나를 움막 한구석에 뉘어 놓고 죽기만을 기다렸다.

죽을 것으로 단정한 아이가 이튿날에도 여전히 호흡과 맥박이 남아 있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혹시나 해서 대구 동산 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백 리 길을 멀다 않고 달려가 의사 앞에 아들을 내밀었는데, 전쟁 와중에 부상자 치다꺼리에 지친 군의관이 축 늘어진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기껏 하는 말이 "영감님, 집에 가서 송아지 잡아 놓고 굿이나 해보소."라고 했다.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졌으나 어쩔 도리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병원에서 되돌아 나왔다.

병원 문을 나오는 길에 허탈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길가에서 당수 점치는 사람에게 점을 쳤는데 점쟁이 말이 "동쪽으로 가서 목성木姓 가진 의사에게 보이라"라고 했다. 아버지는 믿기지 않았으나 창녕읍으로 돌아와 버스 터미널 근처 김경수 의원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나의 총상을 살펴보더니 첫말에 "한번 힘껏 치료해 보자"하고 응급처치를 했다. 치료라고 해 봐야 총상 두 곳에 머큐롬을 바르고 니라마이드를 뿌린 뒤 거즈를 덮어 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 무슨 천우신조인가. 이날부터 하루 이틀 치료를 거듭했는데 나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같이 살아났다. 나를 보고 이웃 사람들은 "조상이 돌보았다", "천명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사람의 생명은 풀잎의 이슬같이 덧없고 연약하지만 때로는 극한의 생존 환경을 뛰어넘고 살아남는 기적을 보여주기도 하지 않는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긴 했으나 나는 오른쪽 뇌신경 손상을 입어 왼쪽 수족을 쓸 수 없는 장애아가 되었다. 약 반년 동안 방 안에서 뒹굴었다. 3월 어느 날 방구석 한 턱을 붙잡고 내가 일어섰더니 온 식구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단다. 가족들의 응원 속에 나는 걷기운동을 되풀이하여 한 달여 만에 걸음걸이가 다소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4월에는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5. 전쟁이 남긴 상흔

1950년대, 우리나라 농촌은 지독한 가난과 전쟁의 참화 속에 허덕였다.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마을마다 뒤 엉키어 살았다. 정부는 부산에 임시수도를 정하고 사회 기강을 잡으려고 했으나 생존에 급급하는 백성들의 삶터는 아수라장이었다. 학교교실은 유리창 하나도 남지 않아 가마니로 바람을 막고 공부를 했고, 마을 사람들은 거듭 흉년이 들어 시래기죽도 못 먹는 집이 많았다. 아이들은 난민 수용소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혹독한 추위가 닥치면 양지바른 언덕을 찾아 햇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신체장애로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학교생활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중·고등학교 시절, 체육 시간에 나는 건강한 급우들이 활기차게 뛰노는 모습을 보거나 특히 축구, 배구 등 공놀이를 할 때와 운동회가 열리면 외톨이가 되어 속울음을 울어야 했다. 이전에 어릴 적,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재밌게 놀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가 생각이 들면 가슴이 울적했다. 이처럼 소년기에 겪었던 슬픈 감성은 지금도 내 정서의 밑바닥에 깔려 있어 주위에서 애절한 삶의 고비에 부딪힌 사람을 만나면 동병상련의 슬픔을 가슴 아프도록 느낀다.

전쟁은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인류문명과 삶을 파괴하는 잔인한 야만적 행위다. 사상과 이념을 내세운 권력자와 가진 자의 이기적 욕망이 빚어낸 인간의 참극이다. 나는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가 되어 일생 장애를 안고 살다 보니 전쟁이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쳐 진다.

6. 폐허의 땅에서 일어선 조국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전후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 국내 정치사회의 변화조짐이 있었다. 여야 세력 간에 이념과 정치 체제에 대한 다툼이 치열했다. 그러다 5·16 혁명이 일어나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정권을 장악한 제3공화국 정부는 경제개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정부에서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마을 운동'을 벌였고, 국민들은 일치단결하여 근면과 성실로 국가 재건에 힘을 모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여러 번 수립하고 공업 입국과 수출산업 육성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어 갔다. 1960년 초 1인당 국민소득 68달러로 세계 최빈국이던 우리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며 '80년대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선진 경제 대국 반열에 우뚝 섰다.

국가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육박하고 사회 인프라, 정부 효율성, 기업 생산성 등 국가 경쟁력도 G-20 수준에 들었다. 1인당 국민 소득 2만 불, 인구 5천만 [20-50클럽]에도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태리, 독일, 영국에 이어 한국이 가입하게 되었다.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문화 예술이 꽃 피게 되고 스포츠 영역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지난 2월 9일부터 25일까지 17일간 열전을 치른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국내외의 찬사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끝났다. 금메달 다섯, 은메달 여덟, 동메달 넷을 획득하여 종합 7위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1988년 하계 올림픽으로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인 데 이어 동계 스포츠 강국으로도 우뚝 서게 되었다. 올림픽을 개최하려면 경기장 건설과 부대시설, 사회적 인프라, 경기운영 능력 등 제반 여건이 갖추어지고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인정을 받고 이번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어 온 국민이 기뻐하였다. 국가의 번영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개인의 생활수준도 향상 시켜 더 아름다운 꿈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

7. 꿈을 향한 첫 걸음 ― 약대 진학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나는 신체장애를 뛰어넘으려고 온 힘을 다해 학업에 열중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대구 사범학교 입학시험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2차 실기시험으로 풍금을 쳐야 했는데 왼손이 어둔한 나는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객지로 나가는 것이 힘든데 잘 되었다"하고 나를 창녕농업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당시 '농고'는 교과목 절반이 농업 과목이었고, 과수원 가꾸기, 화장실 똥오줌 퍼 날라 퇴비 만들기, 온실, 온상 만들기 등 실습을 거의 매주 실시했다.

3학년이 되어 대학 진학 여부를 결정해야 했는데, 3월 초 어느 날 서울에 사시는 종조부님이 고향 오셔서 나더러 하는 말씀이 "너는 몸도 성치 못하니 농사짓고 살 수 없다. 약학대학을 가거라."라고 하셨다. 할아버지 말씀이 머리에 꽂혀 그날부터 진학을 결심하고 입시 준비에 몰입했다. 지원 방향을 문과에서 이과 지망으로 바꾸고 불철주야 시험 준비를 했다. 그 당시 농고 교과 학습 진도는 교과서 절반도 못 배우고 한 학년이 끝나는 실정이어서 학교 수업만으로는 대입시험 치르기가 어려웠다. 특히 수학, 물리, 화학 등은 기초 과정도 못 벗어나기 일쑤였다. 독학으로 시험을 치를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 어려운 가정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름방학 때 대구에 있는 학원에 가서 단기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 1962년 대학 입학시험은 국가고시로 전국 약대 입학정원 470명을 선발했는데 나는 약대 커트라인에 가까운 점수로 합격했지 않았나 싶다. 꼴찌일망정 약대 합격은 내 삶의 향방을 크게 갈라놓았다.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대학 진학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만, 약대 시험에 합격한 것 때문에 식구들이 온 힘을 다해 입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그 덕에 나 자신이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나가게 되었고 대학 캠퍼스 안에서 젊음의 기상 속에 어울려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활비나 잡비는 집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어 대학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기초 학력이 딸려 전공 학과목 이수가 아주 어려웠고 일하며 공부해야 하는 탓에 남들이 놀 때에도 나는 갑절의 노력을 하면서 줄기차게 따라 붙여야 했다.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는 알파벳도 못 배웠는데 '약학 독일어' 강독은 아주 어려웠고 '미적분학'은 기초 이해 부족으로 2학년 말까지 학점을 따지 못하였다.

1963년 대학 2학년 겨울 방학 때 아버지께서 별세하셨다. 남달리 인고의 세월을 자식과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아버지. 특히 막내인 나로 인하여 애쓰고 고생하셨던 아버지를 여의게 되니 가슴이 미어질 듯 쓰라렸다. 약대 진학할 때 그토록 좋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졸업하여 돈 벌어 효도할 기회가 사라지니 한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장례를 마치고 겨울 방학 내내 빈소를 지키며 상주 노릇을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2월 어느 날이었다. 말린 고추, 양파 등을 시장에 내다 팔고 모자라는 돈은 이웃으로 부터 빌려 간신히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여 대구로 가는 길이었다. 그 때는 내가 학교 앞 단칸방에서 자취할 때라 집에서 납딱 보리쌀 한 자루와 된장, 간장 보따리를 메고 들고 버스를 탔다. 대구 내당동 버스 주차장에 도착하여 내리는데 자주색 구두가 내 발을 밟았다. 그런데 내리고 보니 상의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등록금 봉투가 없어졌다. 순간 하늘이 노랗고 몸을 가눌 수 없었는데 그 순간 자주색 구두가 머리에 떠올랐다. 후다닥 땅바닥에 짐을 버려두고 주차해둔 버스 뒤 공터로 달려가 자주색 구두 신은 사람을 찾았다. 허름한 가게 앞에 찾던 색깔 구두를 신은 사나이가 보여 다가가서 대뜸 "내 돈 봉투 달라"고 다그쳤다. 그 돈이 등록금이고, 그 돈 없으면 나는 죽는다고 통사정을 했다. 처음엔 냉담하게 땅을 내다보며 어이없는 듯 대하더니 내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면서 하소연하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더러운 놈 다 보겠다"며 등록금 봉투를 내던졌다. 날치기당한 돈을 되찾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하늘이 도왔다 싶다. 삶의 길이 사면으로 두루 막혀도 낙심 않고 끈질기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신의 가호가 있음을 깨달았다.

8. 꿈을 향한 두 걸음 ― 약국 개업

대학 졸업 후 일 년간 부산에 있는 의약품 도매상 「제일약품」 관리약사로 근무했다. 그 때 근무하던 회사에서 울산지역 여러 약국에 의약품을 공급 했다. 어느 날 울산 판매 담당자가 하는 말이 "약사님 이곳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 받고 일하지 말고 울산에 가서 약국 개업 하세요. 공업단지 개발 붐이 한창이고 울산 가면 장사 잘 됩니다."하고 권하며 거듭 이야기 했다. 그러나 나는 약국 개업할 돈이 전혀 없었고 장사 경험도 없었기에 망설였는데 그 직원이 점포 임대금과 시설 자금 일부를 빌려 주었다. 또 약품은 회사에서 외상으로 공급해 주어 약국 개업을 결심했다.

1967년 7월, 울산시 중구 학산동 뒷길 코너에 작은 가게를 얻어 약국을 열었다. 낯선 땅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객지에서 난생 처음 맨주먹으로 약장사를 시작하니 백무가관이었다. 점포 뒤켠에 딸린 연탄아궁이 부엌에 알루미늄 솥을 걸고 밥 짓고 된장 찌게 끓여 끼니를 때웠다. 약국 일이 끝나는 시간에 빨래하고 지친 몸으로 보내는 밤은 짧기만 했다. 경험 없는 장사인데다 고리채를 얻어 개업을 하여 매월 원리금 갚고 점포세 내고 살다 보니 적자 연속이었다. 약국 경영 문제도 단순하지 않고 버거웠다. 약에 대한 전문 지식 습득은 기본이고 약품 주문, 진열, 정리정돈, 시설 유지보수, 청소, 종업원 교육, 고객 관리와 응대, 홍보, 판매, 복약 지도, 거래선 관리, 약품대금 결재, 보험 청구, 약품판매 대장정리, 세무관련 자료 챙기기 등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또 경조사, 집안 기제사 등 사람노릇하기도 힘들었다.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자니 심신이 극도로 지쳐 앓아눕기도 했지만 약국 문을 닫을 수는 없었다.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아내와 마주 앉아 의논을 했다. 하는 일이 이토록 힘든데 남는 돈도 없으니 이곳 약국을 접고 고향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아내도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다. 그리하여 이사를 위해 진열된 약품을 박스에 담아 묶고 생활 도구와 의복가지까지 짐을 꾸렸다. 이튿날 아침 약국 문을 닫고 아내와 함께 교회 담임 목사님께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대략 경위를 밝히고 고향으로 이사하려고 한다 했더니, 한동안 말이 없으시다가 입을 여시고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고 발전하는 도시 울산에서 장사 못하고 시골로 가면 장사 되겠나? 그동안 할 고생 다하고 이제 희망의 빛이 보이려고 하는데 주저앉으면 안되지"하고 이사를 극구 말렸다. 사실 고향으로 이사한다 해도, 나에겐 반겨줄 사람도 별 뾰족한 수도 없었다. 아내와 나는 목사님 말씀을 뒤로 하고 머리를 긁고 돌아와 다시금 생각을 했다. 이도저도 못하고 그 날 깊은 산골에 들어가 이틀을 푹 쉬고 3일째 되던 날 묶었던 짐을 다시 풀고 약국 문을 열었다.

이사 소동을 벌이다 다시 약국 일을 이어갔지만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피할 곳 없고 돌아갈 길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티어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개업한 지 5년이 지난 뒤 어느 날 우연히 한 소개업자 소개로 동네 뒷구석 미나리 꽝 78평을 헐값에 샀다. 도시가 팽창 발전하면서 그 땅 곁 도랑이 복개천도로가 되고 또 인근에 역전 시장이 열렸다. 나도 그 땅에 집을 지었더니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내가 지은 집에서 월세 없이 장사를 하게 되어 서서히 자립기반을 잡게 되었다.

9. 꿈을 향한 세 걸음 ― 시민단체 봉사와 제도권 진출

울산에 온 지 10여년이 지나자 생활이 좀 안정되었다. 그러자 지역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시민단체 활동에 눈을 떴다. 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시민사회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 인적 교류의 폭을 넓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처음으로 YMCA 이사로 참여했다. 전통 있는 기독청년회 조직 안에서 NGO 활동과 운영에 대한 이해를 높였고, 전문성을 쌓아 나중에는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1991년에는 울산 환경운동연합이 출범하여 의장직을 맡아 4~5년간 지역의 환경 보호운동을 펼쳤다. 개발연대에 정부의 산업정책이 주민들의 건강과 생활 안전에 역행하는 많은 문제가 있어 이를 찾아내고 공론화하는 의미 있는 환경보전 운동을 펼쳤다. 나는 공해와 건강문제를 잘 아는 약사로서 알찬 참여자가 될 수 있었다. 환경단체 회원들이 화학 공단에 들어가 대기 오염의 주범인 아황산가스를 배출하는 공장 굴뚝을 감시하고 토양과 하천을 오염시키는 공장 폐수를 점검하여 행정 당국에 관리 감독을 촉구했다. 시민환경연구소를 만들어 지역 환경오염 현황조사와 보전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시민들에게 활동 상황을 홍보하려고 「ECO-21」 계간지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또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에 가담하여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 검소 절약 운동과 사랑의 실천 캠페인을 벌였고 이 운동이 기독교인만을 위한 일이 아니고 울산 전체 사회운동이 되도록 노력했다. 4, 5년간 열심히 시민운동을 하다가 제도권에 도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5년 6월 27일, 지방자치 제2기 선거 때 울산시 중구 제1선거구에서 경남도의원 후보로 나섰다. 내가 참여했던 시민단체의 후원과 출석 교회 교인들의 도움으로 단일 후보가 되어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민간단체 활동을 하면서, 시민의 목소리를 지방자치 행정에 반영하는 일의 한계를 느끼고 제도권 진출에 뜻을 세우고 노력한 결과였다. 당선 후 도의회 교육사회위원회 소속이 되어 경남 관내 각급 학교의 시설과 인사, 예산 집행을 두루 살피면서 열정을 갖고 의정 활동을 했다.

의회에 진출한 뒤로 지방 자치단체와 유관 기관의 여러 단체 활동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울산광역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 민방위 소양교육 강사, 2002 월드컵 문화시민운동, 울산지방법원 조정위원, KBS 시청자 위원, 울산경찰서 인권단장, 시민과 경찰 협력위원, 중구 제2의 건국추진 위원장, 복산2동 자치 위원장, 농협 울산지역본부 자문위원, 울산사회복지위원회, 공동모금회 부회장, 신용협동조합 이사장 등등 여러 사회단체와 봉사기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나는 한정된 약국 공간에 갇혀 일하고 고객을 만나는 방식도 주로 질병이나 건강 문제를 통하여 인간관계가 형성되므로 사회의 다양한 삶의 현장, 정보에 취약하다. 그래서 여러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역에 대해 연구하고 피나는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 결과 여러 계층의 사회지도자들과 폭넓은 인적 교류를 할 수 있었고 사회 현안문제와 정보를 얻어 의정 활동에 접목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회 초년생에게 닥치는 현실 장벽은 만만치 않았다. 나의 의욕은 태산 같은데 일선 공직자의 방어벽은 두터웠다. 지방 행정 실무에 어두운데다 의원 보좌관도 없던 때라 도움 받을 곳도 없었다. 삶이 약업에서 정치로 180도 달라져 힘들어도, 한번 해볼 만한 일이어서 나는 최선을 다해 배우고 열정을 쏟아 일하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자방자치 초창기라 제도적 모순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도의회 의정활동을 펼칠 때의 일이었다. 충청북도 음성에 소재한 모 종교단체 복지법인이 거창군 내 모처에 장애인 복지시설을 설치하려고 경남도청에 허가 신청을 했는데 시설허가 찬반 논의가 격렬했다. 교회의 사회봉사 사업이고 장애인을 위한 복지 차원에서 나는 당연히 시설허가를 해야 한다는 찬성 발언을 결심하고 「의원 4분 자유발언」을 신청했다. 그런데 거창 출신 모 의원이 장애인 복지시설을 혐오시설로 여겨 자기 선거구에 시설 허가를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얼마나 잘못된 님비적인 생각인가. 나는 짧은 발언 시간에 효과적으로 호소력 있는 발언을 하려고 알차게 발언문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회의 개회가 선언되고 「의원 4분 자유발언」 시간, 의장이 "성보경 의원 발언하세요." 했는데 그 시간 나는 회의장 옆방에서 거창 출신 유도 3단의 정모 의원 완력에 붙들려 꼼짝 못하고 찬성 발언을 저지당하고 말았다. 민주 의정 단상에도 이런 폭력이 통한다는 참담한 사실을 체험하면서 분노를 느꼈지만 지원군이 없다 보니 나 혼자로는 속수무책 이었다.

1997년 7월에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되어서 경남도의회에서 울산광역시의회로 자리를 옮겼다. 광역시 승격 과정에서 도의회의 찬성 의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승인을 받았다.

초대 울산광역시 의회에서는 전환기 초기 의정의 정착을 위해 동료의원들과 힘을 모았으나 법과 제도의 장벽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공직사회의 경직된 사고가 문제였고 무사안일주의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자치 행정의 이론적 소양도 갖추어야 했다. 그래서 울산대학교 정책대학원에서 3년간 공부도 하였다. 그때 나 자신 배움의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자기실현과 삶의 자세 정립에는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곧장 의원 임기가 끝나 버스 떠난 뒤 손들기가 되고 말았다.

울산광역시 의회 1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역 실정을 익히자마자 임기가 끝났다. 1998년, 다시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때 나의 기질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성 의원은 일반 행정보다 교육자치 행정이 적격이니 교육의원에 나서라."라고 권했다. 나도 그 권면에 수긍을 하고 1998년 8월, 울산광역시 교육위원회 교육위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도의회에서의 경험과 시민단체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의회 초년생 티를 벗고 활기찬 교육자치 의정에 참여하면서 보람된 의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광역시 출범 초기 각급 학교의 열악한 교육 시설 환경 개선에 열정을 쏟아 부었고, 중앙 정부로부터 예산 확보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교육위원 임기가 끝나고 약국 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2008년부터 7년간은 울산 중앙신협 이사장직을 맡아 신협 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자산 600여억 원 규모의 조합이었는데, 3년 만에 2,500억 원으로 성장시켰고 지역 서민금융 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했다.

10. 꿈을 향한 네 걸음 ― 남은 날을 기쁘게

성서 시편 90편 모세의 기도 가운데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했는데 나도 3년 후엔 80이 된다.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했다.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살고 싶었다. 더 넓은 세상을 두루 돌아보며 기쁘게 살고 싶었다.

⓵ 책 읽는 기쁨

나의 글 읽기는 '천자문'에서 시작되었다. 서너 살 무렵 사랑채 할아버지 앞에서 '천자문'을 읽었다. 글자도 뜻도 모르고 "하늘 천 따 지"하고 어른이 읽어주는 글자 음을 따라 외웠다. 할아버지께서 이웃 마을 노인들이 모이면, 나더러 '천자문'을 외워보라 하셨다. 나는 꼿꼿이 서서 첫 자부터 마지막 '이끼 야' 까지 단숨에 내달아 외웠다. 그러면 어르신들이 "신동이 났다!" 하고 손뼉 치며 크게 칭찬해 주셨다. 어릴 때 어른들의 그 글 읽기 놀이 칭찬이 평생토록 책 읽는 기쁨을 내 마음속 깊이 새기어 놓았다.

초·중·고 학창시절에는 학업에 열중하느라 교과서 이외의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고, 가난하던 그 시절 농촌에는 다른 읽을거리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시조와 시, 수필 등을 즐겨 읽었고 짧은 시를 암송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글귀는 내 삶의 곁에 따라 다니는 깃발이었다.

약국을 개업하여 생업에 깊이 파묻혀 십여 년을 보낸 뒤 생활이 좀 안정되었을 때, 약국 주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을거리를 찾아 책을 읽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세계 사상 교양 전집」 전질을 구입하여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고 교양과 지적수준 향상에 몰두 했다.

신체장애로 잘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없었고 어떤 특기나 즐기는 여가 활동이 없다 보니 책 읽기는 나에게 유일한 취미 생활이 되었다. 「세계 사상 교양 전집」을 읽을 때 옛 성현들의 가르침으로 삶의 지혜와 지식을 넓혀 지적 욕구가 해소 되었다. 삶의 만족과 내면세계가 넓어지는 기쁨도 갖게 되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간접 체험을 통해 유한한 인생을 길게 크게 깊이 사는 복을 누렸다.

40대 중반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 10여 명이 모여 「마음 밭 독서회」를 조직하여 매월 모임에서 선정한 두 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나누며 토론회를 열었다. 회원들의 열정으로 책 읽기를 통한 지혜와 지식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다양한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접할 수 있었다. 20여 년 모임이 지속되다가 근년에 들어 회원들이 타 지역으로 흩어지고 생활환경이 바뀌어 칩거하는 사람들 때문에 모임이 성글어 졌다.

나의 작은 서재 서가의 책들을 보면 지난 세월 독서 편력이 엿보인다. 40년 약업 속에 활용하던 의약 전문서적과 시민사회와 제도권에 연관된, 지방자치와 '가버넌스' 관련 책들이 책꽂이 아래 자리를 차지한다. 지금은 뒤 늦게 눈 뜬 문학 공부에 관련된 책들과 동서양 고전이 서가의 자리를 넓혀간다.

믿음사에서 출판한 세계문학 전집과 한국 문학 관련 책들이 최근에 위세를 떨친다. 포근한 봄날 오후 무료한 시간 책장에서 뽑아든 시집을 펼치고 마음을 울리는 시 한편을 읽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나만의 세계 '책 읽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⓶ 글 쓰는 기쁨 - 문학 소년의 꿈

청소년 시절, 나는 국어시간이 즐거웠고 훗날 문학을 공부하리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대학 진학 시기에 생활 수단의 선택에 밀려 약대를 지망했고 그 선택이 일생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반세기 세월이 흐르고 이제 생업을 접게 되니 그 옛날 품었던 문학 소년의 꿈이 꿈틀 거렸다. 그리하여 시민 문예교실에 발을 들여 놓았고 또 경주 모 문학관에서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산문 입문반에 등록하여 일 년을 보내고 다시 연구반에 가입했으나 글쓰기는 내게 어렵고 힘든 고역이었다. 청소년 시절의 감성은 둔하여 졌고 시력마저 예전 같지 않아 읽기와 쓰기가 녹녹하지 않았다. 지도 교수님들은 명품 글쓰기를 가르치고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문장 방법론을 강의하지만 일기 쓰기나 신변잡기 수준으로 몸에 벤 나의 글쓰기 버릇은 그 탈을 벗기 힘들었다.

묵은 낫을 벼르듯 애써 2, 3년 글공부하다가 지난 해 4월, 월간 「창조 문예」지에 습작 시詩 몇 편을 보냈는데 뜻 밖에 신인상을 받아 시인의 길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를 염두에 두니 일상생활 주변에서 만나는 대상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내면의 정서를 한 편의 글로 드러내곤 한다. 또 매주 문우들과 만나 습작품을 함께 읽고 다듬는 글공부의 행복을 누리며 꿈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내면에 얽힌 서러움과 한을 글 속에 풀어내며 나의 생각과 정서를 문자로 드러낼 때 마음 속 매듭이 풀리고 삶이 정리된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 상처로 얼룩진 심령을 치유한다. 역사와 시대의 흐름을 바르게 인식하고 나의 생각과 사상 감정을 글로 드러내면 독자와 소통하게 되고 사회 참여의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또 나의 고난과 역경의 삶 이야기를 들려주면 독자들이 인생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깨닫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⓷ 더 넓은 세상 돌아보기

가난한 농촌 시골에서 태어나 성년이 될 때까지 우물안 개구리처럼 바깥세상 모르고 살았다. 객지로 나와 사회에 첫 발을 내 딛었을 때 나는 장터에 갓 나온 촌닭이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나아갈 방향도 가름할 수 없었다. 급변하는 세상 약삭빠른 도시 사람들 속에서 무수히 시행착오를 거치며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까지 청·장년기 10여 년을 떠내려 보냈다. 혼란한 사회 안에서 자립 기반을 닦고 주변을 살펴보니 내가 딛고 선 토대는 너무나 빈약하고 왜소했다.

중년이 되어 시민 사회단체와 제도권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바깥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류 문명의 현장을 알고 싶은 충동이 가슴을 옥죄었다. 처음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을 여행하고 동남아시아를 둘러보았다. 그 후 해마다 여행 반경을 넓혀 유럽과 북미를 여행하였다. 각급 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등 책으로만 배웠던 낯선 땅, 나라와 족속들의 삶의 현장을 두루 여행했을 때 사람 사는 세상이 광대하고 경이로움을 깨달았다. 세계 여행에 재미를 붙여 온 세계를 두루 돌아볼 양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 그리고 인도까지 섭렵했고 나의 세계 여행 기행 노트는 열 대 여섯 권을 넘었다.

여행은 낯선 땅을 찾아가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즐기며 그곳의 대기를 들이키는 일이다. 낯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피는 미지의 길가기이고 즐거운 놀이다. 도시와 거리 시장과 뒷골목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듣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즐긴다. 그 땅의 물산을 만지고 먹거리를 맛본다. 낯섦에 오감이 반응하는 놀라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계인의 삶의 모습을 압축하여 내 안에 접목시키고 내 삶의 방식을 개조하는 신기한 작업이다.

이제 남은 날에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더 자세히 깊이 돌아보고 싶다. 철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 그 넉넉한 품에 안기어 그 은혜 깨닫고 가꾸어 자자손손 이어갈 이 땅을 사랑하련다. 오늘 날 지역마다 명승지를 가꾸어 우리들의 발걸음을 부르고 있다. 사통팔달 잇는 터널과 달리는 찻길이 지난 날 막혔던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 준다. 앞날에 금수강산 우리 땅, 백두에서 한라까지 강화에서 설악까지 두루 돌아보고 그 안에서 무한한 기쁨을 누리고 살고 싶다.

11. 단란한 세 가정

혈혈단신으로 객지에 나와 좌충우돌하며 삶의 길을 내 달았는데 운명의 여신은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붙여 주었다. 약국을 개업하면서 월세 점포를 빌렸는데 집주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 이었다.

세상살이 초년생인 낯선 총각을 측은히 여겨 생활의 편의를 도모해 주었고 같이 신앙생활을 하자고 교회로 나를 인도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객지에서 나는 따뜻한 인간애를 느꼈고 일 년 뒤 집주인 딸과 사귀어 결혼하게 되었다. 아내는 세상살이 서툰 더벅머리 총각을 신랑감으로 맞아 가정을 꾸렸고 나는 시골에서 세상 본데없이 자라 무엇 하나 제대로 가정을 꾸려 나갈 능력이 없었는데도 나의 하는 일에 따르며 알뜰히 나를 도와주었다.

결혼 1년 뒤 첫 아이 딸을 낳았다. 친어머니 역을 다해주신 장모님 덕분에 새 가정은 세상 파도를 타고 순항하게 되었다. 3년 뒤 둘째 딸을 낳고 10년 뒤 막내를 또 얻어 다섯 식구 단란한 삶의 둥지를 만들었다. 첫째와 둘째가 결혼하여 사위 둘, 외손자녀 셋씩 열 식구와 세 가정 열세 명이 명절 한자리에 모인다. 아이들이 모이면 왁자지껄한 수다 속에 사람 사는 맛이 풍기고 딸과 손자들이 호위병처럼 나를 둘러싸고 지킨다. 이렇게 온 식구들이 모이면 음악회를 열고 장기 자랑을 펼친다. 피아노,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색소폰, 대금, 오카리나 등 다양한 악기가 동원되어 실내 오케스트라가 된다. 요사이 아이들은 악기 다루는 재주가 출중하다. 그 옛날 풍금으로 애국가 한 소절을 못치고 사범학교 입시에 낙방한 내 모습이 가소롭게 여겨진다.

아이들은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나는 컴맹이어서 자녀들에게 배우며 살아야 한다. 손재주가 없어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이가 되었지만 아이들 도움으로 즐거운 오늘을 산다.

12. 옛 고향 마을 ― 상전벽해

지난해 가을, 반세기 이상 고향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는 죽마고우를 찾아가 흘러간 얘기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옛 토담집을 헐고 현대식 단층 주택을 지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이제 농촌이라 해도 전기, 수도, 가스가 구비되고 자가용 승용차와 제반 가전제품 등 삶의 환경이 도시에 진배없었다. 친구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은 국내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영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스위스에서 산단다. 외국인 사위는 세계적인 제약회사에 근무하며 고액 연봉을 받는 간부사원이라고 했다. "딸아이 잘 키워 외국에 보내 떨어져 살아 외롭지 않으냐?" 했더니 "인터넷 화상 통화로 매일 이야기하고 만나니 옆에 두고 사는듯하다."라고 했다. 지구촌 인류의 삶의 방식이 우리 땅 가난하던 농촌 그 옛날 고향 마을까지 익숙해 졌구나 생각하니 꿈길 같기만 했다.

농사일도 그 옛날 농촌의 일이 아니었다. 트랙터로 논밭 갈고 이양기로 모심기 하고 콤바인으로 수확, 탈곡하며 노년의 약한 기력을 기계 영농으로 뒷받침한다고 했다. 예전 천수답의 걱정도 말끔히 해소되었는데, 낙동강 함안보에서 강물을 2단계로 양수해서 동네 앞산 위 수로를 통해 급수하여 어물리 들판 전체에 농업용수가 풍족하게 되었다 한다.

상전벽해가 된 옛 고향 마을 모습에 감동을 받고 지나온 70여 년을 뒤돌아보니 광풍 속 소용돌이 친 세상이 어리둥절해 진다. '발 딛고 있는 이 땅이 내 나라 나의 조국이 맞나?' 하고 스스로 되물어 볼 만큼 오늘의 삶이 낯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초고속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 지식과 정보를 교류하고 세계인과 소통하며 산다. 급격한 변화가 내게는 너무 버겁고 그 속도를 감당하기 힘들기도 하다. 내가 촌놈이고 혼란한 시대를 지나온 늙은이여서일까?

지독히 가난하고 파란만장했던 이 땅, 폐허의 터전 위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피와 땀을 흘렸기에 오늘의 잘사는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지난 70여 년 평화로운 한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라가 든든해야 백성이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다.

봄기운이 완연한 2018년 맑은 날, 나는 따뜻한 아파트에서 창밖을 내다보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가난을 겪고 전쟁을 치르고도 기적 같은 국가 경제 성장으로 잘 사는 우리가 되었다. 나는 전쟁의 비극과 가난의 아픔을 직접 체험했지만 낯선 땅에서 맨주먹으로 약국을 열어 자립기반을 닦고 사회봉사를 하며 열심히 살았다. 국가 사회 공동체의 변영과 평화로운 한 세대 울타리 덕분이었다. 이제 남은 날에 지난 날 못다한 꿈을 펼치며 삶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

13. 에필로그

꿈같은 세월, 지나온 인생길이 아득하다. 먼 길 흐르며 소용돌이로 오염된 강물은 바다에서 정화되리라. 우리는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철드는 듯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시니어는 슬플 때 눈물을 참았다가 기쁠 때 터뜨린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지난날 못다한 회한으로 속마음은 더욱 슬프지만 기쁨의 눈물을 쏟는다. 이 땅에 단 한번 주어진 인생길, 우리가 아무리 역경을 만난다 해도 그 역경을 헤치고 최선을 다하면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한 세상이 아닌가?

◆당선 소감

성보경
성보경

평소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을 제대로 글로 표현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묶어 논픽션 공모전에 응모 했습니다.

뜻밖에 당선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생업에 매달려 살 때는 그렇게 여유가 없었는데 은퇴 후 2~3년간 짬짬이 글쓰기를 배우고 익힌 것이 좋은 결과를 맞게 되어 가슴 흐뭇합니다.

청소년기에 품었던 문학 소년의 꿈을 이루어 가슴이 벅차지만, 부족한 필력으로 원고지 100매 분량을 채우느라 이야기가 느슨해져 부끄럽습니다.

지나온 한 평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어 더없이 좋았습니다.

시답잖은 글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열정을 가지고 더 나은 글쓰기를 하라는 격려로 알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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