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산책] 여름날 산 속 정자(산정하일:山亭夏日)-고변

연못 속 누대 그림자, 산들바람에 꽃향기로 일렁

푸른 나무 그늘 짙고 여름날은 길고 긴 데 綠樹陰濃夏日長(녹수음롱하일장)

거꾸로 된 누대 그림자 연못 속에 들어 있네 樓臺倒影入池塘(루대도영입지당)

수정 발 움직이며 산들바람 일어나니 水精簾動微風起(수정렴동미풍기)

한 시렁 장미꽃 향기 온 집안에 가득하네 一架薔薇滿院香(일가장미만원향)

이 시를 지은 고변(高騈: 821-887)은 당나라 말기의 절도사로 민중봉기(民衆蜂起)를 일으켰던 황소(黃巢)를 토벌하는 토벌군의 사령관이었다. 부하에게 살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했지만, 하나의 화살로써 두 마리 수리를 맞출 정도로 아주 호쾌한 무인이었다. 그의 휘하에서 일하고 있었던 최치원이 그를 대신하여 지은 천하의 명문 '토황소격'(討黃巢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제법 낯익은 사람이다.

아니, 그런데, 바로 그 고변이 시인이었던가? 그렇다. 그는 당시의 꽤나 잘 나가는 시인이었다. 100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당시'(全唐詩) 가운데 1 권이 그의 작품만으로 채워져 있을 정도다. 특히 위의 작품은 우리나라 한문 교과서에도 오래도록 수록되어 왔던 절창(絶唱) 중에서도 절창이다.

작품 속의 계절은 기나긴 여름. 한 점 바람조차 없고 보니, 누대의 그림자가 연못 속에 고스란히 거꾸로 들어가서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다. 눈앞에 그대로 그림이 그려지는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하지만 단 한 마리의 개미새끼조차도 얼씬 대지 않아, 고요라도 숨이 턱 막힐 듯 한 절대 고요다,

그 때다. 수정발이 가볍게 흔들리나 싶더니,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일어난다. 겨드랑이 속의 털 몇 올이 바람 맛을 먼저 알고 간들거리면서, 서늘한 촉감이 온몸에 느껴진다. 우와, 이제는 살 것 같다. 그와 동시에 시렁에 가득한 장미꽃 향기가 바람결을 따라 온 집안에 가득히 퍼진다. 화자(話者)의 코끝에도 물론 장미꽃 향기가 훅 풍겨온다. 아아, 아찔하고 황홀하다. 그냥 그 향기에 취해 아주 오래도록 서 있고 싶다.

이종문 계명대 교수
이종문 계명대 교수

뭐라고? 이토록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를 황소와 한바탕 맞장을 뜬 토벌군의 사령관이 지었다고? 그렇다. 그 때는 시를 짓는 것이 교양필수였던 시대, 무인들 가운데서도 기막힌 시를 남긴 시인이 많았다. 고변과 맞장을 떴던 황소도 또한 저 유명한 '국화'(菊花)시를 남긴, 난데없는 시인이 아니었던가.

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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