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일곱에 풀등이란 말 처음 알았다
모래등도 고래등도 곱등이도 아닌 풀등이라니
서해 앞바다 대이작도가 숨겨둔
일억만년 고독을 견디며 들숨날숨이 만들어낸
신기루의 聖所
하루에 한 번 갈비뼈 열고
젖은 모래등 햇살에 널어말리는 혹등고래
타박타박 눈썹사막 걸어나온
풀등인 당신에게 기대어
한 生이 다 저물어도 좋겠다고
나직나직 말하는 여린 바다가 있다
―시집 『풀등』 (만인사, 2011)
'풀등'은 강이나 바다 가운데 모래가 쌓인 그 둔덕에 풀이 수북하게 돋아난 곳을 일컫는 말로, '풀섬'이라고도 한다. 서해 대이작도 앞바다의 '풀등'은 하루 두 번 썰물 지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모래섬이다. 시적 화자는 난생처음 본 '풀등'에서, 바다의 수호천사라 불리는 눈부신 '혹등고래'를 연상하기도 하고, 아득한 세월 동안 밀물썰물이 빚어낸 고독한 '신기루의 聖所(성소)'라는 경이로운 생각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사막이나 달의 표면을 닮은 신비한 모래둔덕으로 조개, 바지락, 고동을 캐러 "타박타박 눈썹사막 걸어나온" 여인을 보는 순간, 당신이 곧 "모래등도 고래등도 곱등이도 아닌 풀등"이라고 반색한다. 그런 당신은 눈앞에 우연히 마주친 이가 아니라, 마음 한편에 꼭꼭 숨겨둔 사람이다. 어쩌면 당신은 아름다운 풍경 앞에 떠오르는 이 저편에, 아름다운 풍경 그 자체인 사람이다. 그래서 "풀등인 당신에게 기대어/ 한 生(생)이 다 저물어도 좋겠다"고 순하고 여린 바다의 입을 빌려 나직나직 사랑 고백하는 것이다.
시인·문학의 집 '다락헌'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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