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태권브이'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부흥기를 이끈 캐릭터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67년 '홍길동'과 함께 열린 극장용 애니메이션 시장. 이후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작 편수가 줄어 사라진 듯 했던 이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김청기 감독의 1976년작 '로봇 태권브이'다. 당시 국내에 전무했던 거대 로봇을 캐릭터화하고 태권도 기술을 접목해 큰 인기를 얻었다. 스토리 역시 꽤나 탄탄해 그 시절의 기술력 등을 고려할 때 작품 자체 만으로는 상당한 완성도를 보였다고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로 태권브이라는 캐릭터만 놓고 보면 안타까운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디자인 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마징가 제트를 대놓고 베낀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한국 고유의 캐릭터라고 내세우기엔 지극히 민망하다. 그런데 태권브이가 최근 법원으로부터 '마징가제트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저작물'이란 판결을 받아 표절 논란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워졌다. 다만 이 판결이 정서적 공감대까지 형성한 건 아니다. 여전히, 태권브이는 마징가를 많이 닮았다.

#태권브이 손 들어준 법원
지난달 31일 서울중앙지법은 주식회사 로봇 태권브이가 완구류 수입업체 운영자를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4천만원 지급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은 해당 완구류 업체가 제조한 나노 블록 방식 장난감이 태권브이와 유사하다며 주식회사 태권브이가 이의를 제기한 건이다. 이에 완구류 업체 측은 "태권브이는 일본의 마징가제트를 모방했으므로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창작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태권브이가 업보처럼 안고 있던 표절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다.

하지만 재판부는 태권브이를 두고 '마징가 제트와 외관상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며 이 캐릭터를 '마징가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저작물 또는 이를 변형 및 각색한 2차적 저작물에 해당한다고 봐야한다'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태권브이 측은 표절 논란의 면죄부를 거머쥐게 됐다.
본의 아니게 마징가와의 비교에서 태권브이가 독창성을 인정받는 결과가 나왔지만, 이 소송의 포인트가 태권브이와 태권브이 캐릭터를 무단 활용한 업체 간의 갈등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온전히 표절여부 판단을 내린 결과라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정서적으로 '태권브이는 마징가를 베낀 것'이라고 했던, 패소한 완구업체 측의 주장에 더 끌릴 정도다. 물론, 태권브이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궁지에 몰리자 표절의혹을 제기한 해당 업체의 뻔뻔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태권브이 디자인, 마징가와 판박이
태권브이는 76년에 첫 작품이 나온 뒤 1990년까지 총 7편의 시리즈물로 제작돼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대표적인 로봇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외에 만화책 등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지금은 주식회사 로봇태권브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져 캐릭터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실사영화 제작을 목표로 장기간 준비가 이뤄지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실사판 시나리오의 밑 작업을 위해 웹툰 '브이'를 먼저 제작해 공개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주인공들이 나이가 든 뒤의 이야기를 그렸다. 정치목적으로 활용되던 태권브이가 용도폐기되고 조종사 훈이도 평범한 중년 직장인이 된 현실 안에 돌연 적들이 출현한다. 이에 훈이가 다시 태권브이를 움직여 전투를 치른다는 내용이다. 한때 원신연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테스트 영상까지 만들어 공개하는 등 실사판 제작이 본격화되는 듯 했지만 결과적으로 투자 문제 때문에 무산됐다. 이후 10년이 넘도록 제작이 이뤄지지 못했는데 지난해 '곡성'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이 이 프로젝트를 긍정적으로 검토중이란 사실이 전해지면서 또 한번 화제가 됐다.

이처럼 태권브이가 폭넓은 수요층을 확보하고 다양한 콘텐트와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또 다방면으로 활용 가능한 좋은 캐릭터란 사실은 충분히 인정해줄 만 하다. 원소스 멀티유즈에 대한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았던 1970년대에 태어나 지금까지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그 생명력과 잠재력에 대해서는 박수를 쳐 줘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캐릭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디자인 요소를 대놓고 카피한 사실까지 눈 감아줄 순 없다. 김청기 감독 본인이 "마징가를 두고 연구하긴 했지만 닮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양심을 팔면서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신조가 있다"고 밝혔지만 그 말과 달리 태권브이는 마징가의 판박이다. 얼굴 부분의 기본적인 윤곽과 가슴, 팔, 다리 등 몸통의 모양새가 그대로 놓고 그린 것처럼 유사하다.

김청기 감독은 태권브이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작품 속 로봇 캐릭터를 일본 작품과 흡사하게 만들어낸 전적이 있다. 나름 디자인에 큰 변화를 준 1982년작 '슈퍼태권 브이'도 같은 해에 일본에서 공개된 '전투메카 자붕글'의 로봇 디자인과 꼭 닮았다. 1982년에 발표한 히트작 '초합금 로봇 쏠라 원투쓰리'는 '육신합체 갓마즈' '로봇 핫짱' 등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을 고루 가져다 만들었으며, 84년작 '스페이스 간담브이'는 일본의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 로봇 캐릭터 발키리를 그대로 베꼈다. 86년부터 시작된 실사합성 프로젝트 '우뢰매'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대중문화 콘텐트가 국내로 들어오는 케이스가 드물었던 당시, 실제로 한국 방송-영화계에는 일본 작품을 표절하는 일이 허다했다. 1960, 70년대에 충무로 주요 관계자들이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 히트작을 베껴 시나리오를 쓰고 심지어 구도까지 동일하게 카피해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매년 방학 시즌에 맞춰 극장에 내걸고 돈을 벌어들이는 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캐릭터 디자인 따위에는 신경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의 캐릭터를 슬쩍 몇 부분만 바꿔 쓰면 그만이었다.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이 종종 표절의혹을 제기한다고 해도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큰 문제로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다 90년대가 돼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고 2000년대로 들어와 인터넷까지 발달하면서 과거에 만들어진 국내 대중문화 콘텐트의 상당수가 일본의 것을 베꼈단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김청기 감독도 피해갈 수 없었다. 결국은 간담브이 등 지나칠 정도로 똑같이 베낀 캐릭터들에 대해서는 표절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캐릭터 자체의 영향력이 뛰어난 태권브이에 대해서는 독창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태권브이 시리즈가 가진 나름의 미덕은 인정하되 디자인 도용 부분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시절의 업계 분위기가 그랬다고 하더라도 떳떳할 순 없다. 태권브이라는 캐릭터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현 상황에서, 애초 이 캐릭터의 탄생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따져보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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