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시부문 당선작]전화번호를 지우는데

전화번호를 지우는데

박 윤 우

우리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묵은 이명씨(耳鳴氏)가 산다

오늘따라 내가 흔하다

나는 계단참이고 우산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풍경이다 우스운 일에만 웃는다

인적 드문 내소삿길, 인중 긴 꽃을 내려다보며 눈으로 만졌다

무슨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꽃

풀 먹인 모시 적삼 같은 녀석에게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다

거기, 매발톱

꽃은 폭발이 아니라 함몰이다

사월의 허리를 부축하는 미나리아재빗과 누두채(漏斗菜)

대궁 위의 푸른 뿔, 안으로 안으로 구부리는

저 푸른 화판

저희끼리 붐비며 함몰 중이다

잎도 안 난 노루귀가 매발톱 따라 고개를 꺾는, 매발톱과 노루귀 사이 너를 묻으며 비를 맞았다

돌아와, 식은밥에 물 말아먹고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지우는데, 이명씨(耳鳴氏)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느냐며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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