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7>안동의 만세운동, 경북지역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

안동의 만세 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만큼 강력하고 격렬했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1인 시위를 시작으로 독립만세 운동은 27일 풍남면(현 풍천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했다. 사진은 당시 안동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신한은행 앞 광장. 김영진 기자
안동의 만세 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만큼 강력하고 격렬했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1인 시위를 시작으로 독립만세 운동은 27일 풍남면(현 풍천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했다. 사진은 당시 안동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신한은행 앞 광장. 김영진 기자

안동의 만세 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냈을 만큼 강력하고 격렬한 투쟁의지로 나타났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1인 시위를 시작으로 독립만세 운동은 27일 풍남면(현 풍천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했다. 안동의 만세시위는 장날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는 게 특징이다. 안동군 19개면 가운데 11개면에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장이 서지 않는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열린 것이었다.

안동의 만세 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날 만큼 강렬하고 격렬했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1인 시위를 시작으로 독립만세 운동은 27일 풍남면(현 풍천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했다. 사진은 당시 안동면 1차 시위 장소 모습.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안동의 만세 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날 만큼 강렬하고 격렬했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1인 시위를 시작으로 독립만세 운동은 27일 풍남면(현 풍천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했다. 사진은 당시 안동면 1차 시위 장소 모습.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석주 이상룡 동생 이상동, 1인 시위로 만세운동 불길

안동의 만세운동은 일본 동경 유학생 강대극의 귀국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재명의 귀향으로 시작된다. 강대극은 1919년 2월 16일에 '2·8독립선언서'라고 일컬어지는 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한다.

그는 그해 3월 3일과 4일,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을 찾아가 "일본에서 조선유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시위가 시작됐으니 거사에 나서자"고 권유한다.

이 둘은 일본의 지배에 불만을 가지고 독립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과도 만나 3월 13일 장날(음력 2월 12일, 안동의 장날은 2일. 7일인데, 해방 이전에는 음력으로 장이 섰다)에 거사하자고 논의한다. 여기에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안동으로 내려 온 김재명도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안동의 3·1 운동은 강대극·김원진·김영옥·이중희 등 주역 4명이 하루 전날인 3월 12일 계획단계에서 예비검속을 당함으로써 좌절되고 만다. 예비검속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대한 탄압을 공고히 하고자 범죄 방지 명목으로 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법률이었다.

하지만 안동의 만세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해 안동의 첫 만세시위는 석주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의 1인 시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상동은 13일 장날 오후 5시 30분쯤 공신상회(현 신한은행 앞 인근으로 추정) 앞 도로에서 혼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된다.

그는 압송되는 과정에서도 "상제(上帝)의 뜻과 가호에 의해 한국은 10일을 넘기지 않아 독립될 것이며,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지만 출옥은 시간문제"라고 외친다. 그는 자동차 위에서도 만세를 외치는 기상을 보인다. 이상동의 1인 시위는 안동 3·1만세를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유림과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기폭제가 된다.

안동의 만세 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만큼 강력하고 격렬했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1인 시위를 시작으로 독립만세 운동은 27일 풍남면(현 풍천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했다. 사진은 당신 안동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신한은행 앞 광장과 문화의 거리. 김영진 기자
안동의 만세 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만큼 강력하고 격렬했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1인 시위를 시작으로 독립만세 운동은 27일 풍남면(현 풍천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했다. 사진은 당신 안동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신한은행 앞 광장과 문화의 거리. 김영진 기자

◆안동면 만세운동, 30여명 죽고 50여명 부상 당해

안동면의 의거는 안동교회와 지역 유림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됐다.

예비검속을 면한 김재명의 아버지 안동교회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김계한·황인규·권점필·이인홍 등은 거사를 서두르자고 의논하고, 3월 18일(음력 2월 17일) 장날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송기식을 비롯한 류동붕·송장식·송홍식·권중호·문소원·이종록 등 지역유림과도 만세 운동을 논의했다.

특히, 하루 앞인 17일(음력 2월 16일 장날)에 일어난 예안시위에 의해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의거 당일 낮 12시쯤 기독교인 30여 명은 안동면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과 농협안동지부 중간 지점)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을 앞세우고 남문통과 북문통을 오르내리며 시위를 벌였다. 또, 동문통에서 송기식 등 유림 시위대가 내려와 합세했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14명이 체포되고 시위 군중은 해산됐다. 하지만 오후 6시쯤 기독교인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재개했다.

밤이 되자 시위 군중은 더욱 많아져 19일 오전 0시 50분쯤에는 2천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안동면의 인구가 5천502명이었는데 노약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면민들이 참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제 통치기관인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하고 일부는 불을 지르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 수비대의 사격으로 해산됐다. 당시 안동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129호 495명이었다. 이들은 안동면 2차 시위 후, 자위단을 조직하고 탄압에 가담했다.

3월 23일 오후 7시 30분쯤 시작된 3차 시위는 안동군의 다른 면민들이 대거 참가한 군 전체적인 시위 양상을 보였다.

3천여 명의 군중은 "경찰서와 법원 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자를 구출하자"는 구호와 함께 두 기관으로 밀고 들어갔다. 수비대가 공포탄을 쏴 위협했지만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수비대는 실탄을 발사해 군민 3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중은 인근 산 위로 철수해 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그 때가 3월 19일 오전 4시쯤이었다.

안동면의 첫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신한은행 앞 광장에는
안동면의 첫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신한은행 앞 광장에는 '안동장터 3· 1운동지' 동판이 새겨져 있다. 김영진 기자

◆임하면 만세운동, 5명 죽고 15명 실형받아

임하면 만세는 금소동의 임찬일이 임범섭·임득연 등과 고종 국장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져오면서 준비되기 시작했다. 임찬일은 금양의숙에서 수학한 뒤 고종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해 봉도단에 가입했다.

그는 귀향 후 즉시 안동의 김원진과 은밀히 만나 선언서를 준 다음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때 규합된 동지인 노말수·임동숙·임윤익·손응돌·류북실·임춘섭·임범섭 등은 3월 16일(음력 2월 15일) 길안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의했지만, 당일에 호응자가 적어 거사 날짜를 3월 21일로 연기했다.

21일 오후 100여 명의 금소동민들은 마을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 소재지인 신덕으로 몰려갔다. 신덕주재소에 몰려간 군중은 일본 순사의 위협 발포로 한때 해산했으나 오후 9시쯤 다시 300여 명의 군중이 주재소에 밀고 들어가서 일부는 몽둥이를 들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이때 시위 군중은 주재소의 문과 유리창을 부수고 호구조사부 등 서류를 파기했으며 벽을 밀어 건물 대부분을 넘어뜨렸다. 순사 2명은 산으로 도망가 발포했고, 군중은 "순사보부터 죽여라"고 고함쳤다. 당시 조선인 순사에 대한 악 감정이 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재소를 파괴한 뒤 시위대는 임찬일과 노말수가 앞장서서 임하면사무소를 파괴하러 갔다. 면서기는 뒷산으로 도망갔고, 군중은 면사무소의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모두 부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 파괴에 적극 가담한 사람은 앞서 나온 인물을 포함해 조복선·임석현·박유석(본명이 임유진) 등이었다.

처음 임하면 시위를 계획할 당시에는 길안면과 공동으로 거사를 하기로 했지만 제대로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임찬일·손영학·김필락·이한룡 등은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두 면에 배부했으며 집집마다 방문해 독려도 했다. 그러나 이한룡 등 소수의 인원이 길안에서 임하 시위까지 참석했을 뿐 두 면의 중심 세력은 합류하지 못했다.

임하 만세운동에서도 경찰의 발포가 있었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그러나 시위가 끝난 후 안동수비대의 추격을 받던 임호일·임지열·김도주·신달석·신필원 등 5명이 26일에 살해당했다. 임하시위로 실형을 받은 사람은 15명이고, 그 중 임석현은 항변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궐석재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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