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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두류공원에 '창씨개명' 인물 공적비, 누가 왜 세웠을까?

1930년대 가뭄 겪던 대구시민에 곡식 나눠준 '서강준' 기리는 내용
창씨개명 첫날 개명한 사실 기록, '일제가 창씨개명 권장 용도로 비석 고쳤나' 의혹도

대구 두류공원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대구 두류공원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위인 달성 서강준 창덕비'. 일제때 세운 이 비에는 창씨개명 선포일인 소화 15년(1940년) 2월11일에 서씨가 개명했다고 기록(사진속 네모 안)돼 있다. 일제가 당시 대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몸소 실천한 서씨를 창씨개명이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대구 도심공원 한복판에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공적비가 있어 설치 배경과 의도를 놓고 지역 문화·역사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 두류도서관과 2·28 기념탑 사이에는 '위인달성서강준창덕비'가 서 있다. 처음 반고개 일대에 있던 것을 1970년대 달구벌대로를 확장할 때 대구시가 이곳으로 옮겼다.

비석 뒷면에는 '1939년 대구에 큰 가뭄이 들어 곡식이 부족하자 당시 미곡상조합장이던 서강준이 사재를 털어 쌀을 구해 대구부민들에게 나눠줬다'는 서강준의 공적이 적혔다. 비문은 종사랑(정9품) 성균관 박사 옥산 장시원이 썼다고 쓰였다.

비석 측면엔 창씨개명 사실이 기록돼 있다. '쇼와 15년(1940년) 2월 11일 대성준부('오오시로 토시오'로 추정)로 창씨개명했다. 쇼와 18년(1943년) 3월 조합원 일동이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다.

공적과 친일 행적이 함께 기록됐다 보니 비석을 누가, 왜 세웠는지를 놓고 지역 문화 및 역사계가 여러 추측을 내놓고 있다.

먼저 서강준의 공적만 알리고자 세운 창덕비에 일제가 창씨개명 사실을 덧붙여 다른 이들의 창씨개명을 유도했다는 추정이다. 비석 전면 '위인'이라는 단어는 전통 유가의 표현방식보다 일본식 표현에 가깝고, 옆면에 쓰는 문구는 나중에 쓴 '음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다. 1940년 2월 11일은 일제가 국내 창씨개명을 시작한 첫 날이다.

서강준 또는 그 측근이 실제로 일제에 부역해 공적과 창씨개명 사실을 함께 알릴 목적으로 비석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

달성서씨대종회도 비석 설치 배경을 파악하고 있지만 족보 상 서강준이라는 인물과 후손을 찾지 못해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문중 한 관계자는 "대종회 보유 족보로는 직계후손을 찾지 못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를 혼용했다. 족보 정립 전에 대구를 떠나 타 지역이나 외국으로 이주한 이들도 있고, 족보와 다른 이름을 쓴 인물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송은석 대구문화관광해설사회 사무국장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지 한 시대를 기록한 가치있는 사료다. 인물과 설치 배경을 명확히 밝혀 알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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