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흔적 지우기는 본능인가

김교성 경북본사장
김교성 경북본사장

초중고 시절 잘 나가던 남녀 운동선수가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실업 무대로 직행해 성공 가도를 이어갔다. 이들의 활약상은 매일신문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그런데 이들이 인터넷으로 검색되는 신문 기사를 삭제해 달라고 신문사에 요청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신문을 확인했으나 마땅히 잘못한 부분이 없어 그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결혼을 앞둔 여자 선수는 신문에 실린 어린 시절 자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까맣게 탄 얼굴 사진을 혹여 시댁 식구들이 볼까 걱정이 된 것이었다.

남자 선수는 경북의 산골 출신이란 꼬리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선수는 가족들이 산골 출신으로 알려지는 게 싫다고 한다며 인터넷에서 신문 기사가 검색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두 운동선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성공한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의 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숨기려고 한다. 본능에 가까운 흔적 지우기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흔적 지우기는 정치 무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나타난다. 비효율적이며 치사하고 냉혹해 보일 정도이지만 정당의 이념을 앞세운 정치인들은 전임자 흔적 지우기를 통과의례로 여긴다.

다른 사람이 의욕적으로 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의지라고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진정한 치적은 다른 사람이 추구한 일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닐까. 새로움은 일시적이고 또 다른 새로움에 밀려난다.

요즘 지방정치 무대가 시끄럽다. 6·13 지방선거의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 새판짜기가 본격화하면서 흔적 지우기와 관련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들여다보면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 같지도 않다.

권력을 잡은 단체장들은 이전 집행부의 사업을 다시 들여다보겠다고 한다. 조직 개편과 인사를 통해 이를 위한 포석을 하고 있다. 일종의 길들이기다.

의회와 언론 등 외부의 조언과 견제가 있지만 외면하기 일쑤다. 권력을 다지려는 의지가 강하기에 약간의 출혈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3선을 채운 김관용 전 경북도지사 치적 중 하나인 경주세계엑스포도 영향을 받고 있다. 민선 7기 경상북도의 주인이 된 이철우 도지사는 "경주세계엑스포는 공무원들의 원성이 높은 사업"이라며 손질을 예고했다.

경북도뿐만 아니다. 수장이 바뀐 자치단체의 핵심 사업은 대부분 전면 재평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치 보복이나 전임자 치적 깎아내리기 등 사심이나 정치적인 판단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행착오가 반복된다. 이로 인해 피해와 불편은 고스란히 민초에게 돌아간다.

지금 우리는 지난해 정권 교체 후 흔적 지우기에 따른 시행착오로 무수한 생활, 경제 고통을 겪고 있다. 전임 정부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 쏟아내는 정책이 현장에 잘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폭염 사태 속에서 뒤죽박죽이 된 전력 수급 정책도 그중 하나다.

무조건적인 반대에 대해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집행부뿐 아니라 지방의회의 혼란도 심하다. 한 지방의회 의장은 "어릴 때부터 수십 년을 함께한 친구가 정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반대를 한다. 기초의회까지 당파 싸움을 해야 하는 건지 회의감이 든다"고 했다.

새로 선택받은 권력자들이 정의를 바탕으로 현명하게 칼을 휘두르길 바란다. 4년 후의 평가는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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