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에 목숨을 바친 그들이 있었기에 독립이 가능했다.
1919년 대구경북 전역으로 만세시위가 벌어지던 시절 일제는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등 수백 명을 동원해 창, 칼, 곤봉을 휘두르며 무력진압을 시작했다. 당시 시위 군중은 물러서지 않았고 만세시위가 계속됐다. 급기야 헌병대들은 시위참가자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여기저기 비명이 쏟아졌고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그들의 시위는 멈출 줄 몰랐다. 열사들은 날아오는 총탄에도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달려나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대구경북 3·1만세운동 유공 독립운동가 850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만세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안동 만세시위, 우리 측 기록 "40여 명 숨져"
안동 시위의 인명 피해는 일본 측 기록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측은 1919년 3월 23일의 안동군 전체가 참가한 안동면 시위에서 30여 명의 피살자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했다. 21일 열린 임하 시위에선 26일 대대적인 주동자 색출 과정에 5명이 살해됐다고 전해진다. 당시 안동면 시위를 이끌었던 송기식은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40여 명이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외무성과 육군성의 기록으로는 경상북도 전체 사망자가 25명, 부상자가 72명에 그친다. 심지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겨우 사망 15명, 부상 108명으로 보도했다.
일본 경찰은 17일 예안과 18일 안동에서 시위가 일어났을 때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23일 안동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23일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고 그 결과 많은 인명이 사상 당했다.
안동교회와 송기식 계열에 의해 주도된 2차 의거와는 달리 3월 23일의 3차 의거는 안동군의 다른 면민들이 대거 참가하는 시위 양상을 보였다. 3천 여 군중은 "경찰서와 법원 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자를 구출하자"는 구호와 함께 두 기관으로 밀고 들어갔다. 여기에서 수비대의 실탄 발사로 3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안동면 시위에서 지금까지 밝혀진 피살자는 김옥진(안동면)·권두경(서후)·이암회(서후)·권도익(와룡)·황영남(남후)·김필수(와룡)·김회백(와룡) 등이다.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것은 3차 의거가 대중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성주군, 일제의 무력탄압…3명 숨지고 7명 부상
성주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2일 유림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해 봉기함으로써 본격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유림 측에서는 월항면의 유생 이기정이 초전면의 유생 송준근, 송준필 등과 성주면 장날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4월 2일 오후 1시 성주면 경산동 관제묘 뒷산에 모여든 기독교 신도들과 시장 중앙에 모였던 유림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경찰이 주도인물 몇 명을 경찰서로 연행하자 군중의 분노는 한층 높아갔다.
경찰서 앞부터 군청과 우편국, 시장 통로로 1천500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경찰이 발포하자 군중은 일시 물러났다가 서북쪽 산 위에 모여 불을 피워 놓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오후 10시쯤 해산했다. 성주면 시장 만세운동에서 일본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와 이름 모를 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봉희 등 7명은 크게 다쳤다.
또, 이날 저녁 무렵 성주면 경산동 앞 도로에서는 선남면 문방동의 유지 석연극이 여지연, 박하빈을 비롯한 많은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시위 이후 일본 군경은 주동인물의 검거에 나서 많은 사람을 재판에 넘겼다.
재판에 회부된 30여 명은 대구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6월 내지 징역 1~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6개월 이상 옥고를 치른 사람 대부분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장애를 얻거나 시름시름 앓다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경 실탄 발포하며 무력 진압…영덕, 8명 순국, 16명 부상
영덕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8일 성내리 시장에서 정규하, 남여명, 남효직, 박의락, 권상호 등 기독교 세력과 지역 유지들의 주도 아래 전개됐다.
약속된 3월 18일 영해면 영해시장에 군중이 모여들었다. 시장에는 정규하가 이끈 기독교 신자와 남효직, 남여명 등이 이끌고 온 군중, 시장에 장을 보러 방문했다 참가한 이들까지 2천여 명이 모였다.
2천여 명의 군중은 성내동 시장까지 나아가 태극기를 흔들고 한국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외쳤다. 오후 1시쯤 '폭도 1천명이 동 주재소로 몰려왔다'는 전화를 받은 영덕경찰서장은 순사들을 데리고 자전거로 오후 3시 반 쯤에 영해주재소에 도착했다.
영덕경찰서장 등 영덕과 영해 일경들은 서문에서 쉬던 군중에게 해산하도록 강요했다. 휴식을 취하던 군중은 이를 거절하고 다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 외쳤다. 일경들이 군중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구에 모래가 들어가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5시쯤 대구 보병 80연대에서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해 영해에 도착하자, 일제 군경들은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군경은 공포탄 발사에도 만세 군중이 동요하지 않자 실탄을 발포하며 무력적 진압과 탄압을 자행했다.
이 때문에 임창목, 최재곤, 이해술, 이회동 등 8명이 순국했다. 남효량, 김위, 김도식 등 16명은 부상을 당했다. 이어 군경들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들어갔다. 3·1운동과 관련한 인물에 대해 일제 군경들은 제1차 검거 작전으로 김세영 등 96명을 재판에 회부했고, 제2차 검거 작전으로 남응하 등 74명을 붙잡아 처벌했다.
◆"쏠 테면 쏴라" 의성 시위대, 일경의 위협에도 독립만세 외쳐
3월 15일부터 4일 동안 안평면 대사동의 교인들을 필두로 연일 계속된 의성군의 만세시위는 안평 면민들의 항일의식을 한껏 고취시켰다. 시위대는 18일 안평면 주재소에 몰려가 그곳 경찰들마저 만세를 부르게 만들었다.
19일 도리원 장날 이양준, 이종출, 김옥돈 등 7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도리원으로 향했다. 길가의 동민들이 참가하면서 시위대 규모는 점점 커졌다. 선두가 봉양면 사부리에 이르렀을 때는 행렬의 꼬리가 아직 안평면 소재지에 있어서 행렬이 8㎞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시위 행렬의 정보를 입수한 도리원 주재소 순사들은 총으로 무장하고 길을 가로막았다. 이때 이양준이 가슴을 풀어헤치며 "쏠 테면 쏴라, 찌를 테면 찔러 봐라"고 외치니, 순사들은 그의 독기와 시위 군중의 숫자에 눌려 달아났다.
이에 일경은 헌병 등을 급파해 시위대를 공격하면서 도리원 시장을 폐쇄했다. 오후 1시 30분쯤 권사연, 김유식, 김일석, 이봉수, 김치명 등이 시위 군중을 이끌고 도리원 주재소로 몰려가서 그곳을 포위하고 돌을 던졌다. 주재소 유리창이 깨지자 일본 군경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이 총격으로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던 권해운과 이양준(가슴 총상), 이봉수, 김일석, 이용학, 이이경, 권사연, 김도식, 정흥록 등 9명이 총상을 입었다. 권해운은 출혈이 심해 대구로 호송하던 중 숨지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일본 군경은 부상자들까지 구속했다. 또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해 시위 다음날부터 안평면의 각 마을을 뒤지며 시위 주동자 검거를 시작했다. 결국, 51명이 붙잡혔고 그 중 26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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