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야곱이 천사와 싸운 이유

수원대 교수

외젠 들라크루아 작
외젠 들라크루아 작 '천사와 싸우는 야곱'
이주향 수원대 교수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자 정대현은 '나'의 이룸은 만물의 이룸과 맞물려 있다고 합니다. 어디 이룸뿐이겠습니까? 상처까지도 맞물려 있지 않나요? 이룸이 '나'를 긍정하게 한다면 상처는 '나'를 자극합니다.

'나'를 자극하는 존재가 있지 않나요? 친구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고, 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형제 혹은 자매일 수도 있지요? 동일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좋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지만 못마땅할 때는 진짜 아픈 적이기도 한 존재들이 바로 형제 혹은 자매 아닌가요? 가인과 아벨이 그렇고,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렇고, 야곱과 에서가 그렇고, 레아와 라헬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렇습니다. 어쩌면 형제 혹은 자매는 내 반쪽이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그림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열흘 가까이 파리에 머물면서 하루 종일 걸어 다녔습니다. 그중에 행복했던 일은 원 없이 미술관을 다녔던 것입니다. 이틀을 오르세에서 보냈고, 삼일을 루브르에서 보냈습니다. 루브르에서는 들라크루아 특별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특별전시의 이미지 컷이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었습니다.

야곱, 운명적인 인물이지요?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선택한, 축복받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형 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야곱이 받은 축복은 에서가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축복 도둑질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야곱은, 한때는 분명히 둘도 없는 사이였을 에서를 피해 도망갑니다. 축복을 받고 도망가지만, 야곱이 그 축복의 의미를 진짜 알고 있었을까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신성한 꿈을 꾸지 않았을 테니까요.

꿈, 꾸십니까? 꿈이 잘 맞나요? 베델이라는 곳에서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하늘에 닿아있는 층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그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는 꿈입니다. 월리엄 브레이크나 샤갈을 포함해서 이 극적인 장면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신성한 꿈을 꾼다는 건 스스로 내면의 신성을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거지요? 무의식은 의식이 아는 일을 꿈으로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꿈을 꾸고 나서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거겠지요. 야곱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셨는데도, 내가 그것을 몰랐구나. … 이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베델에서 야곱은 자신을 지켜주는 손을 믿게 됐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꾀와 머리로 살았던 삶을 진심으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행복을 위해서는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 말을 몰라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사랑하고 집착하고 쌓아놓은 그것 이상의 힘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그건 내려놓는 게 아니라 에서처럼 빼앗기는 겁니다. 내려놓을 수 없는데, 내려놓아야 한다고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는 건 죄책감을 키우고 강박증을 키우기에는 좋은 방법입니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노예도덕에 길들어지는 방법입니다.

[{IMG03}]

삶을 충분히 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내려놓을 수도 없구요, 자연스레 힘을 빼며 살 수도 없습니다. 이제 자연스레 힘을 빼며 살 수 있게 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4명의 처를 얻었고, 아이도 많이 낳았고, 재산도 많이 생겼습니다. 라반과의 관계에서만 본다면 그는 정말 내려놓은 자였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일했는데, 라반은 그를 속이고 사랑하지 않는 레아를 주었습니다. 그것도 기막힌데, 또 라헬을 주는 조건으로 7년을 일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꾀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라반의 살림을 관리해주었고 불려주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재산을 주지 않으려고 꾀를 썼는데도 야곱은 묵묵히 속아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자가 됐습니다. 셈법 너머 보이지 않은 힘이 야곱을 진득한 사람으로 만든 거지요.

마침내 야곱은 돌아갈 때가 됐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형 에서입니다. 고향에 가야 하는데, 그래야 진정 자기 집을 세우는데, 그러자면 피할 수 없는 존재, 형 에서가 걸립니다. 이제는 평생 덮어두기만 했던 자기의 그림자, 형 에서를 대면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대면해야 하는 야곱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그 대면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는지 야곱의 기도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부디 저의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

형이 두려워서 야곱은 형의 분노를 풀어줄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고, 종들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앞세워 보내고 자기는 혼자 남습니다. 혼자 남아 그는 밤새워 우리가 천사라고 하고 싶은 어떤 분과 씨름을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두려운 것도, 불안한 것도 없이 힘을 빼고 살 수 있었던 야곱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 그래서 늘 명치끝에 걸려 있는 것이 바로 형 에서였습니다. 당신의 명치끝에는 무엇이 걸려 있나요? 그것이 바로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내면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내가 부끄러워해서 외면했던 부분이고, 모욕적이어서 증오했던 부분이고, 인정할 수 없어 아예 잊고 있었던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는 자기의 무의식이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제일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억누르고 외면하고 방치했으니까요. 그런데 에서를 대면해야 하는 야곱처럼 두렵기만 한 그 그림자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림자를 대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들라크루아의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날개를 가진 금발의 천사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천사를 밀어재끼고 있는 야곱의 근육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자와의 싸움은 그토록 치열합니다.

나를 초조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집중해야 할 내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야곱이 선악을 넘어 생사를 넘어 천사와 투쟁했듯, '투쟁'이라 할 만큼 치열하게 나를 불안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그림자를 품고 또 품어 보신 적이 있나요? 그림자 대면하기는 야곱에게 에서처럼 내 인생의 화두로 다가온, 소화할 수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품고 또 품는 것입니다.

천사와 싸운다는 건 온전한 신성을 얻기 위해 자기 전 존재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야곱처럼 엉덩이뼈를 다칠 수도 있고, 북유럽의 신 오딘처럼 눈 하나를 내줄 수도 있습니다. 붓다의 제자 아노룻다처럼 두 눈을 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투쟁을 제대로 한 사람은 자기가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지혜를 얻었으니까요? 당신의 그림자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천사와 씨름하시나요?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