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의 요리산책]풋고추전

노정희 요리연구가

"아무리 신경 써서 차려도 아가씨가 해 주는 맛이 아니라고 하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시댁에 들린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요구하는 고추전을 정성껏 마련했다. 다진 고기와 당면으로 속을 채워 튀기기도 하고, 고추를 반 갈라 속을 넣어 전을 부쳐드려도 딱히 만족해하지 않는 눈치란다. 큰올케 언니는 아버지의 입맛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생신을 맞아 시골에 갔더니 큰올케 언니가 고추전을 부친다. 큰오빠는 금융업에 몸담고 있다가 퇴직하자마자 시골에 내려왔다. 홀로 계신 어머니께 따신 밥상만이라도 차려주고 싶다는 오빠와 올케언니의 마음이 미쁘다. 도시에서만 살던 올케언니는 나름 시골생활에 적응해 가는 중이다. 고추전 부치는 모습을 보니 불현듯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이제는 올케언니가 부친 고추전을 맛있다고 하셨을 텐데.

이맘때가 되면 풋고추가 맛이 들기 시작한다. 너무 어린 것은 맛이 밍밍하고, 약간은 약이 오른, 조금은 맵싸해 보이는 고추가 전을 부치기에는 적격이다. 매운 맛은 요리 중에 희석되기도 하거니와 나름 입맛을 당겨주기도 한다. 풋고추 전은 아버지와 나 사이의 식성(食性)을 묶는 가교 역할을 했다.

"꼬마가 전을 잘 부쳤구나." 고추전 한 접시를 양념간장에 다 찍어 드시고 마지막 입가심으로 막걸리 한 잔을 더 달라고 하시던 아버지. 어머니는 반주로 한 잔씩 드시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버지가 술을 과하게 드시는 것을 탐탁찮게 여겼다. 적당한 안줏거리가 마련되면 어머니 몰래, 아버지께 술을 한 잔씩 더 따라드렸다.

세상살이가 어디 밍밍하기만 하던가. 고추는 민속에도 곧잘 등장한다. '고추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가 더 맵다'는 며느리 신세 한탄처럼 때로는 눈물바람도 일고, 벽사(辟邪)의 의미로 액운을 쫓기 위해 장을 담글 때나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때로는 맵싸한 고추전을 먹음으로써 사람살이의 맛을 느끼기도 한다.

아버지 떠나신 지도 십 수 년이다. 인생은 흐르는 것이라고 했다. 흐르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정확하게는 나도 모른다. 다만 아버지가 걸어가신 길과 어머니가 가르쳐 주는 방향으로 이정표를 삼을 뿐이다. 살아가는 게 청양고추 맛을 내기도 하지만 그 맵싸함 속에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양분이 있음을 안다.

아버지가 맛있게 드셨던 고추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밀가루에 소금 간을 하여 반죽한다. 고추는 길이로 반 갈라서 씨가 들어있는 상태로 반죽을 얇게 입혀 전을 부친다. 이렇게 전을 부치면 고추 자체의 순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tip: 시중에 판매되는 튀김가루나 부침가루는 양념이 혼합되어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다. 전을 부쳤을 때 부풀기도 하거니와 조미료 맛으로 인해 원재료의 맛을 감한다. 요즘은 고추 종류가 다양하다. 연두빛깔의 파프리카와 모양이 비슷한 '당조고추'는 탄수화물 흡수율을 저하시키는 작용을 하고, 수분이 많은 '아삭이 고추', 카로틴을 함유하고 밑반찬용으로 사용하는 '꽈리 고추', 매운맛이 강하고 비타민 A, C, 칼슘 등이 함유되어 있는 '청양 고추' 등이 있다. 노정희 요리연구가

노정희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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