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라는 일본 여류시인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신여성이자, 일본 여성 최초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에 간 인물이다. 그녀의 파리행은 파리에 머물고 있던 남편 권유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1912년 5월 5일 도쿄를 출발해서 5월 19일, 정확하게 2주 걸려서 목적지 파리에 도착한다. 경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쿄 신바시역(5월 5일)에서 기차로 쓰루가까지, 쓰루가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 도착(5월 8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하얼빈, 이르쿠츠크, 바르샤바를 거쳐서 파리 도착(5월 19일).
빠듯한 여비 탓에 모닝 빵 한 조각과 커피 한잔으로 이틀을 견디기도 했다. 기차에 일본인이라고는 그녀를 포함해서 두 사람 밖에 없는데다가 외국어도 전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불안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하얼빈에 내려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곳을 둘러보고, 모스크바에 내려 대사관에 근무하는 조선인 안내로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기도 하지만 모두 잠시의 시간을 틈탄 것이었다. 힘든 여행이었지만 그녀는 이겨내었고, 파리에 무사히 도착한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 여정과 파리의 경험을 담은 멋진 글을 발표한다.
그런 요사노 아키코 시비(詩碑)가 1994년 블라디보스톡 극동국립대학교에 세워졌다. 시비가 세워질 정도로 그녀와 블라디보스톡 간에 대단한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1912년 일본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위해 잠시 기차를 기다린 것뿐인데도 시비가 세워진 것이다. 2008년에는 '요사노 아키코 그룹'이라고 이름 붙인 팬들이 요사노 아키코 탄생 130주년을 기념하여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여 극동국립종합대학에서 기념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미미한 연결고리를 엮어서라도 타국에 '일본'을 전달하는 일본 특유의 기민함이 여기에서도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 문학 과 일반인 간의 소통문제를 오랜 기간에 걸쳐 찾아 온 일본 사회의 노력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물론 1910년대 말 시베리아 내전 개입 등 시베리아 땅에 강하게 집착했던 일본의 그 오랜 욕망이 시비 설립에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지점에서 묻게 된다. 지난 시절 우리 사회의 도시 관광프로젝트 붐 속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들어섰던 수많은 근대문학관의 그 작가들은 왜 대중과 연결되지 못한 채 문학관 속에만 갇혀있는 것인지. 일본에 비해 짧은 근대문학 역사에도 불구, 문학관은 일본과 거의 동일한 수준을 지닌 이 풍족한 현실에서 우리의 근대문학은 왜 대중과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문학은 왜 역사를 전해주는 문화적 힘이 되어주지를 못하는 것인지를.
정혜영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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